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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가 있는 충북역사기행 - 노수신 유배지와 괴산 산막이 옛길

깊은 산속에 홀로 앉아 빈 마음만 북쪽 향해
영령 청령포와 비슷한 지형 육지속 고도
노수신, 22년 유배생활 중 3년 귀양살이
최근 산막이 옛길로 각광 길끝에 수월정
연하구곡 설정 노성도 이곳은 신선별장

  • 웹출고시간2011.10.26 18:03:53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노수신 적소를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수월당이다. 본래 아래 있었으나 칠성댐 수몰로 위로 이전됐다.

괴산군 칠성면의 산막이 옛길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괴산군에 따르면 주말이면 평균 1천500~1만대의 승용차가 산막이 옛길을 찾고 있다.

따라서 이를 사람수로 따지면 주말평균 5천~1만명이 산악이 옛길을 찾고 있는 셈이 된다.

산막이 옛길은 칠성댐 건너편인 괴산 칠성면 외사리 사오랑 마을에서 칠성호를 따라 남쪽 방향으로 시작된다.

약 3㎞ 정도의 거리로, 옛길 끝은 칠성면 사은리 '산막이' 마을이 된다. 마치 영월 청령포를 연상시키는 산막이 마을에는 과거 분청사기 가마가 위치했고, 이를 굽던 도공들은 가마 옆에 산막을 치고 기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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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당을 가까이서 본 모습이다. 산막이 옛길이 끝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산막이라는 마을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따라서 댐 담수로 위치가 위로 올라오기는 했지만, 지금의 산막이 마을 옛길은 과거 도공들이 왕래하던 길이었다.

그 끝에 노수신(盧守愼·1515~1590) 적소(유배지)가 위치하고 있다.

◇고행의 상징 유배용어

장배, 위리안치, 절도안치, 본향안치, 적소, 귀양살이 등 유배 용어는 그 표현이 다소 어려운 면이 있다.

장배( 杖配)는 유배를 그냥 떠나는 것이 아니라 곤장을 맞고 떠나는 것을 말한다. 죄의 경중에 따라 60~100대형이 추가됐다.

위리안치(圍籬安置)는 거주지를 제한하기 위해 집 둘레에 탱자나무 울타리를 둘러치는 것을 말한다.

'위리'는 탱자나무 울타리를 뜻한다. 죄가 더 무거운 죄인은 담장이 아닌 방 둘레에 탱자나무를 둘렀다.

절도안치(絶島安置)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서 혼자 유형생활을 치르도록 하는 것으로, 유배형 중 최고의 중형에 해당한다.

본향안치(本鄕安置)는 고향에서 유배생활을 하도록 하는 경우로, 죄가 가볍거나 유배생활이 막바지에 이를 때 행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밖에 적소(謫所)는 유배자가 머물던 장소, '귀양살이'는 천민들이 살던 곳으로 유배를 보낸다는 '귀향살이'에서 유래했다.

고려시대 때는 천민 집단거주 지역인 향·소·부곡 중 '향'(鄕)으로도 유배를 보냈다. '귀향살이'가 발음하기 좋게 '귀양살이'로 변했다.

◇충주로 낙향하다

조선 중종~선조 연간을 산 노수신은 대사간, 부제학, 대사헌,이조판서, 대제학 외에 좌·우·영의정 등 삼정승을 모두 역임하는 등 인생 경력이 무척 화려하다.

그러나 이는 그의 나이 53세 이후로 일로, 그 전에는 무려 22년 동안 유배지를 전전해야 했다. 첫번째 시련은 이른바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찾아왔다.

그는 인종 임금 즉위초에 대윤(大尹)의 편에 서서 소윤 이기 일파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그러나 명종 즉위와 함께 소윤(小尹) 윤원형이 을사사화를 일으키면서 정국이 반전됐고 그는 이조좌랑의 직위에서 파직됐다. 그는 이때 충주로 낙향한다.

노수신은 충주출신 이연경(李延慶)의 문하생이자 맏사위였다. 지금으로 치면 선생님의 딸과 결혼한 것이 된다.

따라서 그가 충주로 낙향한 것은 처가살이를 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당시는 처가살이가 자연스런 현상으로 흠이 되지 않았다.

그는 이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시만 보면 노수신의 생부는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해마다 십이월이 찾아오면 / 화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였고 / 형제간에 무고함을 기뻐하고 / 혼정신성 건강하심 경축하였지 / 나라는 어지럽고 몸은 형극에 있으니 / 집안소식 또 누가 전해주려나 / 깊고 깊은 산속에 홀로 앉아서 / 빈 마음만 북쪽 향해 부모님께 드리네.'-<소재집 권1>

◇19년 진도 유배생활

노수신의 인생 전반기 고행은 '충주 낙향'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을사사화가 원인이 돼 결국 전남 순천으로 유배를 가야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이른바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됐다는 판정을 받으면서 죄가 가중, 고도(孤島) 진도로 이배되어 19년간 섬에 갖히게 된다.

'이에 송인수·이약빙은 사사하고, 이언적·정자는 극변안치 하고, 노수신·정황·유희춘·김난상은 절도안치 하고 (…) 윤강원·조박·안세형·윤충원·안함은 부처하고자 한다.'-<명종실록>

그는 유배생활 15년차가 되어서도 고향생각, 울분, 원망 등의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했다. 심지어 자살충동까지 느낀다.

'내가 이 섬에 들어온 뒤로 / 몇 번이나 이 글을 썼었던가 / 한 장 글을 쓸 때마다 온 넋 끊어지니 / 남은 넋은 얼마나 되겠는가 / 이제 이미 십오년을 지나니 / 편지를 써본들 어찌 할 건가 /…/ 생각건대 부모님 이 글 받으시면 / 읽으시고 또 옷길 적실 것이라 / 옷깃 적시실 날 언제 그치려나 / 하늘이 나를 버리기 바라노라 /…/.'-<소재집 권4>

노수신은 17살(1531년) 때 스승 이연경의 맏사위가 됐다. 그러나 결혼 16년차가 되어도 아이가 없는 가운데 부인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부인 이씨의 답시도 노수신 만큼이나 가슴을 후벼파고 있다.

'머리 얹고 부부가 되었건마는 / 소리삼켜 오래도록 서로 이별하여네 / 다음 생은 아직 점칠 수 없고 / 동혈기약은 이미 지키기 어렵게 됐구려 / 눈물로 편지 젖어 먹이 퍼졌고 / 줄 삐뚤고 사연들이 어지러웁다 / 편지받고 혼자 있음 가련해 하니 / 따를 만한 자식 하나 없어서라네.'-<소재집 권1>

그는 유배생활 중에 왜구가 창궐하자 전라도 광주로 피신했다가 다시 진도로 들어가기도 했다.

◇괴산으로의 이배

그는 유배생활 19년차인 51살 나이에 처가와 가까운 괴산 칠성면으로 이배됐다. 문정왕후가 죽고 소윤(小尹) 윤원형이 실각하는 등 정국이 크게 변한 결과였다.

이 때문인지 그의 시는 한결 명랑해졌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변했다. 그러나 그는 괴산 적소와 관련된 시는 한 수도 남기지 않았다.

대신 다소 자유로운 몸이 되면서 보은 속리산 자락에 은거하고 있던 18년 연장자인 거유 성운(成雲·?∼1528)을 찾아 실로 오랫만에 학문적 토론을 벌린다.

'우연히 산음의 흥이 일어 / 먼 길을 돌아 곡구의 여막을 찾노라 / 추위가 와도 소나무는 빼어난데 / 섣달을 끼고 버들은 가늘게 퍼지네 / …/ 어찌 굳이 술을 싣고 물으리오 / 이미 십년간 책 읽는 즐거움을 알았는데.'-<소재집 권5>

◇늦게 이룬 부부애

늦게 다시 만난, 동갑내기였던 두 부부는 오래도록 함께 했다. 부인이씨가 76살 되던 해 3월에 죽고, 노수신은 한 달도 안 된 4월에 졸했다. 그가 죽자 당시 사관은 그를 예를 갖춰 추모했다.

'그는 곤액스런(22년 유배생활 지칭) 상황 속에서도 독서를 하고 문장을 저술하며 스스로 즐겼다. (…) 그의 문장은 시(詩)에 가장 뛰어나 기발하고 정묘하여 일가견을 이루었으므로 한 편의 문장을 지어낼 적마다 사방의 학자들이 전송(傳誦)하였다.'-<선조수정실록>

'전송'은 여러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외우는 것을 말한다. 노수신은 청주목사와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는 등 우리고장과 행정적으로 큰 인연을 맺기도 했다.

◇연하구곡과 수월정

노수신 유배지(붉은 원)를 하늘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푸른색 원은 연하구곡의 제 9곡이다. 지형이 전체적으로 영월 청령포를 연상시킨다.

노수신은 본래 경상도 상주 사람이다. 그의 10대 직손 중에 노성도(盧性度·1819∼1893)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상주를 떠나 노수신의 적소였던 괴산의 연하동에 수월정(水月亭)을 짓고 연하구곡을 설정했다.

수월정은 보다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칠성댐으로 담수가 되면서 지금의 산막이 옛길 끝자락으로 이전했다. 조선시대 구곡은 하류에서 상류 방향으로 1~9곡이 설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18세기 해동지도의 모습이다. 푸른색 원이 노수신 적소에 해당하는 곳이고, 그 뒤 토계서원은 지금은 화엄서원으로 변했다.

그러나 노성도는 자신이 왕래하던 길이 상주-괴산이었던 까닭에 상류에서 하류 방향으로 1~9곡을 설정했다. 따라서 수월정 앞이 바로 제 9곡이 된다.

그는 물안개가 많고 저녁노을이 아름답다는 뜻인 연하구곡을 그의 유작문집 '선집요결'에서 다음과 같이 예찬했다.

'볼그레한 구름이 창가에 비치고 구곡에 아침햇살 비치니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산수이다.(…) 내가 영남으로부터 와서 괴산 동쪽의 산수에 접하여 스스로 樂山樂水라고 했으니 이곳은 군자가 살곳이다. 이곳 연하동은 또한 신선이 별장을 삼은 곳이다.'-<이상주 역>

/ 조혁연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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