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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가 있는 충북역사기행 - 청주 공북루

고려대신 28명, 무심천변에서 詩를 짓다
안동서 귀로 도중 청주에서 5개월여 체류
청주의 풍광과 '공민왕의 은혜' 감사 표시
누각, 정황상 지금의 사천동 일대에 존재
중앙공원 망선루와 쌍둥이 유적 복원절실

  • 웹출고시간2011.09.14 17:46:27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홍건적이 침입하다

머리에 붉은 두건을 써 이름이 붙여진 홍건족은 고려를 노략질하기 위해 1차(1359년·공민왕8), 2차(1361년·공민왕 11) 등 두 차례에 걸쳐 한반도를 침입했다.

1차 때는 평안도 함종까지 진출했으나 고려군의 반격으로 퇴각했다. 2차 때는 10만여명의 대군이 침입했다.

공민왕은 개성의 마지막 방어선인 절령(일명 자비령·개성~평양 중간)이 돌파를 당하자 남쪽으로의 몽진(蒙塵)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몽진은 왕의 피난길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본래는 '먼지를 뒤집어 쓴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공민왕 일행이 지금의 경기도 땅에 들어서자 우리고장 충주, 청주목사 등이 잇따라 알현했다.

'분수원(焚修院) )에 이르니 안렴사 안종원 충주목사 박희(朴曦)가 와서 알현하고 드디어 영서역(迎曙驛 양주에 이르니 남경유수 최인원(崔仁遠), 청주 목사 김성갑(金成甲)이 와서 알현하였다.'-<고려사 공민왕 10년 11월>

■공민왕 몽진(남행길)

◎개성 출발(10년 11월 丙寅)→분수원(경기도 파주)→영서역(양주)→사평원(경기도 광주)→경안역(〃)→이천현→음죽현(장호원)→충주(10년 11월 乙亥)→용궁(경북)→◎복주 도착(10년 12월 임진, 지금의 경북 안동)

공민왕의 몽진(피난길) 루트이다. 우리 고장 충주를 통과해 백두대간을 넘어 복주(안동)로 향했다.
◇충주를 경유하다

고려 수도인 개성은 공민왕이 이천현을 경유할 때 홍건적에게 완전히 함락됐다. 이때 천인공로할 만행이 저질러졌다.

'우설(雨雪)이 내리는데 어가가 이천현에 이르니 어의가 젖어 얼어서 섶을 태워 스스로 따뜻하게 하였다. 이날에 적이 경성을 함락하고 유둔하기 수월(數月)에 우마를 죽여서 가죽을 펴어 성을 삼고 물을 대어 얼음을 만드니 사람이 붙잡고 오르지 못하게 되었으며 또 남녀를 잡아 불에 굽고 혹은 임신부의 유방을 구어 먹이를 삼아 잔인하고 포학함을 방자히 하었다.'-<고려사 공민왕 10년 11월 신미일>

개성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던 공민왕은 남행을 거듭, 사평원(경기도 광주)→경안역(〃)→이천현→음죽현(장호원)을 경유한 끝에 그해 11월 을해일에 충주에 도착했다. <표 참조>

공민왕은 충주에서는 거의 머물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는 '을해(乙亥)에 어가(御駕)가 충주(忠州)에 이르렀다'라고 매우 간략히 적었다.

공민왕 일행이 백두대간 어느 고개를 통해 남행을 계속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일부 사료는 조령(속칭 문경새재)을 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사람과 물산의 이동이 가장 활발했던 고개는 거대 입석불이 서있는 계립령(일명 하늘재)이었다. 이 부분은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최종 목적지는 복주였다

공민왕이 처음부터 복주(지금의 안동)를 임시수도로 생각했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다만 그러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안동은 백두대간 남쪽 사면이 위치하고 있다. 이 경우 백두대간은 홍건적의 남진을 차단는데 최적의 지리적 조건이 된다. 또 안동은 물산이 풍부한 고장이기도 하다.

공민왕은 복주에 최대 3개월 정도 머무른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인사 단행, 외유 등 왕으로서의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했을 뿐 특이 사항은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영호루에 행차하여 드디어 배를 타고 유상하고 인하여 호변(湖邊)에서 활을 쏠때 안렴사가 왕을 위하여 향연을 여니 보는 자가 담과같이 늘어 섰는데 혹은 옷깃을 돌려 탄식하는 자도 있고 혹은 참서(讖書)를 외며 탄식(歎息)하기를…'-<공민왕 10년 12월 을미일>

◇귀로에 청주에 도착하다

공민왕은 개성이 수복됐다는 소식을 듣자 곧바로 복주를 출발, 귀로에 올랐다. 그는 즉위 11년 2월 복주를 출발, 예천→상주 순으로 경상도를 빠져나왔다.(표 참조)

그리고 충청도(당시 양광도) 지방에 들어올 쯤 수원으로 갈까, 아니면 우리고장 청주를 통해 개성으로 돌아갈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그는 결국 청주를 택했다. 이유는 청주가 3도의 요충이자 양곡 운반이 편리한 고장이기 때문이었다.

'감찰사가 상언하기를, "그윽히 듣건대 어가가 수원(水原)에 행차하여 궁궐을 경영코자 한다하오니 수원은 좁고 바다에 가까이 있어 왜구가 염려되오며 맨처음 홍적에게 항복하였으니 인심을 보장하기 어렵나이다. 그런데 청주(淸州)는 이미 순행을 준비하였고 또 3도의 요충에 당하여 양곡 운반에 편리하고 적이 능히 가까히 하지 못할 것이오니 원컨대 아직 청주에 어가를 멈추었다가 서서히 농사의 틈을 기다려…<고려사 공민왕 11년 6월 병신일>

공민왕은 속리사(8월 丁亥)→원암역(지금의 보은 삼승면 원남리)→보령현(지금의 보은)→회인→피반령 등을 경유한 끝에 그해 8월 청주에 도착했다.(표 참조) 그러나 이 루트는 잘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다.

경상도 상주에서 보은을 목적지로 하면 곧장 오면 된다. 그러나 속리사를 거쳐 보은 최남단인 원암을 경유한 것은 멀리 돌아가는 모습이 된다. 이 부분도 추가적인 규명이 필요해 보인다.

◇무심천변 공북루에 올라 시를 짓다

공민왕과 그를 수행한 고려 중·상위 관료들은 11년 8월부터 최소 5개월 동안 행궁이 있는 청주읍성에 머물렀다. 이는 복주 체류보다 긴 시간이다.

공민왕은 청주에서의 체류기간이 길어지자 망선루(당시 취경루)에서 과거시험을 실시했다. 또 원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는 의식인 '배표'(拜表) 행사를 무심천변의 '공북루'(拱北樓)에서 가졌다.

사가들인 이같은 배경에 대해 △반원정책은 외교적 한계가 있고 △따라서 양국 관계를 호전시킬 필요성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공민왕은 그 직후 몽진을 호종한 26명의 대신에게 응제시(임금의 명령에 따라 짓는 시)를 짓는 시회(詩會)를 개최한다.

'첨의상의 강지연을 원나라에 보내어 신정(新正)을 축하케 하고 전리 판서 이서룡은 천추절을 축하케 할 때 북정(北亭)에 행차하여 표문(表文)을 배송하고 드디어 공북(拱北)에 올라 문신에게 명령하여 현판상의 시운(詩韻)을 화답케 하였다.'-<고려사 공민왕 11년 8월 신유일>

정황상 공북루는 고려 전기부터 존재하던 초대형 누각이고, 중숙왕 20년(1320)에 중창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때 권한공(權漢功·?-1349)이라는 인물의 시가 당시 중창된 공북루에 걸렸고, 공민왕은 이날 배표의식을 가진 후 권한공의 시를 차운(次韻)하도록 신천, 원송수, 이색, 성사달, 이암, 이제현, 황석기, 유숙, 우길생, 이강, 염흥방, 전녹생, 최용, 권주, 박중미, 김군정, 화지원, 우현보, 이인, 한방, 조계방, 허전, 전득량, 이방질, 한상질 등 26명의 신하에게 명령했다.

공민왕 귀로

◎복주 출발(11년 2월 辛丑)→예천→상주→속리사(8월 丁亥)→원암역(보은 원암)→보령현(지금의 보은)→회인→청주(8월 壬辰)→진천(12년 2월 乙亥)→죽주(경기도 안성)→봉성(〃 파주)→통제원→◎흥왕사(12년 2월 癸未, 개성)

공민왕의 귀로이다. 속리사-원암역-보령현(보은)-회인-청주 순으로 올라왔다. 청주에서는 5개월여 체류했다.

조선 중종때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우측부터 세로 4번째 공북루(拱北樓)가 보인다. '청주 북쪽 3리에 위치한다'(세로 선)고 적었다.

차운은 남이 지은 시의 운자(韻字)를 따서 시를 다시 짓는 것을 말한다. 공북루는 남방의 대읍인 청주가 개경의 조정에 신복(臣服·신하로서 복종한다)하는 상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조선 전기까지 공북루에는 총 28편의 시가 걸려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그날 현장에서 지은 26편의 시 외에 1편(권한공의 시)은 이미 걸려 있었고, 나머지 1편은 개성에서 보내온 백문보(白文寶·?∼1374)시였다. 즉 '26+1+1'인 셈이다.

당시 실력자 유숙(柳淑·1316∼1368)은 개성에 머물며 '뒷일'을 처리하고 있던 백문보에게 시 한편을 청주로 보낼 것을 요청한 것으로 나타난다.

공북루에 편액으로 걸렸던 시 내용은 왕의 은혜에 감사하고 무심천 풍광을 읊은 시가 다수를 차지고 있다. 다음은 신천(?-1339)이라는 인물의 시다.

'고을과 산천이 좋으니 / 백성이 태고의 풍속을 즐기네 // 좌중의 손님들은 전의 내한(內翰)이었고 / 목사는 옛 중서(中書)로다 // 소나무ㆍ참나무 우거진 봉우리가 빼어났고 / 뽕나무와 삼을 심은 들판이 툭 트이었도다 // 난간에 의지하여 시를 읊으려 하니 / 수풀에 새들이 나를 재촉하는구나.'-<신증동국여지승람>

정황상 '봉우리'는 지금의 우암산, '툭 트인 들판'은 청주 북쪽 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밖에 이인(李靭)의 시에는 '顯廟此恢復'(현묘차회복·현종이 여기에서 나라를 크게 회복하였다)이라는 표현도 등장한다. 고려 현종은 거란이 2차 침입(1110)을 하자 지금의 나주로 몽진을 갔다가 청주를 경유해 개성으로 돌아간 바 있다.

◇콘텐츠 방향

조선 중종 때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은 청주목 누정조에서 '공북루 고을 북쪽 3리에 있다'(그림 참조)라고 분명히 적고 있다.

무심천이 일제시대 직강화된 것을 감안하면 당시 공북루는 지금의 사천동 일대(붉은 원)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공북루가 최소한 조선 전기까지 존속했고, 또 무심천 가인 지금의 사천동 일대에 위치했음을 의미하고 있다. 현재의 무심천은 일제시대 직강화된 하천으로, 당시 물길은 사천동 일대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청주의 역사성을 살리기 위해 공북루 복원이 절실해 보인다. 공북루는 공민왕 등장, 초대형 누각, 28명 고려 대신들의 시, 무심천변, 행재소 등 이른바 스토리텔링적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공북루는 어찌보면 지금의 중앙공원 망선루와 쌍둥이 관계에 있다. 그러나 그 규모나 역사적 가치는 그보다 앞선 것으로 보여진다. 고려 28명 대신들의 시를 누정에 걸어 놓은 것은 그 자체로 명소가 될 수 있다.

/ 조혁연 대기자

자료도움: 충북대 사학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 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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