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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전좌한

옥천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 … 경술국치 전후로 몰락
납세불납운동으로 피체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 옥고
사제 폭탄으로 조선은행 등 폭파하려다 실패 만주행
세 아들, 병사와 6·25 전사로 잃고 말년은 찌든 가난

  • 웹출고시간2015.07.19 17:16:06
  • 최종수정2015.07.19 17:16:06

전좌한

[충북일보] 1927년 8월 11일 오전 9시 경성지방법원. 오전부터 푹푹 찌는 불볕더위에도 아랑곳없이 법정 안은 새벽부터 몰려든 방청객으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법정 구석구석에는 종로서와 경기도경찰부에서 파견된 사법경찰들이 사방을 경계하며 방청객들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재판부의 입정이 끝나자 9명의 피고들이 초췌한 몰골로 법정에 들어섰다. 호기심으로 웅성거리던 법정 안은 순간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을 폭파하고자 시도했던 주인공들의 얼굴이 세상에 공개된 순간이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납세불납 문서를 인쇄

전좌한(全佐漢, 1899~1986)은 옥천군 옥천읍 죽향리에서 옥천 전씨인 아버지 전보현과 어머니 문화 류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비교적 부유하게 옥천에서 세거해온 그의 집안은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일제에 의해 몰락했다고 한다. 그는 종조부인 전흥규(全興奎)의 후원으로 옥천공립보통학교(현재 죽향초등학교)와 서울 영화학당(永化學堂)에서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그러던 중 1920년 12월 종조부에게 '경성상업실업단(京城商業實業團)'이라는 비밀결사로부터 납세불납운동 문서가 전달되었다. 이 문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정서'의 서명과 함께 '명령'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그는 고향 후배 임선재(任善宰)와 함께 문서를 인쇄하여 우편으로 발송하고, 옥천군청 앞 게시판 등 여러 곳에 게시하였다. 이로 인해 전좌한은 1921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출판법 위반과 치안방해죄로 1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 의열투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다

전좌한의 생가터

ⓒ 충북 옥천군 옥천읍 죽향리
1926년 전좌한은 김응선(金應先, 일명 金一山), 계의산(桂義山)과 함께 다시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김응선은 당시 만주지역 정의단 소속으로 이전에 신돌석 의병진에서도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전좌한은 기차 안에서 창의단 소속이라고 자신을 밝힌 계의산을 만났다. 그는 김응선에게 계의산을 소개하였고, 셋이 함께 의열투쟁을 펼치기로 약속하였다.

의열투쟁은 폭력적 수단을 동원해 일제에 항거했던 1920년대 대표적인 독립운동방략 중 하나였다. 1919년 3·1운동은 민중의 폭발적인 저력을 보여준 운동이기도 하지만, 비무장·비폭력 독립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게 하여 독립운동의 방향을 전환시킨 운동이기도 하다.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항일을 위해 '마땅히 죽여야 할 일곱 부류의 대상'을 정하고 ≪독립신문≫에 '칠가살(七可殺)'이란 제목으로 처단 대상을 발표하였다. 김원봉이 1919년 말에 창단한 의열단 역시 '칠가살', '오파괴(五破壞)'로 대변되는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을 행동강령으로 표방하였다. 이후 1920년대 독립운동은 조선총독을 비롯한 일본 관리, 친일 부호, 밀정, 모반자 등 처단 대상으로 지목된 인물과, 파괴 대상으로 지목된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경찰서 등 일제의 주요통치기관을 공격하는 의열투쟁으로 전개되었다.

경성지방법원에서 개최된 전좌한 등 공판 광경

ⓒ 매일신보 1927년 8월 12일
전좌한은 폭탄 제조기술이 있는 김응선과 함께 비밀리에 폭탄을 제조하였다. 자금은 계의산이 창의단을 통해 지원해주겠다고 약조하였다. 그들이 폭파하기로 결정한 기관은 경성의 조선총독부 청사 두 곳과 조선은행, 조선신궁, 종로경찰서 등이었다. 전좌한은 다섯 기관의 폭파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며 김응선에게 같이 행동할 수 있는 동지를 요청하였다. 김응선은 송암우(宋岩于) 등 3명의 고향 청년에게 경성을 구경시켜준다고 하고 1927년 1월 28일 그들을 데리고 경성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일제 헌병대에 탐지되어 송암우 등 3명의 청년이 숙소에서 체포되었다. 거사 전날 계의산과 김응선이 잠시 전좌한을 만나러 나간 사이 헌병대가 그들의 숙소를 급습하였던 것이다. 김응선과 계의산은 만주 펑티엔(奉天, 현재의 선양)으로 도주하였으나, 김응선만 체포되었다. 전좌한은 매제 신화수(申華秀)의 집에서 몇 개월간 숨어 지내다 만주로 건너갔다.

△ 다시 의열투쟁을 도모하다

전좌한은 매제의 소개로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양기탁을 찾아갔다. 거기에서 그는 지안(集安)을 거점으로 국내외에서 격렬한 무장활동을 전개하던 참의부 소속의 이응서(李應瑞)를 알게 되었다. 그는 이응서, 남정(南正), 김봉준(金鳳俊) 등과 함께 '조선혁명군대본영'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전좌한은 그해 초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조선총독부 폭파 계획을 다시 거행하기로 이들과 합의하였다. 거사 날짜는 경복궁 자리에 새롭게 청사를 건설한 조선총독부 낙성식 날인 10월 1일로 잡았다.

전좌한 판결문

ⓒ 경성지방법원, 1927년 8월 31일
전좌한은 선발대를 데리고 무기를 은닉할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먼저 국내로 잠입하기로 하였다. 선발대 일행은 안동(安東, 현재의 단동)에서 국내로 잠입하려 하였으나 경계가 삼엄해 무기를 휴대하고 국경을 통과할 수가 없었다. 일행은 할 수 없이 무기와 서류 등은 소포로 발송한 후 열차편으로 경성에 들어와 소포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소포의 내용물이 경성우체국에서 발각되면서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전좌한, 남정, 김봉준 등 선발대는 이번에도 거사를 실행에 옮겨보지도 못하고 모두 체포되었다. 전좌한은 두 차례에 걸친 일제 주요시설 폭파 미수혐의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또 다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1931년 3월 가출옥하였다.

△계속되는 '친일' 행적 논란

전좌한은 1920년대 두 차례에 걸친 옥고를 치렀다. 그는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그런데 그의 행적은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인물 가운데에는 뒤늦게 친일행각이 밝혀진 사례가 종종 있다. 1990년대 연합뉴스와 역사문제연구소 등에서는 친일파가 독립유공자로 둔갑된 사례를 비판하며 그때마다 전좌한을 대표적인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거론하였다.

전좌한의 독립유공자 자격 시비가 처음 제기된 것은 1984년 11월 28일자 ≪동아일보≫에 '독립유공자 밀정혐의 자료'가 발견되었다는 기사였다. 발단은 당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송상도(宋相燾)의 『기려수필(騎驢隨筆)』 내용에서 비롯되었다. 송상도는 일제 강점기 많은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수집하고 직접 답사하여 자세한 기록으로 남긴 인물이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전좌한과 계의산은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의 경보부였던 카와사키(河崎)와 다나베(田邊)의 밀정이었다는 것이다. 전좌한이 1차 거의 때 동지들과 같이 잡히지 않았던 것도 폭파사건을 임의로 꾸민 뒤 일제에 밀고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가 밀정임에도 후일 중형을 선고받은 것은 폭탄 테러에 관련됐을 뿐 아니라, 사욕을 위해 동족을 밀고한 행위를 일본인 판사조차 곱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동아일보≫는 1963년 전좌한의 공적을 심사했던 독립유공자상훈심의회의에서도 이런 기록들을 미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도하였다.

전좌한이 밀고 사실을 자백한 기사

ⓒ 동아일보 1927년 8월 23일
사실 더 엄밀하게 따진다면 전좌한의 밀정 논란은 그가 체포되어 심리를 받던 당시부터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사람들은 '경찰의 밀정'이 사건에 가담했다는 것이 사실인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 공판 때마다 법원의 방청석을 빽빽하게 메웠다. 전좌한의 재판과정은 ≪동아일보≫·≪매일신보≫ 등 일간지에 사진과 함께 연일 상세하게 보도되었다. 결국 그는 판사와의 심리과정에서 자신이 카와사키에게 밀고했음을 시인하였다. 카와사키는 경기일대의 치안을 담당하던 경찰 간부로, 경성에서 발생하는 의열투쟁으로 상당히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전좌한은 1차 거사 직전 자신이 밀고했음을 물론, 형사대에 김응선의 존재를 지목해주었으며, 만주로 갔던 것도 카와사키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자백하였다. 당시 친일적 신문이었던 ≪매일신보≫에서도 전좌한의 '연극에 속아' 체포된 다른 피고 가족들의 분노와, '개인의 부당한 보수를 바라 사건을 날조한 가증가오(可憎可惡)니 엄벌이 필요'하다고 날선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일본인 검사의 논고 내용을 보도하였다. 그러나 그는 1984년 밀정 논란이 다시 일자, 송상도와 자신은 일면식도 없기 때문에 그 기록을 믿을 수 없다며 혐의 일체를 부인하였다.

△ 아무도 찾지 않는 '독립유공자'의 무덤

전좌한 묘소

ⓒ 경기도 파주시 야동동 낙원공원묘원
1931년 출옥 이후 그는 경제적으로 매우 비참한 생활을 영위했다고 한다. 생활이 너무 곤궁하여 행상하는 부인을 따라 떠돌아 다녔다. 3남의 자식 중, 두 아들은 해방 직후 병으로 죽었고, 남은 아들마저 6.25전쟁에서 전사하였다. 그는 부인마저 병사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주변의 도움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다가 재혼 후 서울과 인천 등지에서 거주하였다. 전좌한은 1986년 거주지 인천에서 87세의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유해는 가족의 뜻에 따라 경기도 파주의 낙원공원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현재 그의 묘는 십여 년째 가족조차 돌보지 않아 무연고 묘지로 분류되어 있다. 관리인의 안내를 받지 않으면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산 속에 그의 묘가 있었다. 왜 그는 국립현충원에 묻히지 못한 것일까.

/ 김건실 (충청대 강사, 충북대학교 사학과 한국근현대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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