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시와 민간단체 등이 합심이 돼 청주읍성 성돌을 찾는 노력이 집중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현재까지 재작년부터 발굴조사를 하면서 옛 남궁병원에서 40개, 서문자리에서 20개, 남주동 개인주택 디딤돌 60여개 등 총 120여여개를 확보내지 확인했다. 본보의 보도에 의해 청주 탑동의 6개 양관 중 4개 건물에서 주춧돌, 기단석 등으로 대량 사용된 것으로 확인됐으나 양관 자체가 도지정 문화재에서 회수는 사실상 어렵다. 청주성과 관련된 표현이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서기 685년 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5년조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5년 3월에 서원소경을 설치하고 아찬 원태(元泰)를 사신으로 삼았다.' 역사상 청주시장 제 1호는 '원태'인 셈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문왕 9년조에는 '서원경에 성을 쌓았다'라는 표현이 문헌적으로 분명하게 등장한다. 이때가 서기 689년이다. '9년 가을 윤 9월에 왕이 장산성에 거둥하였다. 서원경(西原京)에 성을 쌓았다. 왕이 달구벌로 도읍을 옮기려 하다가 실행하지 못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서원경 성벽을 쌓는 과정에 얽힌 이야기도 자세히 등장한다. 삼국사기 권47 '열기'라는 인물의 열전은 이렇게 쓰여 있다. '구근(仇
택리지 이중환 단양은 도내 지자체 중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지니고 있다. 이중환은 얼마나 경치에 반했는지 단양읍내는 언급하지 않고, 대신 주변 명승지를 하나씩 세밀하게 소개했다. 먼저 도담삼봉이다. "물속에서 돌봉우리 세 개가 솟아 있는데 각각 떨어져서 있으면서도 활줄같이 한 줄로 곱게 서있다. (하늘이) 쪼아서 아로새긴 솜씨가 기이하고도 공교로워 마친 인가(人家)에서 쌓은 석가산(石假山)같다. (다만) 우뚝하거나 깎아지른 모습이 없으니 한스럽다." 단양 단성면에는 단양팔경의 하나인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의 삼선암이 위치하고 있다. 삼선암의 아름다운도 마치 수채화를 보듯 표현했다. 글을 읽어내려 가다보면 시원스레 석간수(石間水)가 귓전을 때린다. "삼선암은 군 서남쪽에 두메에 있다. 산속의 큰 시냇물이 돌로 된 골을 따라 흘러내리는데 시내 바닥과 양쪽 언덕이 모두 돌이다. 시냇물이 흘러내리다가 길게 파인 돌에 이르면 돌유구에 물을 담은 것처럼 되며 둥글게 파인 돌에 이르면 돌가마에 물을 담은 것처럼 된다. 돌과 돌이 서로부딪히며, 밤낮으로 시끄러워서, 물가에서는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사인암은 대강면 사인암리에 위치한다. 사인암이라는 이름은 고려
전회에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충주 주변을 자세히 둘러봤다. 이중환이 그 다음으로 향한 곳은 지금의 음성읍 일대가 아닌, 가섭산 북쪽의 생극면 팔성리라는 곳이다. 팔성리에는 지금도 지천서원이 존재하고 있고, 서원 안에는 기묘사화 명현의 한 명인 김세필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이중환이 팔성리 일대를 찾은 것에는 나름의 목적이 있었다. 이중환은 이때의 소회를 이렇게 적었다. '이곳이 바로 기묘사화 때의 명현 십청 김세필이 벼슬에서 물러나 살던 곳이다. 그의 자손들이 지금까지도 대대로 살며, 민가가 수백호인데 모두가 넉넉하게 산다.' 정치 소용돌이의 희생양이 됐던 이중환은 기묘사화때 화를 당한 김세필을 크게 의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처지를 김세필과 동일시한 심리도 다분히 엿보이고 있다. 김세필은 기묘사화 때 조광조에게 사약이 내려지자 그 부당함을 말하다 귀양갔던 인물이다. 그는 얼마안가 해배됐으나 더이상 중앙정계에 머물지 않고 지천서원이 있는 팔성리 일대로 낙향,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렸다. 이중환은 생극면 팔성리 지천서원을 둘러본 후 그 끝 부분을 '이 지방 사람들은 금천, 가흥, 말마리와 강 북쪽에 있는 내창을 충주의 4대촌이라고 한다'라고 적었다. 이중환
이중환이 괴산 다음으로 찾은 곳은 조선시대 대읍의 하나였던 충주였다. 지금도 서향에서 충주 중심지로 진입하려면 반드시 달천을 거쳐야 한다. 이중환은 임진년의 사례를 들며 달천을 매우 호감있게 표현했다. '임진년에 명나라 장수가 달천을 지나다가 물맛을 보고 '중국 여산의 폭포의 물맛과 같다'라고 했다. 고을이 한강 상류에 있어서 물길로 오가기가 편리함으로 서울이 사대부들이 예부터 여기에 많이 살았다. 또 과거에 급제한 자가 많기로도 팔도 여러 고을 가운데 으뜸이니 '이름난 고을'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하다.'이중환이 충주지역을 호평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충주는 내륙항구라고 표현될 만큼 물길이 발달해 있고, 또 주변에는 넓은 들이 분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중환은 이같은 환경을 높이 샀다. 그는 달천과 남한강이 만나는 '금천' 일대를 이렇게 적었다. '두 강이 마을 앞에서 만난 뒤에 마을 북쪽으로 둘러서 흘러가므로 동남쪽으로는 영남의 물자를 받아들이고 서북쪽으로는 한양의 생선과 소금을 받아들여 교역하는 여염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마치 한양의 여러 강마을과 비슷하다. 배의 '고물'과 '이물'들이 잇닿아 커다란 도회지를 이루었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전회에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이 청주와 그 주변을 둘러봤다고 밝혔다. 기술된 내용상 다음번으로 향한 곳은 생거진천의 땅으로 속칭되는 진천이었다. 이중환 역시 진천을 살기 좋은 고장으로 적었다. 이런 내용이 나온다. '청주에 비해 들이 적고 산이 많다. 산골짜기가 겹겹이 감도는 데다 큰 시내도 많다. 그러나 답답한 기상은 없으며 땅도 기름지다.서북쪽으로 대문령을 넘으면 안성·직산 땅이다, 바다와 겨우 100리 떨어져 있음으로 생선과 소금을 편하게 사들일 수 있다'라고 적었다. 인용문 중에 소금을 언급한 대목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조선시대 때 청주지역에는 금강을 거슬러 올라온 배를 통해 서해안 소금이 유입됐다. 부강에서 하역된 소금이 육로를 통해 내륙 청주로 들어왔다. 그러나 진천은 같은 서해안 소금이기는 하나 공급 루트가 달랐다. 바로 서쪽의 대문령을 통해 진천 지역에 소금이 유입됐다. 대문령은 지금의 이티(혹은 배티) 고개를 말하고, 그리고 인근 백곡 석현장에도 규모가 큰 소금시장이 닷새마다 열리곤 했다. 진천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표현이 '생거진천 사후용인'이다. 이와 관련, 경기도 용인과 충청도 진천에 살았다는 두 형제 이야기에서 유래했다는 전설
전회에 이중환(李重煥·1690~1752)이 지은 택리지를 개괄적으로 알아봤다. 이번부터는 우리고장 이야기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택리지를 보면 이중환이 움직인 동선을 대강 알 수 있다. 택리지에 우리고장 고을 중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곳은 최남단인 영동 추풍령이다. 이중환은 추풍령이 소문에 비해 그리 높지 않음을 크게 강조했다. '(추풍령은) 덕유산에서 나온 산줄기가 정기를 멈춘 곳이다. 이름은 비록 고개라고 하지만 실제는 평지다. 그럼으로 산이 많긴 해도 심하게 거칠거나 웅장하지 않고 아주 낮거나 평평하지도 않다.' 실제 추풍령의 해발 높이는 221m 밖에 안 되기 때문에 승용차로 달리다 보면 '고개를 넘었다'는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영동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면 옥천땅에 당도하게 된다. 이중환은 대략 3백년전 옥천땅에 대해 의외로 목화가 잘 된다고 썼다. '들은 너무 메말라 논의 수확은 적고 주민들이 오직 목화심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 땅이 목화 가꾸기에 가장 알맞다. 그러나 예부터 문학하는 선비가 많이 나왔으니 학사 남수문과 우재 송시열이 모두 이 고장 사람이다.' 여기서 힌트를 얻은 옥천군은 현재 옥천읍 삼청리 국도 4호선 폐도변에 '
전회에 택리지 저자 이중환(李重煥·1690∼1752)이 19살 때 우리고장 단양 옥순봉을 시로 읊었다고 밝한 바 있다. '땅위의 높은 모양은 단정한 선비가 서있는 듯하고 / 물결 복판에 움직이는 그림자는 늙은 용이 뒤집는 것 같다 / 정신은 빼어나 강산 경치가 뛰어나고 / 기세는 높아서 우주형상을 버티었다. 이중환은 우리고장 충북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충청도와는 유년시절의 인연을 맺고 있다. 택리지 충청편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금강에 임하여 사송(四松), 금벽(錦碧), 독락(獨樂) 등 네 개의 정자가 있다. 그 중 사송은 우리집의 정자이고, 금벽은 조상서(趙尙書)의 산장이며, 독락은 임씨(林氏)의 조상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건물이다." 인용문 중 '우리집의 정자가 있었다는 사송'은 지금의 공주시 장군면 일대를 말한다. 택리지에는 총 230개의 자연마을 이름(촌락명)이 나온다. 이중 충청도 지명이 30%로 가장 많고, 또 그중에도 공주 인근의 지명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 이는 공주 일대가 이중환이 어릴적 살던 곳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상세히 기술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학책 '성호사설'을 쓴 이익(李瀷·1681∼1763)이 이중환의 택리지 저술에
전회에 우리고장 충주읍성 사고에 보관 중이던 '고려실록'을 바탕으로 그 유명한 '고려사'를 쓰게 된다고 밝힌 바 있다. 문헌적인 근거도 많이 존재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고려사는 고려시대 쓰여진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삼국사기는 삼국시대가 끝난 후인 고려 때 김부식이 지었다. 마찬가지로 고려사도 고려시대가 종결된 후 기술됐다. 고려사는 조선초 세종대에 집필이 돼 문종 때 발간됐다. 세종실록에 이런 내용이 보인다. "지금 사고는 충주에만 있는데, 여염(일반집)과 섞여 있사오니, 실로 염려스럽습니다. 바라옵건대, 조종의 실록과 전조의 사적 등, 몇 본을 만들어 각도 명산에 나누어…' 바로 고려사 편찬작업이 진행될 때는 전국적으로 충주사고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또 다른 사고(史庫)인 전주와 성주사고 등은 그 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런 충주사고에는 고려사를 만드는데 바탕이 된 고려실록 말고도 고려시대 다른 책은 보관돼 있었다. 실록에 이런 내용이 보인다. "사관 김상직에게 명하여, 충주사고의 서적을 가져다바치게 하였는데 …."- 그중에는 우리들 귀에 익은 책으로 오장육부도, 산해경, 계원필경, 전한서, 후한서, 신당서 등이 보이고 있었다. 충주사고
조선왕조실록은 많이 알려졌으나 고려실록은 다소 생소하다. 그러나 고려실록도 임진왜란 직전까지 분명히 존재했다. 그것도 우리고장 충주에 존재했다. 고려 조정도 조선과 마찬가지로 역대왕의 실록을 만들어 처음에는 수도인 개성에만 보관했다. 그러다가 이자겸난 때, 보관해 오던 실록이 소실되자, 이때부터 개성에 한 벌, 그리고 외사고로 불리는 지방에 한 벌씩 나눠서 보관했다. 당시 고려실록의 지방사고가 처음 들어선 곳은 개성에서 먼 남쪽인 가야산 해인사였다. 이 해인사에는 관리인을 별도로 주둔시키지 않고 스님들로 하여금 실록을 자체 보관토록 했다. 그러나 고려실록을 이후 전국 여러 곳으로 옮겨다니게 된다. 책은 무게가 많이 나가 운반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고려실록은 자주 옮긴 것은 왜구의 잦은 출현 때문이었다. 해인사에 보관돼 있던 고려실록은 이후 전국 여러 곳을 전전하던 끝에 우리고장 충주 개천사로 옮겨지게 된다. 이때가 고려 우왕 7년, 그러니까 서기 1381년이 된다. 고려사에는 이런 표현이 보인다. '7월에 왜적이 김해부에 침입하였다. 경상소 안렴사가 보고하기를 "(…) 왜적이 안동 등지를 침공하려 하니, 보주(경북 예천) 보문사에 장서한 역사서적들을 내지
계사년 뱀의 해가 시작됐다. 뱀은 민간신앙의 주대상으로 조선왕조실록에도 그 기록이 간헐적으로 등장한다. 특히 '烏蛇'(오사), 즉 먹구렁이에 대한 기록을 많이 접할 수 있다. '경상도 관찰사 김응기가 치계하기를, "청송에 거주하는 민세정(閔世貞)은 그의 형 세경(世卿)이 병을 얻어 사경에 이르니, 67세의 홀어미가 상심한 끝에 또한 병이 났습니다. 의원이 말하기를 '오사(烏蛇)를 혹은 찌거나 혹은 회를 쳐서 먹으면 나을 것이다." 하니…'- 구렁이와 관련된 표현으로는 능구렁이도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린다. 능구렁이를 한자로는 적동사(赤棟蛇)라고 한다. 등에는 흑갈색과 적갈색이 교대로 배열되어 있고, 배는 은백색이기 때문이다. 어문학자들에 따르면 구렁이는 '굵(굵다)'에 호칭어미 '엉이'가 붙은 말로 굴겅이 → 굴헝이 → 구렁이 순으로 변했다. 따라서 구렁이는 '굵은 뱀'을 뜻함을 알 수 있다. 구렁이는 지금 사람에게는 조금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사람들은 동작이 느리면서 음흉하거나 능글 맞을 때 '구렁이 같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때문에 일을 처리하는 데 남이 눈치채지 못하게 슬그머니 해치울 때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라고 하고, 본심을…
우리나라에 서양력인 양력이 처음 도입된 해는 1895년(고종 32)이다. 고종은 양력 도입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 연호를 '건양(建陽)'으로 정할 정도였다. 건양은 글자 그대로 '양력을 세웠다'는 뜻이다. 이처럼 고종이 양력 도입에 적극성을 보인 것은 외국과의 조약체결 때문이었다. 주변 나라는 모두 양력을 쓰는데 비해 조선만 유독 음력을 사용하면서 적지 않은 불편을 겪었다. 따라서 당시 조선은 음력 표기를 한 후 그 아래에 '양력 몇년 몇월 몇일'을 병기해야 했다. 오스트리아와 통상조약을 체결한 구한말 인물은 권재형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조약문 맨 끝에 '대조선국 개국 501년 5월 29일'이라고 쓰고, 다시 '양력 1892년 6월 23일'이라고 병기했다. 그러나 양력 도입은 처음부터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지석영(池錫永·1855~1935)은 종두법을 발견하는 등 당시로서는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양력 도입을 강하게 반대했다. 이유는 한 나라 안에 '정월(正月)'이 두 개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종묘, 사직, 전각에 지내는 제사와 경사스러운 명절, 기원절에 대해 음력을 쓰는 것은 음력 정월 초하룻날을 정월로 삼기 때문이며, 행정의 조서
택리지는 1751년(영조 27) 조선후기 실학자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이 저술한 조선시대 지리서를 말한다. 그러나 책이름 '택리지'는 처음이 아닌 후대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저자 이중환은 30년 동안 전국을 방랑한 끝에 그의 나이 61세인 1751년 그때까지의 체험을 기록한 초고를 바탕으로 택리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중환은 이 택리지를 완성한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 67세였다. 이런 택리지는 저술된지 200년이 훨씬 넘었음에도 오늘날에도 공감되는 바가 적지 않다. 바로 공리공담이 아닌, 실학적인 관점에서 지리적 사상을 저술했기 때문이다, 이중환은 젊은 나이인 24살에 지금의 고시인 문과에 합격해 숙종 39년(1713)에 관직에 나아갔다. 그러나 영조 1년(1725) 이른바 목호룡(睦虎龍·1684~1724) 사건에 연루돼 국문을 당한 끝에 유배를 두 차례나 반복했다. 1722년 목호룡이라는 인물이 "노론들이 경종(영조의 이복형)을 시해하려는 모의가 있었다"라고 고자질을 했다. 이 여파로 영의정 김창집 등 당시 4대신을 포함해 60여명이 처형당하는 살육행위가 일어났다. 이를 신임사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2년 뒤인 1724년 노론의 지지
청주에서 가장 잘 알려진 누각은 중앙공원 안에 위치하고 있는 망선루(望仙樓)다. 망선루의 고려시대 때 이름은 '경치를 모은다'는 뜻의 취경루(聚景樓)였다. 지금의 이름은 조선 세조 때의 권신인 한명회가 지었다. 이후 망선루는 건축학적으로 두세 번의 변화를 더 겪었다. 조선후기 청주목사였던 이섬(李暹·1612∼1673)과 이수득(李秀得·1697~1775)에 의해 추가 중수가 있었다. 망선루와 가까운 곳에는 청주옥이 위치했다. 이중 이섬이라는 인물은 청주옥에 얽힌 이야기에도 등장한다. 죄인 관리를 잘못해 결국 청주목사 자리에서 파직을 당한다. '집의 이유상, 장령 심유가 아뢰기를, "청주(淸州)에 수감되어 있던 살인한 죄인과 아비를 시해한 죄인이 형신을 받은 뒤 거짓으로 옥중에서 죽자 목사 이섬(李暹)이 곧바로 시친(屍親)에게 내어주었는데, 여러 달 동안이나 도망하여 살다가 이번에 발각되었습니다. (…) 목사 이섬을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소서."- 반면 숙종~영조 연간을 살았던 이수득은 같은 청주목사를 역임했으면서 이섬과 정반대의 행정을 펼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가 진휼 관리를 잘 하자 당시 암행어사 정상순이 크게 칭찬했다. '정상순이 말하기를, "비단 잘
국립환경과학원이 얼마전 "호랑이 없는 남한에서 담비가 최상위 포식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내용의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담비는 같은 족제비과 동물 중에서도 나무를 잘 타고 또 땅 위에서 날쌔기로 유명하다. 이런 요소들이 담비를 최상위 포식자로 만들고 있다.담비의 중세 표현은 '담븨'로 이것이 '담뷔', '담뵈' 순으로 변했다. 경상도 지역에서 담비를 '담보' 또는 '담부'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나아가 담비가죽의 순우리말은 '잘'로, 중세어 '쟈할'이 변했다. 이밖에 담비를 한자로는 '貂'(초), 또는 '山獺'(산달)이라고 쓰고 있다. 고사성어 중에 '구미속초'(狗尾續貂)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개꼬리로 담비꼬리를 잇는다'는 뜻으로 쓸모없는 사람에게 관직을 함부로 주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 때 사마륜(司馬倫)이라는 인물있었다. 그는 진나라 무제 사마염(司馬炎)의 숙부로 조왕(趙王)에 봉해졌다. 사마염이 죽은 뒤 그의 아들 사마충(司馬衷)이 혜제(惠帝)로 즉위하였으나, 사마륜이 그 자리를 찬탈했다. 그런 사마륜은 권력을 남용, 그의 친척과 친구들은 물론 노비와 시종들에까지도 관직을 주었다.그러자 진서(晉書)를 쓴 방현
뗏목은 원시적인 배라 사고도 빈발했다. 여기에는 우리고장도 포함돼 있다. 성종 때 제천 사람들이 뗏목을 타고 한양으로 내려가다 익사한 사고가 실록에 자세히 적혀 있다. 당시 한강도승(漢江渡丞) 심지(沈智)라는 사람이 이런 보고를 한다. "충청도 제천의 정병 김중선 등 6인이 본현에서 뗏목을 타고 양근군 지경에 이르렀다가 큰 물을 만나서 뗏목이 풀리어 3인은 익사하고 김중선 등 3인은 부서진 뗏목을 같이 타고, 한강에 표류하여 이르렀으므로 신이 이를 구원해 내었습니다."인용문에 등장하는 도승은 조선시대 한강수계 7곳의 진(津)과 도(渡)를 관리하던 책임자를 말한다. 종9품이다. '진'과 '도'는 그 구별이 쉽지 않다. 다만 도하(渡河), 진강(津江)의 표현으로 미뤄, '도'가 좀더 규모가 큰 나루터가 아닌가 여겨지고 있다. 사실 뗏목은 조선의 창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태조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나설 때도 대형 뗏목사고가 발생했다. 익히 알다시피 이성계는 위화도까지 진출했다가 그곳에서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을 하면서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바로 그 직전의 상황에서 뗏목사고가 일어났다. 함께 출정했던 당시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1390)의 상소 내용
남한강 상류의 산간 내륙에서 벌목돼 뗏목 형태로 운반된 소나무는 역시 궁궐을 짓는데 가장 많이 사용됐다. 광해군일기에서 영건도감이 이런 말을 한다. "작년 가을과 겨울부터, 여기 저기서 긁어모아 마련하여, 금년 경덕궁(慶德宮) 공사를 끝내는데 쓰려고 한 것이, 재목과 서까래 감을 합쳐 모두 1만8천여개였습니다. (…) 그런데 뜻하지 않게 경덕궁 안에 또 더 건축할 곳이 생겼고, 장롱과 궤짝, 제상과 향탁 등의 집기에 응당 들어갈 수효도 또한 2백, 3백개에 이릅니다."- 그러나 뗏목은 궁궐 뿐만 아니라 한양 사대부들이 자기집을 짓는데까지 사용되면서 갖가지 부작용을 낳았다. 중종실록에 이런 표현이 보인다."사대부의 집에서도 다투어 본받아 또한 장려하게 꾸미기를 힘써 화려한 서까래와 높은 용마루가 방곡에 즐비했는데, 선왕 때 재상의 집은 여기에 비교해 보면 마치 변소와 같았다. 수령들도 매번 집짓는 재목을 벌채해 뗏목과 배로 운반하여 권귀(權貴)에게 아첨하느라 동강과 서강을 메웠다."- 인용문 중 '권귀'는 사대부를 의미한다. 강원도 영월의 동강과 서강이 메워질 정도로 소나무를 벌채했다면 그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재목구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영건도감이라는
남한강 뗏목은 얼음이 풀리는 우수·경칩이 지난다고 바로 운반되는 것은 아니었다. 비로 강물이 어느정도 불어나야 가능했다. 뗏사공들은 봄비로 물이 어느정도 불어나면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기민하게 움직였다. 뗏목을 엮는 방법은 △칡넝쿨이나 쇠줄로 붙들어 매기 △나무에 구멍을 뚫어 연결하기 △쇠고리를 이음새로 박고 밧줄로 잡아매기 등이 사용됐다. 이렇게 완성된 뗏목배 하나를 '한동가리'라고 불렀고, 여기에는 보통 25~35개 정도의 굵고 곧은 소나무가 사용됐다.이렇게 영월이나 우리고장 단양 등 남한강 상류에서 만들어진 뗏목은 자본가인 목상(木商)이 자비를 들여 '강치성'이라는 제사를 올린 후에야 한양을 최종 목적지로 운반이 시작됐다. 이때 여자의 접근은 엄격히 금지됐고, 뗏목이 출발할 때는 작별인사를 하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강치성을 드린 뗏목은 한번에 보통 5~7 동가리가 운반됐고, 이때 2-3명의 뗏사공이 동가리떼에 올라탔다. 그러나 뗏목도 배는 배여서 조타수 역할을 하는 사공이 필요했다. 뗏사공 중 제일 앞에 서는 사공을 '앞구잽이', 맨 뒤에 서는 사공을 '뒷구잽이'라고 불렀다. 이중 앞구잽이가 조타수 역할을 했다. 앞구잽이는 각 지점의 여울, 수심,
뗏목은 '목재 따위를 엮어 물에 띄워 내리는 나무'로 정의된다. 조선시대 우리고장 남한강으로 뗏목이 운반됐다. 이 뗏목은 일반 배와 많이 달았다. 또 그 자체가 나중에 상품으로 팔렸기 때문에 재화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종사자들에게는 생계수단이 됐던 셈이다. 그러면서 뗏목은 뗏사공을 운송했다는 점에서 운송수단의 기능도 지니고 있었다. 뗏목은 단순해 보이지만 무게가 많이 나가기 때문에 제작이 쉽지는 않았다. 조선시대 뗏목은 크게 벌목, 목재운반, 엮기 등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먼저 벌목은 낙엽이 진 이후인 음력 10월부터 2월 사이의 겨울철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여름에 나무를 베면 청태가 끼거나 뒤틀림 현상이 심해 목재로서 가치가 떨어졌다. 또 겨울을 제외한 나머지 계절은 영농철이라 인력동원이 쉽지 않은 면도 있었다. 벌목을 했으면 일단 산 밑으로 운반해야 했으나 그 과정도 결코 쉽지 않았다. 지금은 임도가 거미줄처럼 뚫여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그러질 못했다. 조선시대에는 '통길'과 '목도'라는 방법으로 산속의 소나무를 산 밑으로 운반했다. 통길은 잡목을 제거한 후 경사면 아래로 미끄럼 길을 내, 통나무를 운반한 것을 일컫는다. 목도는 두 사람이 줄과…
전회에 우리고장 문의(청원)가 관향인 고려말 대신 박의중(朴宜中·1337~1403)이 억정사 대지국사탑비(보물 제 16호·충주 엄정면 괴정리 )의 글을 지었다고 밝힌 바 있다. 현존하는 사료를 보면 대지국사(大智國師)는 고려후기 우리고장 충주지역에서 활동했다. 그는 속명이 한찬영(韓粲英)으로, 본관은 청주(淸州)다, 그리고 아버지는 사복직장에 재직했던 한적이고 어머니는 청주곽씨이다. 부모 모두 청주를 관향으로 가졌다는 점이 우리고장과의 밀착도를 더 높이고 있다. 그는 1341년 삼각산 중흥사에서 태고화상 보우를 은사로 삭발하고 계를 받았다. 이후 승과에 응시한 23세 전까지 보우에게 5년, 정혜국사에게 3년, 수자화상에게 1년간 공부를 했다. 보우에게서 법을 받았고, 정혜국사로부터는 수행을 배웠으며, 수자화상을 통해서 참선의 진정한 의미와 방법을 배웠다. 그는 1353년 승과에 장원 급제, 대흥사의 주지가 되면서 사판승(事判僧)의 길로 접어든다. 그 결과, 왕명에 의해 석남사, 월남사, 신광사, 운문사 등 중요한 절의 주지를 맡아 선법을 설하고, 1372년 공민왕으로부터 '정지원명무애국일대선사(淨智圓明無石+疑國一大禪師)'라는 호와 함께 금란가사, 바리때, 묘
고려 공민왕은 1361년 홍건적이 수도 개경까지 쳐들어오자 복주(福州·지금의 안동)로 몽진했다. 몽진은 임금이 외침을 당해 급하게 피난길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안동에는 2개월 정도 머물렀다. 안동시는 이를 기념, 매년 '공민왕 헌다례' 축제를 열고 있다. 그러나 안동보다 더 오래 머문 곳이 있다. 바로 우리고장 청주로, 1362년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약 5개월 가량 청주읍성에 체류했다. 고려사는 공민왕이 청주에 들어오는 모습을 이렇게 적었다.'임진에 어가가 청주(淸州)에 이르렀다. 처음 상주에 행차하였을 때 호종한 신료들에게 인가에 우거를 허락하고 그 주인으로 하여금 피하지 말게 하였더니…'- 공민왕은 체류가 길어지자 청주에서 과거 시험를 실시했고, 이때 취경루(지금의 망선루) 방목(榜目)에 장원으로 이름을 올린 인물이 박의중(朴宜中·1337∼1403)이다. 합격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朴實(박의중의 초명), 金濤, 金祗,(이상 을과), 鄭履, 李崇仁, 金仲權, 朴希道, 康好文, 趙德謙, 許時(이상 병과)'. 李猷 등 나머지 23인은 진사 합격자였다. 박의중은 조금은 낯설은 인물이나 매우 유능하고 강직한 성품의 관인학자였다. 그리고 우리 고장과도 적
'대풍(大風)을 앓는 집에서 마침 오사가 술동이 안에 빠진 것을 모르고 그 술을 마셔 마침내 병이 낫기도 했다.' 실학자 홍만선(洪萬選·1643∼1715)이 그의 저서 '산림경제'에서 '오사'(烏蛇·먹구렁이)의 약효를 적은 글이다. 2013년은 흑사띠인 '오사'의 해이기도 하다. 그는 인천부사, 상주목사 외에 우리고장 연원(충주) 찰방과 단양군수 등을 역임했고,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산림경제'를 저술했다. 산림경제는 농업 저술이면서 주택·건강·의료·취미 등 농촌생활적인 내용까지 아우르고 있다. 따라서 종래의 농서들에서 볼 수 없는 종합적인 농가 경제서이자, 일부 과학성도 겸비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방대한 저술량에 비해 그의 문집, 연보, 행상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조현령이 지은 묘갈 문장과 실록, 송자대전, 범옹집(泛翁集) 등에 단편적인 이야기가 전하고 있어 긔의 유일한 전기 자료가 되고 있다. 범옹은 그의 부친 주국(柱國)을 말한다. 홍만선의 할아버지는 대사헌 이상(履祥)이고, 아버지는 예조참판 영(霙)이며, 어머니는 좌의정 이정구(李廷龜)의 딸이다. 말 그대로 명문가 집안이다. 사료를 보면 그의 아버지 주국은 1674년(숙종 즉위년) 제…
2013년은 뱀띠해, 그것도 60년만에 돌아오는 흑사(黑蛇·검은 뱀)의 해라고 한다. 인터넷 상에는 젊은 주부들 사이에 "2세를 낳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다"의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2013년을 흑사띠로 보는 것은 십간·십이지의 주역적인 해석에서 연유하고 있다. 먼저 금년이 뱀띠해가 되는 것은 '계사년'(癸巳年)의 '뱀 巳'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십이지(十二支)이다. 나아가 뱀 중에도 흑사띠인 것은 십간(十干)과 관련이 있다. 십간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다. 주역상 이 십간은 둘씩 쌍을 만들어 갑을, 병정, 무기, 경신, 임계 등의 오행(五行)으로 묶을 수 있다. 오행 중 갑을에는 청색, 병정은 붉은색, 무기는 황색, 경신은 흰색, 임계는 검은색이 일대일로 대응한다. 따라서 계사년에 해당하는 계(癸)는 검은색(黑)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2013년은 '흑사띠'다. 흑사하면 생각나는 것이 '먹구렁이'이다. 구렁이의 어원은 순우리말 '굵'(굵다)에 호칭어 '엉이'가 붙은 맡이다. 굵엉이가 굴겅이-궁렁이-구렁이 순으로 변했다. 이중 먹구렁이는 표피가 검은색을 띠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렁이의 또 다른 종류인 능구렁이는 이와 다소 다르
문헌상 19세기 초에 '아리랑'과 비슷한 표현이 보인다. 천주교 순교자 이승훈은 '만천유고'에 '농부가'(1790)를 남겼다. '호미매여라 호미매여라 / 황혼월색이 만기간(滿旗竿)일세 // 아로롱 아로롱 어희야(啞魯聾) / 일석노담재주환(日夕農談載酒還)'. 후렴구 '아로롱'은 말 안하고(啞) 우둔하게(魯) 귀막고(聾) 지낸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로롱'이 아리랑과 같은 의미를 지녔는지는 다소 논란이 남아 있다. '아리랑'이라는 분명한 명칭은 생각보다 늦은 19세기말에 등장하고, 그 배경의 주인공은 고종이었다. 황현(黃玹·1855~1910)은 '매천야록'에서 이렇게 적었다. '고종은 매일 밤마다 궁궐에 전등불을 대낮같이 밝히고 광대와 재인들을 불러들여 아리랑타령(阿里娘打令)과 같은 신성염곡(新聲艶曲)을 연주하며 놀았다.(…) 이제는 다름 아닌 궁궐에서도 하는 것이다.' '아리랑' 할 때의 '랑'을 '아가씨 娘' 자로 적어고, 그리고 이를 '염곡'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눈길을 끈다. 염곡은 이른바 남여상열지사의 노래를 말한다. 다소 퇴폐적인 분위기가 묻어나고 있다. 이런 문장이 이어진다. '임금은 이것을 전담하는 원임대신으로 하필이면 민영주(閔泳柱)를 임명했고,
충북을 포함한 충청도에도 아리랑이 존재했다. 그러나 국내 음악계에서 '충청도 아리랑'이라고 개념화시켜 놓은 것은 없다. 그렇게 볼 정도의 음악적인 틀과 정형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다만 중국 만주 정암촌에서 불려지는 아리랑이 '청주아리랑' 또는 '충청도아리랑'의 원형으로 볼 수 있다는 강력한 견해가 있다. '청주아리랑'은 임동철 전 충북대 총장이 처음 발견, 지난 2003년 관련 논문을 발표하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날 가라네 날 가라네 날 가라네 / 삼베질쌈 못한다고 날 가라네 // 삼베질쌈 못하는 것 대단하고 / 아들딸 낳아준 건 대단찮나.(후렴)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시아버지 죽서어 좋댓더니 /왕골자리 떨어지니 또 생각난다 // 시어머니 죽어서 좋댓더니 / 보리방아 물저놓니 또 생각나네.' 후렴은 앞과 같다. 정암촌의 노랫자락이 '청주 아리랑'으로 인정받으려면 우리고장 청주 주변에 비슷한 노랫가락이 조금이라고 남아있어야 한다. 그래야 양자의 음악적인 혈연성을 확인할 수 있다. 정암촌 아리랑의 핵심적인 노랫말은 '날 가라네 날 가라네 날 가라네'다. '날 가라레'는 '나를 집밖으로 나가라'라는 뜻이다. 이 노랫말이…
아리랑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됐다. 유네스코는 선정 이유를 "아리랑은 다양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창조됐으며 공동체의 정체성을 보여 주고 사회적 단결을 제고하는 역할을 했다"라고 밝혔다. 이에따라 우리나라는 15종목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아리랑 하면 가장 궁금한 것이 어원이다. 현재 무려 40개의 어원설이 있으나 정설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없다. 대신 '무어원설'이 폭넓게 수용되고 있다. 이 설은 '노랫말 아리랑은 의미 없는 사설로, 흥을 돕고 음조를 메워 나가는 구실한다'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아리랑이 생겨난 시점도 궁금하다. 다양한 설이 있으나 고대, 고려, 조선초기, 근대 발생설 등 대략 4가지 설로 구분되고 있다. 고대 발생설은 이병도 박사가 주장했다. 그는 아리랑의 '아리'는 낙랑을 뜻하고, '랑'은 한자 '고개 령'(嶺) 자의 변형으로, 바로 평양(낙랑) 아래에 있는 '자비령'을 의미한다고 봤다. 고려시대 발생설은 고려속요에 선이 닿아 있다. 고려속요의 하나인 '청산별곡'에는 '살어리 살어리랏다 쳥산애 살어리랏다 / 멀위랑 다래랑 먹고 쳥산애 살어리랏다 /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충북일보] 청주국제공항의 공항이용 편리성을 높여야 할 필요가 있다는 아쉬운 성적표가 나왔다. 1일 국토교통부 '2023년 항공교통서비스 평가' 중 공항서비스 평가결과를 살펴보면 청주공항은 편의시설, 교통약자시설 편의성 등을 평가하는 '공항이용편리성' 측면에서 'C+(보통)'를 받았다. 항공교통서비스 평가는 항공사업법에 따라 항공 교통 이용자의 권익 보호를 위해 2018년부터 매년 실시해오는 것으로 이번 공항평가는 여객처리 실적이 높은 7개 공항(인천·김포·김해·제주·청주·대구·광주)에 대해 실시됐다. 평가 항목은 4가지로 △신속성 △수하물 처리 정확성 △공항이용 편리성 △이용자 만족도 등으로 구성된다. 청주공항은 '신속성(A+)'과 '수하물 처리 정확성(A++)' 부문에서 '매우 우수'로 평가 받았다. 아쉬운 성적을 받은 '공항이용 편리성' 항목은 공항 접근성과 교통약자 이동편의 제고를 위해 새롭게 구성된 지표로 △수단별 위치 및 동선안내 △연계교통수단 노선정보 △교통약자 배리어프리(무장애) 적용수준 등이 고려됐다. 청주공항은 원격주기장 이용시 휠체어 리프트카가 존재하지 않아, 휠체어를 탑승한 교통약자의 이동에 어려움이 있어 배리어프리 적용 수준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청주 오송에 바이오의약품 소부장 특화단지와 첨단재생바이오 글로벌 혁신특구 유치에 성공한 충북도가 바이오 특화단지와 K-바이오 스퀘어 조성 사업의 예비타당성조사 면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내 바이오산업 중심지로 자리 잡은 오송을 바이오 관련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의 클러스터로 육성하기 위해서다. 바이오 특화단지는 올해 상반기 지정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이며 예타 면제는 이때까지 실현시킨다는 목표를 잡았다. 1일 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가 주관한 바이오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 공모에 도전장을 던졌다. 특화단지로 지정되면 신규 산단 조성 시 국가산업단지로 신속 지정 검토, 생산시설 신·증설 때 산업단지의 용적률 최대 1.4배 상향 등을 지원 받는다. 정부 연구개발(R&D) 우선 반영, 입주 기관에 대한 국·공유 재산 사용료와 대부료 감면, 예타조사 특례 적용 등이 주어진다. 이 같은 다양한 혜택이 바이오산업 육성에 큰 도움이 되는 만큼 유치전은 뜨겁게 전개되고 있다. 충북을 비롯한 11개 지자체가 뛰어들었다. 인천과 강원, 대전, 경북, 전북, 전남이며 경기는 수원과 성남, 시흥, 고양 등 4곳이 신청했다. 도는 지난달 30일 서
[충북일보] ◇올해 충북청주FC의 목표는. "지난해 리그는 목표였던 9위보다 한 단계 높은 8위로 마감했고 14경기 무패 기록도 세웠다. 그 배경에는 최윤겸 감독을 비롯한 코칭 스태프의 훌륭한 전략과 빈틈 없는 선수 관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스포츠 경영 리더십을 바탕으로 올해는 조금 더 높은 목표인 플레이오프를 향해 달려보려 한다. 13개 팀 중 5위 이상의 성적은 욕심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달성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매주 목요일 감독·코칭 스태프를 중심으로 선수 강화팀, 대외협력팀, 마케팅 홍보팀 등 사무국의 모든 팀이 모여 PPT 발표를 한다. 이 발표를 통해 지난 경기를 분석함과 동시에 다가오는 경기에 대한 전략을 구체적으로 수립·이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나아가야할 구단 운영 방향은. "단순하게 축구 경기 한 경기, 한 경기로만 끝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스포츠는 막강한 힘을 품고 있다. 스포츠 경기 활성화로 작게는 건전한 가족문화 형성부터 크게는 지역 소통, 나아가 지역 경제 성장까지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홈경기 날이 되면 가족 단위의 관중들이 경기장을 많이 찾는다. 경기 관람을 통해서 여가 시간에 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