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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가 있는 충북역사 기행 - '동창이 밝았느냐' 남구만

"지극히 어려울 때 청절을 지키니 불세출 위인"
일부 사료 "외가가 있던 충주에서 태어났다"
부친임지 진천 방문 두타산 벼룻돌 극찬해
당시 가뭄 극심 상당산성에서 기우제 주관
청주목사로 선정…생전에 '生祀堂' 세워져

  • 웹출고시간2011.11.02 16:21:26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과거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동창이 밝았느냐'라는 시조가 실려 있었다. 남구만南九萬·1629~1711)이 저자로, 목가적이면서 권농(勸農)의 의미로 해석됐다.

남구만이 이 시조를 지은 동기는 완전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1689년 그는 숙종의 뜻을 거스르고 희빈장씨의 소생인 균(均)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보물 제 1484호 남구만의 초상화로, 진천인물 최석정이 글을 썼다.

역린을 건드린 것으로, 그는 지금의 강원도 동해시로 유배됐다. 동해 사람들은 이때 그 유명한 '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 내용의 시조가 지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남구만 사당이 남아 있는 경기도 용인시에서는 낙향했을 때 '동창이 밝았느냐'를 지었다고 주장, 역시 같은 내용의 시조비를 세웠다.

이와는 별개로 1920년대까지 창으로 불려진 내용은 요즘 교과서에 실린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동아일보 1929년 9월 29일자 시조 소개란에 실린 내용이다.

'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질이 우지진다 / 소치는 아희놈은 상기아니 일엇느냐 / 뒷뫼에 사래 긴 밧흘 언제 갈려 하느니.'

'노고지리'를 '노고질', '아이'를 '아희놈', '재 너머'를 '뒷뫼'로 표현한 것이 재미있다.

◇충주출생 가능성도 높다

남구만의 출생지에 대해서도 충주 누암과 충남 홍성이 맞서고 있다. 일부 사료는 남구만이 외조부 권엽(權曄·1574∼1650)이 기거하던 충주 누암에서 태어났다고 밝히고 있다.

권엽은 정묘호란 때 충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이 됐고, 또 병자호란 때는 임금을 호종, 남한산성에 들어갔던 인물이다.

우리가 아는 '조선시대' 이미지는 사실 17세기 이후에 형성된 것들이다. 그 이전에는 재산을 남녀 자식 가리지 않고 균등분배했고, 제사 또한 남녀가 돌아가며 지냈다. 이른바 윤회봉사(輪回奉祀)다.


따라서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거나 관리를 하려면 처가살이를 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이는 남구만 충주 출생설을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표 참조>

남구만이 유년시절을 보낸 고향이 結城(결성·지금의 충남 홍성)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우리고장 청주목사가 되기 전 결성으로 낙향한 경험이 있다.<표 참조>

◇진천을 무척 사랑했다

남구만은 진천을 자주 찾았다. 객사(위)와 관련된 시를 남겼고, 두타산(아래) 벼룻돌을 좋아했다. 18세기 해동지도.

<그림>과<표>에서 보듯 남구만은 우리고장 진천을 자주 방문했다. 아버지 임지였고, 또 거주했던 경기도 용인과 가까운 거리였던 점 등이 작용했다.

남구만의 아버지 일성(一星)은 우리고장 진천 현령(종5품)을 지냈다. 그는 이때 진천을 자주 방문했다.

관련 시가 그의 문집인 '약천집'에 전해진다. 경상도 진휼어사로 가던 중 진천 관아를 찾았고, 이때 객사(客舍)에 걸려있던 퇴계 이황의 시를 발견했다.

다음은 퇴계의 시에 차운한 시로, 제목은 '진천의 객사에서 퇴도(退陶)의 시에 차운하다' 이다. 차운은 남의 시운(詩韻)을 빌어 시를 짓는 것을 말한다.

'/…/굶주린 백성 구휼하려 이제 남해를 가노라 / 봄이 돌아왔으나 농사짓는 이랑에는 아침밥과 점심밥 먹이는 이 드물고 / 해가 저물었으나 마을에는 저녁밥 짓는 연기 드물구나 / 벽에 걸려 있는 퇴도의 글씨 우러러보니 / 어이하여 또다시 임인년이 되었는가.'-<약천집 제 1권>

조선시대에는 진천 상산자석, 함경도 종성석, 평안도 위원석, 평양 대동강석, 황해도 해주석, 충청도 남포석, 단양자석 등의 벼룻돌이 유명했다.

남구만은 진천 상산자석을 격찬했다. 상산자석은 조형이 현대화돼 초평면에서 지금도 생산되고 있다.

이중 '붉은 돌' 때문에 이름이 붙여진 진천 상산자석은 1920년대에 발간된 '조선환여승람'에 실릴 정도로 그 명성이 일제 강점기 이후까지 이어졌다.

지금도 그렇지만 상산자석은 진천의 명산인 두타산 부근에서 주로 채석됐다. 남구만도 이 상산자석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진천 두타산 벼룻돌 작지만 매우 아름답다'(鎭川頭陀山紫石硯 小而甚佳) 제목의 한시를 남겼다.

'두타산의 벼루 작아서 손가락이 들어갈 만한데 / 글씨 쓰면 먹빛이 구름 같아 붉은빛을 발산하네 / 옛 와연(瓦硯)과 새로 주조한 벼룻돌 면만 넓을 뿐이니 / 한 호백구(狐白求+衣) 끝내 천 마리 양가죽과 바꾸지 않는다오.'-<약천집 제 1권>

호백구는 여우 겨드랑이의 하얀 털로 만든 갖옷으로, 상산자석을 상징하고 있다.상산자석은 천개 양가죽과 바꾸지 않을 만큼 진귀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청주에서도 선정을 베풀다

남구만이 청주목사가 된 것은 그의 나이 42살(현종 11년) 때였다. 현종 때는 극심한 가뭄이 자주 찾아오던 시기였다. 그가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상당산성을 찾았다.

남구만은 청주목사로 있을 때 세금과 관련된 상소를 자주 올렸다. 하단 첫머리에 '청주목사 남구만'이 보인다.

남구만은 당시 가뭄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청주상당산성기우제문'(淸州上黨山城祈雨祭文)에 '지난 가을과 올 봄에 뿌린 씨앗이 말라 죽어 길과 도랑에는 굶어죽은 사체가 늘어가고 자식까지 생매장할 정도였다'라고 적었다.

그의 문집에도 거의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인용문의 '본주'는 청주목을 가리킨다.

'본주는 초겨울부터 유리(流離)하여 떠도는 백성들이 이미 도로에 늘어섰고, 그 가운데 오랫동안 굶주리고 곤궁한 자는 끝내 죽음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동짓달 초순에 신이 그 죽음을 알고 순찰사영(巡察使營)에 보고한 것이 이미 네 사람에 이르렀습니다.'-<약천집 제 4권>

'현재 가슴을 치면서 죽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들에 버려져 우는 아이들이 날마다 관아의 문에 모여들어 줄줄이 이어지고 있으니, 내년 봄에 이르게 되면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건장한 자와 연약한 자가 모두 죽어서 골짝이 메워질 형편입니다.'-<〃>

남구만은 기우제가 아니더라도 매우 적극적인 행정가였다. 전세, 대동미 등 조세 행정이 여의치 않자 상소를 올렸고, 이에 대해 현종이 '모두 그 말대로 따랐다'라고 실록은 적었다. <그림참조>

그가 떠나자 청주에는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생사당은 말 그대로 관찰사나 수령의 선정을 찬양하는 표시로, 살아 있을 때부터 백성들이 제사 지내는 사당을 일컫는다.

◇다산이 크게 칭찬하다

숙종은 경신, 기사, 갑술 등 이른바 '환국정치'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남구만은 이런 정치적 환경에서 유배를 3차례 갔으나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17세기 소론의 영수를 지냈음에도 목숨을 잃지 않은 것은 그의 인격과 경륜을 숙종이 크게 신임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남구만은 문장, 서화 등에 두루 능했다. 현존하는 그의 초서체 글씨다.

그는 문장, 서화 등에 모두 뛰어났던 인물로, 당시로서는 무척 장수한 83세로 생을 마치면서 숙종의 묘정에 배향됐다. 그의 사후에 다산 정약용이 다음과 같은 인물평을 썼다.

'간관(諫官)이 된 때부터 그 배격하는 것이나 구제하는 것에 있어서 공정을 잃지 않았다. 재상이 되자 시고 짠 것(酸鹹)을 조절하여 이리저리 유지해 나간 것이 또한 여러 사람의 마음을 굴복시키고 나라의 명맥을 보호하였다.'-<다산 시문집 제 14권>

'지극히 어려운 때에 처하여 끝내 청절(淸節)로 이름을 완전히 보존하고 생애를 마쳤으니, 불세출(不世出)의 위인이다.'-<〃>

/ 조혁연 대기자

자료도움: 충북대 사학과, 진천문화원, 한국학 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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