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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의 발해의 꿈 - 발해의 후예들

발해산성 아래엔 만주 속의 충북 정암촌 둥지
청주아리랑 구전, 충북의 얼 간직
조선족 자치주 인구 줄어 자치주 해체 위기
두만강 푸른 물은 황토 빛으로 변하고
북한 병사들 그물망 경비, 탈북자 막는 듯
발해 부흥운동 200년, 거란에 패해 좌절
나라 망했어도 발해의 문화는 그대로 이어져

  • 웹출고시간2010.11.07 17:30:51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백제,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패망한 후, 부흥운동이 일어났듯 거란의 공격을 받아 926년에 발해가 멸망한 후에도 발해의 부흥운동은 200여 년 간이나 치열하게 전개됐다. 압록강 근처에서 유민들이 힘을 합하여 후발해국, 안정국(安定國)을 세웠고 홀한수(忽汗水) 상류에선 올야국(兀惹國)이 저향 했으나 거란에 의해 패망했다. 거란에서 벼슬을 하던 발해유민이 뭉쳐 흥요국(興遼國)을 건국, 발해의 명맥을 이으려 했으나 이 또한 성공하지 못했다. 1115년에는 고영창(高永昌)이 발해의 용감한 군마(軍馬) 2천인을 거느리고 동경성을 탈취한 뒤, 대원국(大元國)을 세우며 거란에 항거하였으나 새로 일어난 금(金)나라에 패하였다.

그렇다면 230년 간 반주벌을 호령하던 발해는 영영 지도에서 사라진 것인가. 나라는 멸망하여 사라졌어도 발해의 웅혼과 말달리며 거침없던 기마(騎馬) 민족의 기개는 여전히 살아 유전인자를 통해 만주벌에 남아 있는 것이다. 비록 거란의 군사력에 나라는 패망했지만 배달의 얼과 언어는 끈질기게 이어져 오늘에 이르렀다. 동북 삼성(흑룡강성, 길림성, 요령성)에는 아직 200만 여 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다. 이곳의 조선족들은 대대로 만주에 살던 무리와 한반도에서 이민을 간 부류로 나누어진다.

200만 명의 조선족 중 연변조선족 자치주에 81만 여명이 살고 나머지는 길림성을 비롯한 중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연길, 도문, 용정, 돈화, 훈춘 등 5개시와 안도, 화룡, 왕청 등 3개현을 관장하는데 조선족의 인구가 자꾸 줄어들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내 조선족의 비율은 현재 36.7%로 자칫 잘못하면 조선족 자치주 해제가 될 수도 있다. 소수민족의 비율이 30%이하가 되면 중국 중앙정부에서 자치주 지정을 해제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처럼 조선족의 비율이 줄어드는 것은 이농현상과 더불어 한국과의 교류 속에서 인구의 '빨대효과'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1992년, 연길을 처음 방문했을 때만 해도 조선족의 비율이 60%를 넘었다. 연길 시내에는 초가가 수두룩하고 길거리가 한산했는데 지금은 한 채의 초가도 없고 길거리가 출퇴근 시간이 되면 차량의 홍수로 몸살을 앓는다. 한국과의 잦은 교류 속에서 연길은 환락의 거리로 탈바꿈하고 있다. '설운도 노래광장'이 있는가 하면 '할머니 칼국수'도 등장했다. 노래방마다 네온사인이 서울의 거리를 방불케 하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아가씨들이 취객을 유혹한다.

위성 TV의 위력은 대단하다. 연길의 색 TV(칼라 TV)에선 한국 TV 방송이 그대로 잡힌다. '제빵왕 김탁구' '동이' 등 한국 안방 드라마를 실시간으로 시청할 수 있다. 한국과의 교류에는 명암이 교차한다. 한국의 영향을 받아 도시의 발전을 촉진케 하나 '한국 드림'에 상처를 받은 가정도 상당수에 달한다. 코리아 행을 꿈꾸다 가정이 해체되고 가정경제 파탄을 맞기도 한다. '한국행'에 기생하는 브로커가 큰 원인을 제공한다. 이리저리 사기를 당하고 한국취업도 무산되는 예가 부지기수다. 한번은 연길에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사생대회가 열렸는데 어느 초등학생이 해를 서쪽에 그려놓았다. 그 이유를 물은즉 해당학생은 "엄마가 해가 서쪽에서 뜨면 돌아오겠다"며 집을 나갔다는 것이다. 돈을 벌러 한국에 간 엄마는 몇 해가 지나도 오지 않고 기다림에 지친 아이가 그렇게 그림을 그렸다. 이 이야기는 연변 조선족들 사이에 회자되며 최루탄 물로 등장했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몇 년 간의 서울행에서 돈을 벌어 집을 샀고 가난을 벗어났다는 이야기가 많으며 이런 일들은 연변 조선족의 한국행을 재촉하고 있다.

두만강 건너로 북한의 민둥산이 보인다

발해유적을 얼추 답사한 일행은 두만강이 흐르는 도문시(圖們市)로 향했다. 두만강 푸른 물은 오간데 없고 황토 빛 강물이 북한과 중국을 갈라놓고 있다. 강 건너는 북한의 남양시인데 인적이 없다. 까까머리 민둥산 자락엔 '속도전' 등의 구호가 큼지막하게 나붙어 있었는데 지금은 철거했다. 황토 빛 강물을 가르며 유람선이 운행한다. 유람선은 북한이 손에 닿을 듯한 지점까지 이르며 한 바퀴를 돌았다. 북한 지역에 일정간격으로 배치된 병사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관광객을 쳐다본다. 아마도 탈북자를 막기 위해 그물망 경비인 듯하다.

정암촌 주민들과 함께 기념촬영. 뒤편으로 정자바위가 보인다.

두만강 관광을 마치고 만주 속에 충북인이 모여 사는 정암촌(亭岩村)으로 향했다. 여러 번의 중국취재에서 정암촌이 있는 줄 알면서도 일정상 번번이 비켜갔기 때문에 잘됐다 싶었다. 두만강 가에 쪼그려 앉은 도문시(圖們市) 앙수진(凉水鎭) 정암촌(亭岩村)은 만주 벌판에 충북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색 지대다. 정암촌의 형성은 일제 식민 착취라는 어두운 과거 속에 출발했다.

지난 1938년, 만척주식회사는 충북에서 만주로 이민 갈 사람을 모집했다. 일제의 수탈에 멀미가 난 사람들은 조밥이라도 실컷 먹어볼까 해서 이 대열에 합류했다. 청주, 보은, 옥천에서 80세대가 만주로 향했다. 걷고, 기차를 타고 배를 타고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곳이 이곳이다. 낯설고 물 설은 만주 땅은 그리 쉽게 정착의 터전을 내주지 않았다. 이주민들은 처음에 선사시대처럼 땅을 파고 움집을 지으며 살았다. 추운겨울을 나자니 어쩔 수 없었다.

이민들은 손발이 부르트도록 일을 하여 척박한 땅을 옥답으로 바꿨다. 뿐만 아니라 이민의 짐 보따리에 챙겨간 심청전, 춘향전을 밤이 새도록 읽었다. 그리고 고된 농사일을 하면서 고향의 노래인 '청주아리랑'을 부르며 망향의 시름을 달랬다.

마을회관에서 점심을 함께하며 '청주아리랑'을 불렀다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울 너머 담 너머 님 숨겨 두고/ 난들난들 호박잎이 날 속였네/ 시어머니 죽으면 좋다더니/ 왕골자리 떨어지니 또 생각난다/ 달라당 달라당 갑사댕기/ 본 때도 안 묻어서 사주가 왔네/ 사주랑 받아서 무릎에 놓고/ 한숨만 쉬어도 동남풍 된다/ 시아버지 골난 데는 술 받아주고/ 시어머니 골난 데는 이 잡아준다/ 새애끼 골난 데는 엿 사다 주고/ 며늘애기 골난 데는 홍두깨 찜질/ 아리랑 타령이 얼마나 좋은지/ 밥푸다 말구서 엉덩춤 춘다..."

실상 청주에서는 '청주아리랑'을 까맣게 잊었는데 돌연 만주벌 이민의 보따리서 기적처럼 '청주아리랑'이 나온 것이다. 청주아리랑은 연변의 김봉관 씨에 의해 처음 채보되었고 이 소식을 접한 충북대 임동철 전 총장에 의해 국내에 소개되었다. 그 후 임 전 총장은 정암촌에 농악기 일습을 전달하는 등 정암촌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 정암촌에 관한 관심이 증폭되자 충북도는 20여 년 전, 이민 1세대 38명을 초청, 꿈에 그리던 고향방문을 성사시켰고 매년 6개월 단위로 5명 가량의 산업연수생을 선발, 젊은 세대에게 농업기술을 연마시키고 있다.

마을 이름을 '정암촌'이라 정한 것은 이민 당시 촌장을 맡았던 서홍범 씨에 의해서다. 마을 뒷산에 발해성이라고 전해오는 고성이 있고 그 앞에 정자바위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다. 이에 착안하여 정자바위 마을이란 뜻의 '정암촌(亭岩村)'이 탄생한 것이다. 구름에 막힌 햇빛의 그림자가 정자바위에 그늘을 드리웠다. 비와 눈을 번갈아 뿌리던 변덕스런 날씨가 모처럼 화창해졌다. 정암촌 마을엔 드문드문 위성 TV 안테나가 보인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마자 옥천 안남면이 고향인 신순호(75)할머니를 만났다. 그 할머니와는 구면이었다. 청주 사직동에서 삽결살 장사를 몇 년 했기 때문이다. 한국인에게 큰돈을 떼어 하는 수 없이 식당을 차린 할머니다. 그는 여러 해 한국생활에서 한국국적을 취득했는데 상대적으로 중국국적이 말소되어 정암촌에서 불법체류자가 되는 기이한 사연을 갖고 있다.

보은 학림이 고향인 강창년 할머니

강창년(82)는 할머니는 보은 학림이 고향이다. 11세 때 부모를 따라 이곳엘 왔다. 보은서 대전까지 걸어서 가고 다시 여기서 기차를 타고 온성을 거쳐 정암촌에 도착했다.

고향사람들은 만난 일행은 마을 회관에서 점심을 함께하며 고향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을 회관 벽에는 '청주 아리랑'가사가 붙어있다.

이곳에서는 심범극 씨(73)가 명창이다. 술 한잔을 마신 그가 구성지게 청주 아리랑을 부르자 일행이 합창을 한다. 답사반과 현지주민이 함께 노래를 부르며 피붙이임을 다시 확인했다. 문화원장 일행은 약간의 성금을 모아 마을발전에 써 달라고 이춘봉 이장(49)에게 전달했다. 중국 내에서도 칭찬이 자자한 모범마을 정암촌.

그러나 정작 정암촌 노인들은 중국말도 모르고 살고 있다. 어느 할머니가 옥수수를 쪄내오며 "출출한데 옥씨기(옥수수의 충북사투리)잡숴유"하며 건넨다. 정암촌 이민 1세대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죽기 전에 고향에 한 번 더 가봤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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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