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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의 발해의 꿈 - 발해의 가을

굴삭기 굉음이 삼켜버린 대조영의 꿈과 넋
40리에 달하는 상경성 토성벽엔 상수리나무가 울창
미아처럼 취급된 발해의 역사, 이제는 되살려야
동북공정 가속화, 唐代 관할 나라로 표기
황성 옛터 주춧돌 발해의 영욕 말해줘
가을바람에 나뒹구는 발해의 기와, 전돌
손가락으로 누른 압날문 기와 곳곳서 출토

  • 웹출고시간2010.10.11 00:30:35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편집자 주

본사 임병무 논설위원이 도내 문화원장으로 구성된 충북문화원연합회(회장 장현석 청주문화원장)의 발해유적 답사를 동행 취재했다. 대조영의 꿈이 서린 상경용천부, 중경현덕부, 첫 도읍지인 동모산 등 만주벌에 널린 발해 유적의 이모저모와 조선족 사회의 생활상 등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흑룡강성 목단강 시는 하얼빈과 더불어 한 · 중 교류의 거점 역할을 한다. 일주일에 두 번 항공기가 인천~목단강 시를 오가고 있다. 대부분의 승객은 코리안 드림을 안고 서울로 향하는 조선족이다. 국제결혼 또는 사업차 오가는 사람들과 보따리장수 등으로 양쪽 공항은 북새통을 치른다. 자기 키 보다도 더 높은 짐을 서너 개 씩 챙기는 아줌마들의 생활력은 참으로 강인하다. 60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들도 그 생존경쟁의 대열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순수 여행객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목단강 시의 기온은 섭씨 영상 16도. 만추로 진입하는 만주의 기온은 한반도보다 10도가량 낮다. 여름이 지나면 가을을 생략하고 바로 겨울로 접어드는 것이 만주의 계절이다. 잰걸음으로 달려온 만주벌의 가을은 여행객의 외투자락을 여미게 한다. 앙팡진 찬바람이 가을의 낭만을 쫓아내며 겨울나기의 걱정을 쌓게 한다. 대조영이 꿈꾸던 발해 대제국은 온갖 풍상을 견디며 230년의 역사를 만주벌에 새겨왔으니 이 정도의 찬바람쯤이야 원망할 것이 못된다.

발해는 잊혀진 왕국이다. 우리의 역사상 가장 큰 대제국을 세운 나라이건만 어쩐 일인지 역사의 행간에서, 우리의 의식에서 삭제되거나 멀어진 왕국이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도 발해를 언급하지 않았고 중국의 역사에서도 발해는 미아(迷兒)처럼 취급되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득공(柳得恭)이 비로소 발해사를 우리 역사에 편입시켰으니 자그만치 1천 여 년 동안 발해 역사는 깊은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귀뚜라미가 불면증을 재촉하는 가을밤이면 여행객에게는 늘 쌉쌀한 여수(旅愁)가 밀려온다. 동해의 격랑과 찬바람을 뚫고 일본을 왕래하던 발해의 사신 양태사도 일본 땅에서 시 한수를 읊으며 망향을 달랬으니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 서리 찬 가을 달밤에/ 은하수 유난히 빛나고/ 나그네 고향생각/ 시름 더욱 깊어가네/ 차라리 잠이들어/ 꿈에나 볼까하되/ 하 그리 긴 수심에/ 잠인들 차마 오리" <양태사의 '밤에 다듬이 소리를 듣고'>

발해는 오경(五京) 15부(府) 62주(州)의 행정체제를 갖추고 사방 5천리나 되는 큰 영토를 가진 대 제국이었다. 오경은 상경용천부(흑룡강성 영안현), 중경현덕부(화룡 서고성), 서경압록부(임강진), 동경용원부(훈춘 팔련성), 남경남해부(함남 북청)를 일컫는다. 이와 같은 대 제국을 형성했음에도 역사의 페이지에서 증발한 것은 사료의 부족, 관심의 부족에 있다. 발해에 대한 고 문헌은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그리고 일본에 남아 있는 서신 등이 고작이다. 일반적으로 패망한 국가의 기록에 대해서는 그 후의 나라에서 정리해 주는 것이 하나의 관례다. 고려 때 김부식은 삼국사기로 삼국의 역사를, 조선시대에는 고려사절요를 통해 지난날들을 되돌아보게 했다. 발해를 멸망케 한 거란족은 이민족이어서 그런지 이점을 소홀히 했다.

그렇지만 현장의 유적은 몸으로 발해의 영욕을 말해준다. 발해는 수도를 여러 번 옮겼다. 천도의 겉 사정은 영토의 확장 등 정책 또는 전략적인 면에 있지만 내부의 갈등이라든지, 토호세력의 발호 등 적지 않은 속사정도 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제 3대 문왕(文王)은 구국(舊國)인 동모산(東牟山)에서 742년, 중경 현덕부로 수도를 옮겼다. 고왕(대조영)과 무왕(武王 · 대무예)의 무치시대를 접고 문치시대를 열은 문왕(대흠무)는 해란강 유역의 개척을 위해 중경 현덕부로 천도했다가 755년, 상경 용천부로 또 수도를 옮겼다. 흑수 말갈의 제압과 목단강 유역으로의 진출 등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함이다. 세 번째로 상경용천부에서 동경 용원부로 천도했다가 794년, 30년 만에 다시 상경으로 되돌아갔다. 이것이 네 번째 천도이고 상경은 발해가 멸망한 926년까지 수도가 되었다.

주위 40리에 달하는 발해수도 상경용천부의 토성 둑

상경 용천부는 흑룡강성(黑龍江省) 영안시(寧安市) 발해진(渤海鎭)에 위치해 있다. 연길에서 버스로 3~4시간 걸린다. 가을 하늘은 변덕쟁이다. 맑았다가 개길 번복하고 때때로 가을 비를 뿌려댄다. 상경성으로 가는 길가에는 대조영의 일편단심을 말해주기라도 하는 듯 사루비아가 붉은 울음을 터트린다. 서럽도록 붉은 울음이 발해의 하늘마저 삼켜버렸다. 발해의 외성인 토성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아래로 주저앉았다. 길이 16km에 달하는 토성 둑에는 느릅나무, 느티나무, 상수리나무 등이 울창하다. 발해집단(渤海集團), 동인대약방, 중국은행, 발해공신소(渤海供信所)) 등의 간판이 즐비하다. 발해집단의 '집단'은 '그룹'을 의미하며 공신소는 신용조합을 일컬음이다.

답사반이 상경성 내성인 오문을 둘러보고 있다.

외성은 흙으로 쌓은 토성인데 비해 내성은 석성이다. 내성의 출입문은 오문(午門)이다. 오문에는 대조영의 꿈과 넋이 서려 있건만 발굴조사에 나선 굴삭기의 굉음이 이를 삼켜버린다. 발해의 옛 터전으로 들어가는 오문은 옛 성벽과 보축한 성벽이 고대와 현대를 잇고 있다. 문터에는 문 지두리가 남아 있고 그 문을 지나면 궁전 터가 연이어 사열을 한다. 성과 궁전 터, 그리고 바닥에 깔은 전돌 등 석재는 주로 현무암 계통이다. 현무암은 백두산의 화산폭발 당시에 형성된, 구멍이 듬성듬성 뚫린 돌이다.

상경성의 제1 궁전터, 초석만 남아있다.

5개의 궁전 터는 초석만 남아있을 뿐 궁전의 모습은 오간 데 없다. 거란의 침입과 천년 세월이 발해의 영화를 앗아간 것이다. 궁전 터 주변에는 발해의 기왓장과 전돌이 여기저기에 나뒹굴고 있다. 발해의 기와는 마구리 부분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이를 압날문(壓捺文)기와라고 하는데 발해 이외의 지역에서는 출토되지 않는다. 황성옛터엔 가을바람이 소슬하게 분다. 맑던 하늘에선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진다. 대조영의 눈물인가. 일어버린 왕국의 잔해가 을씨년스럽다. 남북으로 뻗은 내성의 길이는 1.4km에 달하며 폭은 1.1km이다. 내성의 간선도로는 길이 2천195m에 폭이 110m에 이른다. 장안성의 도로 명을 따서 이를 주작대로(朱雀大路)라 부른다.

4년 전, 첫 답사를 올 때에는 발해박물관이 문을 닫아 유물을 구경할 수 없었는데 이번에는 다행히 문을 열어 발해 유물을 둘러볼 수 있었다. 발해의 몸통 긴 항아리, 세발 달린 철솥, 철 보습, 구리로 만든 동인(銅人)조각품, 앉은 사자 상 등이 발해인의 생활상과 숨결을 전해준다. 발해의 기와도 몇 점 전시되었다. 발해의 연꽃무늬 와당과 보상화문 와당은 선이 굵고 힘차다. 연꽃무늬 기와는 연 잎이 6~8개로 고구려 기와를 그대로 닮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안내문이 너무 어이가 없다. "발해국은 당대(唐代)의 나라로 말갈족이 세웠다. 당나라의 관할 하에 있는 일개 변방의 나라다" 이 대목에서 답사반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말로만 듣던 동북공정이 가속화 되고 있는 것이다.

성내에는 7개의 절터가 있고 성 밖에는 2개의 절터가 있다. 모두가 무심한 세월 속에 자취를 감추고 현재에는 청대(淸代)에 건립한 흥륭사(興隆寺)뿐이다. 흥륭사의 석불은 발해의 석불이 아니라 중국화 된 양식을 띠고 있다. 대웅전 앞에는 1기의 석등이 서 있다.

흥륜사 법당 앞에 서 있는 발해의 석등. 힘찬 선각이 인상적이다.

바로 발해의 석등이다. 상륜부는 결실되었으나 나머지 부분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힘찬 선, 앙련(仰蓮)과 복련(伏蓮)의 새김이 뚜렷하다.

230년이나 타오르며 발해제국을 밝힌 향불이 심지를 다시 돋우며 타오를 것 같다.

향불 꺼진지 천년이 지났어도 발해인의 마음에 간직한 등불은 여전히 남아 타오르며 서방정토와 깨우침에 이르는 길을 밝혀주고 있다.

돌아오는 길에 발해인의 젖줄인 경박호(鏡迫湖)에 들렀다.

'동양의 나이아가라' 라고 불리는 이 호수는 발해시대에 홀한해(忽汗海)라 불렀다. 백두산 화산 폭발로 화산재가 목단강의 흐름을 차단하며 형성된 거대한 호수다.

발해의 젖줄인 경박호 전경.

길이 45km, 최대 너비 6km에 달한다. 발해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이 거란의 침공을 받아 도성이 함락되자 장탄식을 하며 발해의 보물인 보경(寶鏡)을 가지고 이 호수로 뛰어들었다는 애잔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때마침 내린 비로 경박 폭포에는 성난 황톳물이 물기둥을 형성하며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근육질의 한 스턴트맨이 관광객을 상대로 폭포로 뛰어 내리는 묘기를 펼쳐 보인다. 그리고는 자신의 점프하는 모습을 담은 화보집을 판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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