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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의 발해의 꿈 - 강동 24석의 비밀

아직도 풀리지 않는 '8×3=24'(발해건축의 기본형태를 이루는 돌 배열) 주초석의 수수께끼
'창고'·'역참' 등 7가지 학설 엇갈려
곡식 창고 '부경' 가장 설득력 있어
발해출토 중요유물 대부분 동경대에
고구려 생활문화 계승한 집터 구들 흔적
돈화시에 '우람한 돌기둥' 발해공원 조성
육정산 발해 고분군 감시원에 쫓겨나기도

  • 웹출고시간2010.10.24 15:24:33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발해의 건축물은 발해의 웅혼함을 그대로 담았다. 상경성의 궁궐 규모를 보면 그 위용과 굵은 선에 압도당하고 만다. 제1궁전 금란전을 비롯한 5개 궁궐의 전각은 일직선상에 배치되며 대제국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금란전터에서 나온 용머리 장식은 금방이라도 승천할 것 같은 기세다. 겉보기에 기괴한 형상을 한 짐승얼굴기와나 연잎이 4개인 연꽃무늬 수막새, 오색찬란한 치미, 연꽃무늬 전돌, 그리고 유약을 바른 기둥 밑 둘레장식 등 진귀한 출토품이 상당수에 달하나 거의가 일본 동경대에 소장되어 있다. 1900년대 초기에 일인들이 벌써 발굴을 하여 일본으로 반출한 유물들이다.

일본은 한반도 및 만주를 침략하기에 앞서 문화적 침략을 먼저 자행했다. 세키노 다다스(關野貞) 등 일단의 학자들은 한반도의 중요문화재를 먼저 조사했다. 충북만 하더라도 청주 남석교, 용두사지철당간, 속리산 법주사, 충주 사자빈신사지 석탑 등 중요 문화재의 면면을 조사하고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두었다. 무력 침략에 앞선 문화침략, 그것은 일본의 상투적 수법이었음에도 우리는 그 소리 없는 침략 앞에 너무나도 무력했다. 중원 탑평리 7층 석탑은 일제에 의해 훼손되었고 그 주변은 일 학자들이 먼저 손을 대어 절집의 배치 등 성격을 알 수 없게 만들었다.

발해는 고구려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이어 받으면서 부분적으로 당(唐)의 기법을 수용했다. 고구려의 구들은 졸본성(오녀산성)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졸본성 집터 곳곳에서는 구들의 초기형태가 나타나고 있다. 아궁이에서 불을 때어 온기가 벽을 따라 올라가는 형태다. 상경성 집 자리 곳곳에서도 이러한 구들의 모습이 확인되고 있다. 현무암으로 구들을 깔은 후 아궁이의 불길이 방안으로 통하도록 했다. 불길이 한쪽으로 통하는 외고래가 있는가 하면 양쪽으로 통하는 양고래도 있다.

돈화시 외곽에 남아있는 발해의 강동24석

발해유적에는 아직도 풀지 못한 구구단 수수께끼가 있다. 3×8=24는 누구나 다 아는 구구단 3단이다. 그런데 발해의 구구단 3단을 아직도 완전히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 발해의 첫 도읍지 돈화시 외곽에는 이른바 강동 24석이 이집트의 스핑크스처럼 문제를 내며 관광객의 발목을 잡는다. 3열의 주초석은 열마다 8개의 돌이 나란히 동작을 취하고 있다. 3열과 8개의 주초석을 곱하면 24석이 되는데 일반적으로 이를 강동 24석이라 부른다. 강동 24석은 발해 건축의 기본이 되는 형태로 발해 영역 내 10여 곳에서 발견되었다. 목단강 연안의 요전자, 해방청, 강동, 관지와 두만강 연안의 마패, 함경도 경성부근 등에서 이런 형태의 건물 주초가 나왔으나 이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초석이 촘촘히 박혀 사열하는 이 건물은 도대체 무슨 용도로 쓰였을까. 대략 이에 대한 해석은 7가지 설로 나뉘어 진다. 첫째 학설은 창고였다는 주장이며 두 번째는 역참이었다는 주장이다. 세 번째는 궁전 또는 사원이었다는 설이고 네 번째는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다는 설이다. 충북대 건축과 김경표 교수는 종교적이거나 주술적 의미가 담긴 건축물로 해석했다. 다섯 번째 학설로 거론되는 것이 창고의 일종인 '부경'이 아닐까하는 주장인데 가장 설득력이 있는 학설로 받아들여진다. 부경은 2층식 곡식 저장창고다. 4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창고를 만든 것으로 창고 안에 습기의 침투를 막아 물건을 장기간 보존하거나 건조하기 위한 시설물이다. 고건축을 전공한 장현석 충북문화원연합회장은 "발해가 고구려의 주거문화를 계승한 점, 주춧돌이 징검다리처럼 지상에서 일정거리를 유지한 점 등을 들어 곡식창고의 일종인 부경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부경은 고구려 때부터 건립된 창고의 형태로 대마도에서도 그 흔적이 나타난다. 대마도 시이네(椎根)지역에는 대마도의 주거문화를 말해주는 이시야네(石屋根) 돌지붕이 유명하다. 강한 겨울바람을 이겨내기 위해 판자돌로 지붕을 이었다. 이는 곡식, 의류, 가구 등을 보관하는 창고 역할을 했다. 일본 본토에서도 구경하기 힘든 대마도만의 풍경이다. 높은 침상을 한 이 건물 역시 습기를 막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혹시 발해의 강동 24석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여섯 번째 학설은 제례와 관련이 있다는 설이고 일곱 번째 설은 정령처로 왕의 시신이 육정산 고분 등 장지로 가기 전에 잠시 쉬었다 가는 곳이 아니었나 하는 학설인데 공감대가 부족하다. 아무튼 강동 24석에 대한 논문은 지금도 잇따라 나오고 있고 어떤 결말을 짓지 못한 상태다.

연변조선족자치주 내에 있는 돈화(敦化)는 발해의 첫 도읍지이다. 696년, 거란족장 이진충의 반란을 틈타 대조영은 걸사비우와 더불어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이끌고 해 돋는 동쪽으로 이동하며 건국의 꿈을 키웠다. 추격하는 당군을 시시때때로 뿌리치며 거란인의 본거지인 영주(營州)에서 2천리나 떨어진 돈화에 도착했다.

발해의 첫 도읍지인 동모산 전경

돈화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이를 도읍지로 삼으며 698년, 발해를 건국한 것이다. 건국 초기에는 나라 이름을 진국(震國:振國)이라하였다. 동모산에는 산성을 쌓고 그 후 평지에 오동성(敖東城)을 쌓았다. 우리나라의 성(城) 배치는 도성, 읍성과 더불어 인근에 산성을 쌓아 외적을 방어했던 점이 한 특징이다. 이를테면 외적에 침입에 대한 세트 플레이다. 고구려의 국내성과 환도산성, 평양의 안학궁과 대성산성, 서울도성과 남한산성, 청주읍성과 상당산성 등에서 보듯 고대로부터 평지성과 산성을 세트로 쌓고 나성(羅城)으로 이를 연결했다.

평지성인 오동성은 채소밭으로 변해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다만 남문 앞에 옹성(甕城)과 해자(垓字)의 흔적만 희미하다. 돈화시 현유진(賢儒鎭)에 자리 잡은 동모산성은 흔히 성산자 산성(城山子 山城)으로 불린다. 해발 800m 동모산에 축성한 발해의 첫 도읍지나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다. 그저 먼발치서 산성의 흔적이나 바라보고 가는 수밖에 없다. 산성 입구 마을에서 한 마리의 말(馬)이 차량의 경적소리에 놀랐는지 이리저리 뛴다. 산성으로 가는 길목엔 쓰레기가 수북하다.

딥사반은 발해고분이 밀집돼 있는 육정산(六頂山) 고분군으로 향했다. 육정산은 산봉우리가 여섯 개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는 발해 3대 문왕(文王)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 묘 등 발해의 고분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 대조영의 증손녀인 정혜공주 묘는 1949년 발견됐다. 무덤방이 있는 횡혈식 석실묘다. 천정구조는 각을 줄여쌓는 모줄임 형식으로 이를 말각(抹角)천정이라 한다. 무덤은 1지구와 2지구로 나뉘는데 1지구는 귀족의 무덤 군이다. 그런데 발해의 고분군 앞에는 엉뚱하게도 당나라 사신 최흔 공적비가 새져졌고 뒷면에는 "대조영은 말갈의 수령'이라고 표현해 놓았다. 동북공정의 아픈 흔적이다. 더 이상 발해의 건국을 막지 못한 당나라는 713년, 최흔을 보내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에 봉했다.

몇 년 전 답사에서는 고분 앞 까지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아예 입구부터 출입을 차단했다. 2개의 패트롤카가 번갈아 오가며 오가는 사람을 감시했다. 마을 주민 또한 감시자의 일원이다. 낯선 사람이 오면 이를 즉시 순찰차에 알린다. 하는 수 없이 답사반은 무거운 발길을 되돌렸다. 육정산 산봉우리만 쳐다봤다. 산봉우리는 말이 없다. 발길에 현무암이 채인다. 발해궁전의 초석과 전돌을 만들던 그 돌이다. 백두산 화산폭발로 발해의 옛 땅 주변은 거의 현무암 지대다.

돈화시에 조성된 발해공원. 재현해놓은 발해궁전의 돌기둥이 우람하다 .

돈화시에는 발해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발해의 육중한 돌기둥이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을 연상케 한다. 배흘림 모습을 한 돌기둥은 발해의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대리석 벽면에는 발해의 궁전과 역대 발해왕의 인물상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에서부터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 문왕(文王) 대흠무(大欽茂), 폐왕(廢王) 대원의(大元義), 성왕(成王) 대화여(大華璵), 15대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대인선(大··)에 이르기 까지 발해 왕들의 초상이 사자후를 토해낸다. 발해의 5경 등 영역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공원바닥에 설치해 놓았다. 발해의 궁전 회랑을 복원해 놓기도 했는데 우리의 건물이 아니라 중국화 된 건물이다. 여인의 버선코 같은 내림마루의 반전(反轉)이 아니라 추녀가 하늘로 휘감긴 중국식 건축양식이다.

돈화를 떠나 중경 현덕부가 있던 화룡(和龍)의 서고성자(西古城子)로 향했다. 화룡으로 가자면 선봉령(仙峰嶺)을 넘어야 한다. 간간이 뿌려대던 가을비가 걷히면서 고갯마루엔 무지개가 떴다. 얼마 만에 보는 무지개인가. 그 발해의 무지개를 쳐다보며 고개를 넘는데 변덕스런 하늘에서 갑자기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대조영의 한(恨)이 눈으로 변한 것인가. 만주의 계절은 분간하기가 어렵다. 통행차량 한 대가 만세를 부르며 길가에 드러누워 있다.

세전 벌을 적시며 해란강은 두만강으로 흘러든다. 해란강이 만들어 놓은 두도(頭道) 평야에 발해의 두 번 째 수도인 중경현덕부 서고성자가 있다. 둘레 2천713m에 이르는 서고성자는 토성의 흔적이 완연하다. 문터는 많이 훼손되었으나 토성 둘레에 해자의 흔적이 남아있다.

육정산 발해고분군으로 들어가려다 감시원에 의해 제지당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토성 가까이 답사반이 다가서자 현지의 감시원은 출입을 막을 뿐만 아니라 멀리서 찍은 현장 사진을 내놓으라며 답사반을 윽박질렀다. 결국 답사반이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토성 장면을 모두 삭제 당한 후 현장을 떠날 수 있었다. 천년이 지난 오늘날, 중국은 발해의 발목을 꼭 움켜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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