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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천의 재발견 - 남주동 시장

'장돌뱅이 흔적' 아직 남아 있다
일제때 창고+상점 겸했던 場屋 일부존재
홍수때문 제방쌓고 제방은 場市 불러들여
상당로 개설되면서 육거리 시장에 밀려나

  • 웹출고시간2010.07.28 18:17:33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들이 자주 찾는 곳의 하나가 재래시장이다.

청주에는 속칭 석교동 육거리에 대형 재래시장이 아직 존재하고 있다. 재래시장을 과거식으로 표현하면, 완전히 같은 개념은 아니지만 '장시'(場市) 정도가 된다.

장시는 단순한 물물교환 장소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체는 생물처럼 흥망성쇠를 거치게 됨을 과거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조서후기 '증보문헌비고'(영조~고종연간)를 보면, 당시 청주 무심천변에는 청주 남석교 시장과 신장(新場) 등 2개의 장시가 존재했다.

청주 남주동 시장 골목으로, 전면에 보이는 2동의 단층가옥은 원래는 일제강점기 장옥 건물이었다. '소금'이라는 글귀가 선명한 가운데 이곳에는 아직 약재상과 다방이 존재한다.

남석교시장은 닷새장 중 2, 7일장, 신장은 4,9일장으로, 신장은 지금의 남주동 일대를 의미하고 있다. 장시의 명칭으로 볼 때 남석교 시장이 청주 장시의 주기능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1906년 청주 무심천 일대에 최악의 홍수가 발생했다. 일본학자가 쓴 글을 보면 그해 8월 26일부터 11일 동안 강우현상이 계속 됐다.

그 결과, 청주읍성 남문밖~남석교 북쪽 사이에 위치하던 남석교 시장(=석교동 시장)이 초토화되면서 장시 기능도 완전 유실됐다.

그해 가을, 남석교 시장이 갖고 있던 청주 제 1의 장시 기능이 또 다른 무심천변인 신장(현 남주동 시장)으로 옮겨졌다. 이후 남주동 시장은 적어도 60여년 동안 청주 제 1의 시장 역할을 하게 된다.

유통문화가 발달하면서 남주동 시장 안에서는 공간분화 현상도 일어났다. 상점문이 북향인 곳에는 주로 옷감과 의복상이 자리 잡았다. 햇빛이 고려된 결과였다.

가게문이 남향인 곳에는 태양광의 영향을 받지 않는 그릇상점이 자리 잡았다. 이외 철물, 약재, 건어, 청과, 제물상이 자리 잡았고, 무심천 제방 쪽으로는 우시장이 위치했다.

16세기쯤 전라도에서 시작된 장시는 일제강점기 때도 면면히 이어졌다. 그 중심에는 장돌뱅이, 즉 보부상(褓負商이 위치했다.

'보상'은 손에 물건 보따리를 들거나 질빵을 멘 봇짐장수를, '부상'은 지게에 물건을 지고 다니는 장사치를 일컫고 있다. 보따리에서 물건을 풀거나, 지게에서 물건을 내려 놓는 곳이 곧 좌판이 됐다.

'조선총독부 조사자료 제 14집' 사료를 보면 당시 청주 인근 문의에는 1·6일장, 오창 3·8일장, 조치원 4·9일장, 부강 5·10일장의 닷새장이 들어섰다. 청주 남주동 시장에는 2·7일장이 섰다.

중부권 장시는 그 공간적 중심에 위치하는 청주 남주동 보부상들이 주도했다. 이들은 남주동에 '장옥'(場屋)이라는 '창고+상점'를 겸한 시설을 마련해 놓고 인근 5일장을 순회했다.

남주동 장돌뱅이들은 청주에 장이 서면 창고를 상점으로 활용했고, 반대로 다른 지역에 장이 서면 장옥을 걸어닫고 그곳에서 가서 좌판을 벌였다. 현재 장돌뱅이 문화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청주시 이동주 도시관리국장은 "남주동 일대에 가로 장방형으로 길게 생긴 옛건물이 바로 장옥들"이라며 "많이 변형됐지만 서너개 건물은 그런대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남주동 일대에 국밥집을 비롯해 철물, 약재, 가구 등 다양한 상점들이 아직도 존재하는 것은 바로 장옥 문화의 흔적 때문으로 볼 수 있다"며 "남주동 약령시는 한때 대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1970년대 후반 청주 시가지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상당로가 개설됐고, 버스로 대표되는 대중교통이 이 상당로를 타고 청원지역 부용, 미원, 문의면 주민들을 지금의 육거리 일대로 실어날랐다.

유통망 역전현상이 일어났다. 육거리 시장이 남석교가 묻힌 그 자리 위에서 다시 번성하기 시작했고, 반면 남주동 시장은 그 기능이 현저히 축소됐다.

가구점 등이 대거 청주 외곽으로 빠져나가면서 지금은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따라서 가게 주인들이 무료함을 달래려 게으른 하품을 하는 것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어찌보면 무심천 대홍수는 제방을 쌓게 했고, 그 제방은 장시를 불려들였다. 그리고 도로 개설에 따른 대중교통 등장은 청주 장시의 흥망성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 조혁연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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