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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천 재발견 - 근현대 가설된 다리들

말없는 다리 밑 '역사'가 흐른다

  • 웹출고시간2010.08.15 17:54:27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무심천 서문교 모습으로, 기초 부분이 비정상적으로 노출돼 있다. 이는 골재채취가 남긴 상흔으로, 한때 다리 안전성이 위협받기도 했다. 시는 시민들이 이 다리를 '뼈다귀 다리'라고 부르는 것을 참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자 교량의 '교'(橋)는 우마차가 다닐 수 있는 다리를, '량'(梁)은 사람이 통행할 수 있는 다리를 일컫고 있다. 따라서 교량은 우마차와 사람이 통행하는 시설물을 말한다.

다리는 또 수계양옆 지역의 가교역할 외에 공공성을 지닌 토목시설물, 도시경관 기여, 역사유산 등의 기능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

청주 무심천에는 이런 교량이 남에서 북으로 장평교, 방서교, 용평교, 수영교, 청남교, 모충교, 구모충교, 남사교, 서문교(구 풍물시장다리), 청주대교, 제1 운천교, 흥덕대교, 제2 운천교, 송천교, 철교, 문암생태공원 앞 다리(공사중) 등의 순으로 16개가 존재하고 있다.

수도 서울에 총 24개의 다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교량 공학상 다리는 통로 방식에 따라 상로교, 중로교, 하로교 등으로, 형식에 따라서는 거더교(Girder Bridge), 라멘교, 트러스트교, 아치교, 현수교, 사장교 등으로 분류되고 있다.

청주 다리의 대부분은 이중 '상로교+거더교' 모습을 하고 있다. 상로교는 어떤 대상이 다리 구조물 위로 왕래하는 것을, 거더교는 상판과 교각이 T자 모양으로 결구된 것을 말한다. 무심천 다리는 경제성을 주로 추구하다 보니 가장 단순한 모습을 하고 있다.

말없는 무심천 다리에도 청주 역사의 사연이 에피소드와 비화의 이름으로 차곡차곡 쌓여 있다. 남석교는 1920년대(추정) 매몰되기 전까지 청주 무심천 수계에 놓여진 유일한 다리였다.

조선 영조 때 발간된 여지도서에는 '新橋 一名西門外橋在州西一里 冬置夏撤'라는 표현이 보인다. '신교는 일명 서문외교라고 부르는데 고을(청주 중심지 지칭) 서쪽 1리에 위치한다. 겨울에는 놓여 있으나 여름에는 철거된다' 정도의 뜻이 되고 있다.

사료를 보면 이 다리는 고정된 다리가 아닌, 홍수가 지면 하류로 떠내려가는 토교(土橋)인 것으로 나타난다. 여름에 철거되는 것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1912년 작성된 매일신보 기사에도 '無心川 橋梁도 六十四間의 土橋가 架設되얏는데 是는 土橋로데 一万圓을 投하얏다하니…'라는 표현이 보일 뿐 고정된 다리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1932년 일제에 의해 지금의 청남교(일명 꽃다리) 자리에 콘크리트 다리가 가설됐다. 이때 이름도 청주읍성 남문밖에 위치한다고 해서 '청남교'라고 불렀다.

청남교는 1995년에 이르러서야 지금의 모습으로 확장됐다. 그러나 이 확장은 교량을 통째로 다시 놓은 것이 아닌, 기존 것에 새로운 교량을 덧댄 방식이었다. 즉 '1+1교량'이다. 에피소드가 존재하고 있다.

당시 공사를 맡았던 손광섭(현 광진건설 대표) 씨는 "낙찰을 받고 막상 교량을 한 개 더 가설하려고 보니 설계도가 존재하지 않았다"며 "따라서 어떻게 하면 두 교량을 틈이 벌어지지 않게 이을까 여러 날을 청남교 밑에서 고민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고민 끝에 떠오른 영감이 철길이 지닌 여름-겨울철 신축성 차이였다"며 "이를 응용·시공해 지금의 튼튼한 청남교를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청남교가 시민들 사이에 '꽃다리'로 불리우는 사연도 재미있다.

청주시 이동주 도시관리국장은 "80년대 아무개 시장 시절에 청남교에 화분을 많이 갖다 놓으면서 시민들이 정식 이름을 놔두고 '꽃다리'로 호칭하기 시작했다"며 "이때부터 청남교의 화분 비치는 것은 청주시의 의무가 됐다"고 말했다.

청주 무심천에 두번째로 등장한 다리는 구 모충교로, 정식 명칭은 '오래된 당집'과 관련이 있는 고당다리였다. 지금도 모충동 일대에서는 '고당' 상호가 들어간 상점과 약국 등을 더러 발견할 수 있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까지만 해도 청주시민들은 조치원을 가야 서울행 기차를 탈 수 있었다. 그러나 충북선이 개통되기 전까지는 고당다리-모충동 뱃고개-충대병원 오거리-강내 연정-충남연기 내판역을 통해 서울행 기차를 타던 시절이 있었다.

조선후기에 등장하는 무심천 토교도 고당다리 근처에 가설됐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지금의 서문교(구 풍물시장다리)는 모래채취와 관련된 추억을 지니고 있다.

현재 마치 생선가시 모양을 하고 있는 서문교는 교각 하단의 기초시설공사 부분이 상당부분 지상으로 노출돼 있다. 토목 비전문가가 봐도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다. <사진 참조>

이국장은 "90년대 무심천 하류와 미호천에서 골재채취 작업이 광범위하게 진행됐다"며 "이후 큰물이 날 때마다 무심천 모래가 유입량보다 많이 쓸려내려 가면서 서문교 교각 밑부분이 깊게 빼여나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현재 수면 위로 노출된 부분만큼 모래 등 무심천 표토물이 쓸려내려간 것으로 보면 된다"며 "당시 기초부분 보강공사를 즉각 실시, 모양은 다소 안좋지만 지금의 안전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세계 관광선진국은 다리를 주요 관광상품의 하나로 취급하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영국 타워 브리지와 프랑스 세느강의 미라보 다리다. 청주도 이제 디자인 명품다리를 가설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이국장은 "디자인 명품다리는 건설할 때 처음부터 해야지 중도에 하려니까 힘든 점이 많다"며 "그러나 다리도 주요 관광 상품의 하나인 만큼 여러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의견을 모으고 있다"고 밝혔다.

/ 조혁연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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