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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최욱영

의병정신을 계승하여 1910년대 비밀결사에 참여하다
제천 출신으로 구한국 군대 강제해산 당하자 의병
강원도 횡성 전투에서는 대퇴부 관통 당하는 부상
道경계 넘나들며 부대간 연합·연계하는 전략구사
15년형 옥고치르던중 순국,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웹출고시간2015.12.13 14:57:34
  • 최종수정2015.12.13 14:57:34

최욱영의 묘(제천시 고암동 순국선열묘역).

[충북일보] 최욱영(崔旭榮, 1854~1919)은 제천 출신으로, 1907년 일제에 의해 구한국 군대가 강제해산 당하자 강원도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수차례 교전하였다. 이후 이강년 부대에 들어가 군사장으로 활동하다가, 이강년이 일제에 체포된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이름을 바꾸고 활동하였다. 1913년 고종의 밀서를 받아 김재성과 함께 국권회복에 뜻을 두고 경북·충북 등지에서 군자금 모금과 동지 규합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14년에는 비밀결사 민단조합에도 참여함으로써, 의병항쟁이 1910년대 비밀결사로 계승되는 추이를 보여준다.

◇ 비분강개하여 의병을 일으키다

최욱영의 고향 전경(충북 제천시 수산면 고명리).

최욱영은 1854년 10월 7일 충북 제천군 제천면 고명리(현재, 충북 제천시 수산면 고명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송산(松山), 호는 청계(淸溪)이다. 그는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성품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하나, 자료의 부족으로 그의 가계와 어린 시절 등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고향인 고명리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며, 묘비에 짤막한 생애가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는 성장하면서 일제에 의해 나라가 침략당하고 식민지화되어가는 과정을 겪었다. 일제의 국권침탈은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체결한 후부터 단계적으로 치밀하게 진행되었다. 일제는 1904년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한 이후, 1905년 을사늑약을 강요하여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정치를 실시했다. 일제의 국권침탈은 1907년에 극에 달하여 헤이그특사 파견을 구실삼아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이어 정미조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는 등 식민지 침략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원주진위대의 항일투쟁을 주도하고 최욱영에게 무기를 지원한 민긍호 의병장.

최욱영은 고향 제천에서 유학을 공부하며 살다가 군대가 강제해산 당하자 더 이상 비분함을 참지 못하고 강원도 원주로 향했다. 그가 원주로 향한 것은 원주의 진위대가 지방에서 처음으로 군대 해산을 거부하며 무장봉기하였기 때문이다. 민긍호(閔肯鎬)·김덕제(金德濟)의 주도로 봉기한 원주진위대는 1907년 8월 5일 원주지역 포수 및 농민들과 합세하여 우편취급소·군아·경찰분견소를 습격하는 등 일본군을 물리치고 원주를 장악하였다.

이때 최욱영은 민긍호로부터 무기를 지원받아 원주 신림면 안강리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그는 원주진위대가 강원도를 근거지로 삼아 경기도와 충북의 접경지역까지 진출하자, 이에 영월·제천·단양 등 10여 지역으로 활동범위를 확대하여 일본군과 수차례 교전하였다. 그는 횡성에서 일본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일본군의 총탄에 대퇴부 상단에 관통상을 입는 부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 이강년 부대에 참여하다

강원도와 충북지역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던 최욱영은 1907년 9월 이강년(李康秊) 부대에 들어갔다. 그는 5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군사장(軍師長)에 임명되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군사장으로 활약하며 충주를 공략하고 제천과 단양일대에서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의병부대들은 독립적으로 투쟁해 왔던 기존의 방법에서 나아가 도의 경계를 넘나들며 부대 간 연합 또는 연계하는 투쟁방략을 시도하였다. 이강년 부대 또한 민긍호 부대 등과 연합하여 제천 천남전투를 승리로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최욱영이 군사장으로 합류한 이후 부대는 영월·단양·제천 등지로 진을 옮겨가며 적을 격파하고 많은 무기를 노획하여 그 위세를 크게 떨쳤다. 1907년 12월 그는 부대를 이끌고 제천 부근에서 머물러 있다가 일본군에게 기습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전열을 재정비한 후 적을 피해 단양으로 진을 옮겼다. 이후 단양 복상골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는데, 이 전투에서 이중봉(李重鳳) 등 주요 의병장이 체포되는 피해를 입었다.

1908년 봄부터는 강원도·충청도·경상북도 일대에 걸쳐 폭넓은 활동을 벌였다. 그의 부대는 당시 강력하게 반일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호남지역으로 남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7월 제천 작성산(鵲城山)에서 잠시 머물러 있던 중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다. 그를 비롯한 의병들은 격렬하게 적에 맞서 싸웠으나, 의병장 이강년이 부상을 입고 일본군에게 체포되었으며 수많은 의병이 전사하는 등 크게 패하였다. 그는 대장 이강년을 잃은 의병부대가 해산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고향으로 돌아가 후일의 재기를 도모하였다.

◇ 국권회복에 뜻을 두고 군자금 모금에 나서다

작성산 전투에서 패배한 후 제천으로 돌아온 최욱영은 이름을 권태준(權泰俊)으로 바꾸고 함께 이강년 부대에서 활동했던 동지들을 모아 재기를 도모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후 그는 경북 문경군 영순면 백포리(현재, 경북 문경시 영순면 이목리)로 거처를 옮기고 재기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1913년, 김재성(金在聖)으로부터 비단에 쓰인 밀서를 받았는데, 바로 고종의 칙명(勅命)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국권회복에 강한 뜻을 두고 군자금 모금 계획을 세우고 동지 규합에 나섰다.

최욱영의 군자금 모금 활동에 관한 기사(매일신보, 1915.6.25).

그는 전부터 알고 지내던 류승만(柳承晩)·이중화(李重和)·조감역(趙監役)·김병연(金秉淵)·이인화(李仁和)를 비롯한 동지 17명을 규합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경북·경남·강원도 등지를 근거지로 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군자금 모금 계획을 실행하였다. 그는 1913년 8월 동지 노병식(盧炳植)의 소개로 이중호를 찾아가 항일투쟁을 함께 하기로 약속한 후 돈을 마련하여 군사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화승총 19자루와 군도 2개, 철퇴 1개 등의 무기와 검은 양복 10벌을 확보하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활발한 모금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는 이해 12월 군자금 100원과 김숙헌(金淑憲)으로부터 받은 100원 등 200원으로 동지들이 입을 옷을 짓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하헌병파견소(大下憲兵派遣所) 헌병에 의해 검은 양복과 고종의 칙명을 압수당하는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이후에도 안동·제천 등지에서 동지 및 부하들과 군자금 모금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 비밀결사 조직인 민단조합에 참여하다

최욱영은 1914년 9월 문경에서 결성된 민단조합(民團組合)에 참여하였다. 민단조합은 의병세력을 규합하여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 조직으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나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민단조합의 구성원을 보면 의병 출신 인사들과 독립의군부, 풍기광복단 참여자의 일부들도 구성되었다. 최욱영을 비롯한 이동하(李東下)·김낙문(金洛文)·이식재(李湜宰)·노병직(盧秉稷)·강병수(姜秉秀) 등 주요 구성원은 이강년 부대에 참여했던 의병의 경험을 지닌 인물들이다. 이외에 조용필(趙鏞弼)은 이강년 부대와 풍기광복단에 참여했었고, 이은영(李殷榮)과이세영(李世永)은 독립의군부에 참여했다가 민단조합에 합류한 인물이다.

민단조합은 의병적 활동을 통해 동지 규합과 군자금 모금을 활동 목표로 삼고, 만주의 독립운동기지건설을 지원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몇 차례 군자금 모금에 나서 성공하기도 하였다. 민단조합의 결성을 전후하여 단원들은 의병세력과 연계되어 활동하였다. 이들은 활동과정에서 복벽주의 성향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군자금을 모금할 때 고종의 칙명을 내세웠고, 모금 대상자를 의군부 정위(正尉)·참위(參尉)·참령(參領)에 임명하였으며, 이들에게 준 사령장에는 덕수궁 인장을 사용하였다. 복벽주의적 성향을 지녔던 그 또한 민단조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이해 11월 이식재, 강병수 등 9명과 함께 강원도 원주 백양산(白陽山)에 모여 군자금 모금 방안을 협의한 뒤 제천 근북면 소재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군자금 100여 원과 공용지(公用紙) 100장을 마련하였다. 또한 면장의 집에서 30여 원, 면서기의 집에서 70여 원을 빼앗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해 12월 부하 안교봉(安敎奉)·염석룡(廉石龍) 등과 안동·제천 등지에서 군자금 모금과 동지 규합 활동을 하다가 일제에 붙잡히고 말았다.

최욱영이 옥고를 치렀던 마포형무소(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제공).

그는 1915년 6월 공주지방법원에서 강도교사죄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이에 불복하여 공소하였다. 그러나 이해 7월 경성복심법원에서 항고가 기각되고 원심이 확정되었다. 그는 마포형무소에서 오랜 옥고를 치르던 중 병을 얻어 1919년 8월 1일 옥중 순국하였다. 현재 국가기록원에는 그가 1916년 6월 대전지검 공주지청에서 보안법위반으로 판결을 받은 형사사건부(刑事事件簿)가 보관되어 있는데, 판결 결과가 '죄가 되지 않음'으로 되어 있다. 후손이 확인되지 않고,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해 열람할 수 없어 동일건의 판결 여부 등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음이 안타깝다. 그의 묘소는 1984년 조성된 순국선열묘역(제천시 고암동)으로 이장되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최소라(충북대학교 사학과 한국근현대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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