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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가 있는 충북역사기행 - 충주 목계나루 수변

충주 조선후기 전국 4위 대읍, 그 중심에 목계나루
고려 정몽주 덕흥창 건의, 내륙항 역사 시작
이후 경원창-가흥창- 목계나루 순으로 번창
'막흐레기' 여울에서는 '끌패'가 배 끌어올려
하항이 자꾸 이동한 것은 私商과 바닥의 토사

  • 웹출고시간2011.10.12 18:28:29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조선 정조 때의 전국 인구수이다. 한성을 제외하고 충주가 평양, 의주에 이어 3위에 올라 있다.

조선 정조 때 간행된 '戶口總數'(호구총수·1789)는 당시 전국의 호구와 인구수를 꽤나 정확히 기재해 놓았다.

호구총수에 따르면 당시 전국의 총호수는 1백75만2천837가구, 총인구는 7백40만3천606명이었다.
이를 행정 단위별로 살펴보면, 한양 18만9천153명, 평양 10만7천592명, 의주 8만9천970명, 충주 8만7천331명, 전주 7만2천505명, 경주 7만1천956명으로, 충주가 전국 4위를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는 상주, 진주, 길주, 해주, 대구,양주, 강계, 성천, 나주 등이 그 뒤를 이었다.<표 참조>

이처럼 충주가 대읍(大邑)의 규모를 지녔던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당시 충주목이 관할하던 행정 면적은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

조선후기 충주목의 행정구역 모습이다. 서쪽으로는 경기도, 동쪽으로는 백두대간까지 뻗혀있다.

일제강점기 직전까지 존재했던 지도를 보면 충주의 서쪽 경계는 지금의 음성 금왕, 맹동면 일부까지, 동쪽은 백두대간에까지 이르렀다. <그림 참조>

이 때문에 충주의 인구 규모는 대동지지가 간행된 1861년(철종1)에도 청주목 인구를 크게 앞선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 충주 인구는 9만7천명, 청주는 4만6천명이었던 것으로 고산자 김정호는 기록했다.

두번째 이유는 하항(河港) 목계나루의 번창에 있었다.

◇ 충주 조운(漕運)과 왜구

지방의 조세를 수로를 통해 중앙으로 운송하는 것을 조운제(漕運制)라고 한다. 이와 관련, 세곡(稅穀)의 운송 편리를 위해 바닷가나 강변에 창고를 설치했다. 이른바 조창(漕倉)이다.

고려는 충주에 덕흥창(德興倉)을 설치했다. 이를 건의한 인물은 그 유명한 정몽주였다.

'좌수참(左水站)은 충주에 있는데, 고려조에 정몽주가 건의하여 수참을 설치하다.'-<만기요람>

가금면 창동리 소일마을에 위치했던 덕흥창은 초기에는 별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세곡의 상당량이 남해, 서해 등 바다를 통해 운송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충정왕은 1350년 세곡을 바다로 통해 운송하는 것을 전면 금지시켰다. 대신 왜구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한 내륙 운송을 명령했다.

이때부터 경상도 세곡이 남한강 물길로 집하되기 시작했고, 덕흥창이 위치한 충주 남한강 수로는 고려 운송의 중심에 서게 됐다.

태종실록의 충주 경원창과 관련된 내용이다. '충주 수변에 창고를 지어 경상도 세곡을 받으라'는 내용(선안)이 보인다.

◇ 창고를 하나 더 지어라

경상도 세곡을 덕흥창 한 곳에 저장하기에는 공간이 너무 좁았다. 이에 태종은 충주 남한강 수변가에 새로운 조창을 건립할 것을 명령한다. <그림 참조>

바로 경원창으로, 지금의 충주 가금면 창동리 금정마을에 위치했다. 이때 어찌된 이유에서 인지 경상도민이 주로 차출됐다.

'충주(忠州)·금천(金遷)에 창고를 지으라고 명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상언하였다. "국가의 축적(蓄積)은 남고 창고는 좁으니, 청컨대, 충주 물가에 창고를 지어 경상도의 조(租)를 수납하게 하소서. 만일 급한 일이 있으면 조운(漕運)하기가 아주 편리할 것입니다"임금이 그대로 따랐다.'-<태종실록>

사료를 보면 당시 경원창에서는 콩 8천여석과 쌀 5천여석 그리고 보리, 소금 등을 보관했다. 적지 않은 양으로, 창고 규모가 2백칸에 달했다.

그러나 경원창에 화재가 발생하고, 막흐레기(莫喜樂灘)이라는 강한 여울이 존재하면서 조창이 주변 다른 곳으로 옮겨진다.

막흐레기는 '물이 막 흐른다'는 뜻으로, 물살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삯을 받고 배를 넘겨주는 일꾼이 존재했다. 이를 '끌패'라고 불렀다.

막흐레기의 여울 모습이다. 물살이 강하면서 수심은 낮은 편이다. 주변 지명도 막흐레기로, 과거 이곳으러 배가 지나면 끌패들이 끌어 올렸다.

지역 일부 사학자는 목계나루 줄다리기 기원을 막흐레기에 찾고 있기도 하다. 배넘기기 훈련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줄다리기 문화가 발달했다는 이론이다.

◇가흥창, 돛대가 협구를 가득히 덮다


덕흥·경원창의 역할을 넘겨받은 가흥창은 지금의 가금면 가흥리(여우섬 건너편)에 위치했다.

그러나 가흥창은 조선 전기까지는 그리 번창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1420년(세종 2) 송희경(宋希璟)이라는 인물이 일본에 사신을 가면서 가흥과 관련된 시를 남겼다.

'한적한 세 집이 산모퉁이 옆에 있어蕭條三戶傍山曲) / 이름은 가흥인데 흥하지 아니했네(名是可興猶未興) / 잠깐 가는 말 멈추고 아전의 말 들으니(暫駐征·聞吏語) / 백성 편케 하는 일 많은데 내 무능 부끄럽네便民多愧我無能)'-<일본행록>

그러나 고려 말기와 마찬가지로 경상도 세곡이 가흥창 집하되기 시작하면서 가흥은 번성하기 시작했다.

또 조선통신사나 왜사신이 자주 남한강 수로를 이용하면서 더욱 번창했다. 다산 정약용의 '집의 조그마한 배를 타고 충주로 향해 가면서'(漁家小·向忠州) 시에 당시의 번창한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백회칠한 담장은 띠처럼 둘러 있고(粉白牆如帶) / 감청색 기와는 용마루에 보이는데(紺靑屋見·)/ 막희라는 이름의 여울이 있어(有灘名莫喜) / 이곳을 향해 가기가 어렵구려(難向此中行)-<다산시문집 제7권>

백회담장과 감청색 기와가 당시 번창했든 가흥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조선전기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도 '가흥참' 제목의 시를 남겼다. 주제는 과중한 조세를 비판하는 것이었으나, 충주 가흥창이 시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높고 가파른 계립령은 / 예로부터 남북을 그어놓았네 / 북쪽 사람은 호화를 다투고 / 남쪽 사람은 기름과 피 빨리네 /…/ 돛대가 협구를 가득히 덮어 / 북쪽으로 앞을 다투어 내려가는구나 / 남쪽 사람들 낯을 찡그리고 바라보건만 / 북쪽 사람들 뉘라서 이 사정 알리'-<속동문선 제3권>

그러나 가흥창은 물터가 좁은데가 토사가 많이 쌓이면서 하항의 기능을 상실, 점차 역사의 뒷길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선(私船)들이 목계나루에 정박, 상행위를 하면서 그 반대편 강안이 번창하기 시작했다.

◇목계나루, 동해 생선도 취급하다.

충주 목계나루 일대를 하늘에서 내려다본 모습이다. 가흥창 옛자리, 막흐레기 등도 보인다.

목계가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636년(인조 14) 김세렴(金世濂)이 일본에 통신사로 가고 오면서 쓴 '해사록'에서였다.

'인조 14년 8월 12일 한강을 거슬러 배를 타고(12척), 8월 17일 원주에 머물렀다. 19일 고개를 넘어 목계의 지평 조공숙(趙公淑)의 집에 닿으니…'-<해서록 일부>

1791년 이른바 신해통공(辛亥通共)이 단행되면서 상업자본 축적이 발달, 도고(都賈)들의 활동이 급증했다. 도고는 상품의 매점매석을 통하여 이윤의 극대화를 노리던 상인집단을 말한다.

한강 중류에 위치한 목계나루도 그 영향을 크게 받았다. 도골들은 겨울철 결빙기를 제외하고 생필품 전 품목을 가지고 목계나루로 올라와 곡물, 목재와 교환했다.

여기에는 동해 생선도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적었다. 서해 해산물이면 몰라도 동해 소금까지 이입됐다는 것은 또 다른 얘기가 된다.

'강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월탄(月灘)이 되는데, 홍씨들이 사는 곳이다.또 그 서쪽은 하담(荷潭)인데, 옛 판서 김시양이 살던 곳이다. 그 서쪽은 목계인데, 강을 내려오는 생선배와 소금배들이 정박하며 세를 내는 곳이다. 동해의 생선과 영남 산골의 물산이 모두 이곳에 모여드니, 주민들이 모두 장사를 하며 부유하다.'-<택리지>

1910년대 일제에 의해 전국적으로 신작로가 닦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0년대가 되면서 자동차가 물자를 수송하기 시작했다. 그 직전인 1928년 조치원~충주간 충북철도가 개통됐다.

목계나루의 번창은 여기서 멈췄다. 충주 노은출신 신경림 시인이 노래했던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도 종적을 감췄다.

/ 조혁연 대기자

자료도움: 충북대 사학과, 충주문화원, 한국학 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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