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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이명상

선유사를 꾸짖은 호좌의진의 청단장의장(淸丹仗義將)
단양 적성 출신으로 군대 해산당하자 의병 조직
선유사에게 보낸 글에서 당당한 의병논리 전개
1909년 영주 함산골 전투에서 총탄에 맞아 전사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가족·후손 미확인 상태

  • 웹출고시간2015.12.06 15:25:53
  • 최종수정2015.12.06 15:25:53

이명상의 고향인 충북 단양군 적성면 하진리 전경(뒤에 말목산 정상이 보인다).

이명상(李明相, ?~1909)은 단양 출신으로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해산 당하자 의병을 조직하여 호좌의진 이강년부대의 청풍 단양 장의장으로 활약한 후기 의병장이다. 이강년이 순국한 뒤에는 김상태와 함께 김상한 부대의 소모장으로 청풍·단양·충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충북 굴지의 한학자 의병장

이명상은 충청북도 단양군 적성면 하진리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그의 가족관계나 어린 시절 등은 자료 부족으로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다만 1908년 7월 일제 경시총감관방주리(警視總監官房主理)인 경시 청목계삼(靑木戒三)이 그를 추적 조사한 비밀조사 보고서(警秘 제2944호의 1, 1908. 7. 16)가 남아 있어 그 대강을 알 수 있다. 이 문서에는 그의 인상에 대하여 나이는 54∼5세로 머리는 검으나 수염은 희끗희끗하고, 얼굴은 평평하고 둥글며 마마자국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그와 친교가 있는 사람이 서울에 고관으로 있으며, 7촌에 해당하는 인척이 헌병 정위(正尉)인데 역시 서울에 살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다. 특히 그를 '충청북도에서 손꼽히는 한학자'라고 기록하고 있어 그의 학문이 뛰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문서에 의하면, 그는 일찍이 의병으로 나서서 약간의 부하를 인솔하고 충청북도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6월 24일 단신으로 잠복해 있던 곳을 떠나 4백 원의 자금을 지니고 뇌관 등의 군수품을 구입하기 위해 서울로 잠입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음을 알려준다.

이명상을 추적 조사한 일제의 비밀 조사보고서(1908.7).

이명상이 1907년 말 충주군에 파견된 선유사 이순하에게 보낸 글을 보면 강직하고 원칙적이며 충직한 한학자였음을 엿볼 수 있다. 선유사는 의병들이 활동하는 지역에 그들을 회유할 목적으로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이다. 당시 신문(대한매일신보 1907. 11. 15)에는 그가 선유사에 보낸 회신문의 내용이 크게 보도되기도 하였다. 다음은 선유사 이순하가 보내온 글에 대한 이명상의 회신문이다.

이명상이 선유사 이순하에게 보낸 회신문을 보도한 대한매일신보 기사 (1907.11.15).

"도적 떼의 거짓된 명령문을 가지고 온 선유사라는 자여. 선유(宣諭)한다고 하는데, 과연 그것이 주상의 뜻이었던가! 이것은 이토 통감이나 하세가와 주차군사령관이나 이완용이나 송병준 같은 매국노의 명령이 아닌가! 우리 편과 도적 떼의 구분이 분명하니 하나가 될 수는 없다. … 어찌 선유사라 일컫는가· 춘추의 가르침에 역적을 칠 때에 그 패거리를 먼저 다스린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거기서 빠져나와 도적 떼와 함께 멸망하지 말지어다. 더 좋은 것은 이제라도 충의심을 분발하여 이토나 하세가와의 시체를 내다걸고 이완용이나 송병준의 목을 베어 장대에 내걸어라. 그리하면 우리도 즉시 해산하고 국가의 명령을 따를 것이고 국가나 천하를 위해서도 다행일 것이다."

그가 선유사에게 보낸 회신문은 당당한 의병의 논리를 펼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선유사에게 우리나라를 침략한 이토와 하세가와 및 이에 편승하여 나라를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던 이완용과 송병준 등의 매국노를 처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는 이 회신문에서 자신의 직책을 청단장의장(淸丹仗義將, 청풍과 단양지역 의병장), 또는 호서창의장(湖西倡義將, 충청도 의병장)이라고 칭하였다. 또한 의병부대의 규율을 엄격하게 하여 추호도 민폐를 끼치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원칙적이고 철저한 그의 성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단양에서 거병하여 이강년부대와 연합하다

이명상은 처음에 민영팔과 함께 단양의 포군들을 계로 조직하였다. 의병들이 곳곳에서 일어나자 병력을 일으켜 단양·청풍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함께 활동한 인물로는 군사 이진하, 중군장 김규철, 좌군장 민영팔, 우군장 이영승, 서기 이치정 등이 있다.

이명상의 체포 소식을 보도한 기사(황성신문, 1909. 2. 26).

1907년 여름, 고종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해산으로 일제에 의한 국권 침탈은 극에 달하였다. 이에 분기한 의병이 전국에서 다시 일어났다. 이강년은 호좌의진을 재건하고 충청도와 강원도, 경상도, 경기도 일대 산악 지역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전개하며 활발하게 의병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게릴라전의 전투 형태는 일정한 지역을 장악하고 시위하던 을미의병(1895년)의 성격과는 크게 달라진 것이다. 게릴라 전술은 일본 정규군과 맞서 싸우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여러 의진들은 연합부대를 형성하거나 또는 단독 부대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이강년은 차병율(車炳律)을 시켜 유인석 의병장에게 의병들의 연합전선을 형성하는 데 도움 줄 것을 청하는 편지를 전달하게 했다. 1907년 가을 이명상은 차병율을 통하여 이강년과 교섭하여 장의장(仗義將)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장의장이란 단양지역의 의병으로 조직된 의병부대를 일컫는 말이다. 그와 함께 활동한 차병율은 이강년 의진과 박장호 의진에 참여하여 유인석과 접촉하며 의병모집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10년형의 옥고를 치른 인물인데, 2015년 공적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1907년 연말이 다가오면서 의병항쟁은 위기에 직면했다. 무기는 부족한데 일본군의 압박은 날로 거세졌기 때문이다. 이강년은 12월에 있었던 단양 복상골 전투 패배를 계기로 북상의 길을 선택했다. 이 때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인영이 서울 진공작전을 제안했다. 이강년은 전투부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경기도 가평까지 진출해 서울 입성을 도모했다.

이명상은 이강년부대가 북상할 때 함께 이동하지 않고 남아 있으면서 이해수, 백남규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군수품을 수집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해서 전개하였다. 그는 부대를 이끌고 단양에서 일본 경찰과 전투를 벌이고 재빨리 산속으로 숨기도 했다. 일제 기록에 의하면 이들의 무기는 서양식 단발총과 이십이년식 기병총을 사용하고 화승총은 다섯 정 가량이었다. 또 의병대원 모두 한복에 검은 외투를 배낭처럼 등에 지고 모자는 이명상 의병장만 쓰고 있었다고 한다.

◇김상한 부대의 소모장으로 활약하다

1908년 7월 이강년이 청풍 작성산 전투에서 일본군 포로가 되어 얼마 후 사형 당하자 이강년 휘하의 의병장들은 별진장이었던 김상한을 의병총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명상은 김상한 의진에서 소모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김상태·이춘삼·원근선 등과 함께 의병전쟁을 수행하였다. 김상한 부대는 일본군의 지속적인 대규모 병력투입 및 보급로 차단으로 전쟁수행에 극도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크고 작은 전과를 올렸다.

이명상의 활동을 보도한 신문 기사(황성신문, 1909. 5. 22).

이명상은 김상태와 함께 소모장으로서 청풍·단양·충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앞의 일제 기록에서 보듯이 혼자 군수품 조달을 위해 서울을 왕래하는 등 의병부대에서 주요한 임무를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09년 2월 이명상은 충주에서 의병장 이해수, 종사관 백낙천 등과 함께 일본군 충주수비대와 헌병분견소에서 출동한 일본군에 체포되었으나 그는 탈주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자료가 없어 탈주에 관한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다. 또 체포되기 한 달 전에는 김상태·조병륜·원건상 등 10여명과 함께 영춘군 동면에 거주하며 의병을 밀고한 자를 총살하기도 하였다. 이명상은 김상한과 함께 부하 60여 명을 이끌고 청풍·단양·임실·나주·순천·보성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워 수많은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다.

김상한 부대는 산속에 주둔하면서 충북과 경북 주민들의 지원에 힘입어 탄환이 떨어지면 직접 만들어 사용하면서 전투를 계속하였으나 1909년 5월 이명상이 전사하고, 다음해 2월 이춘삼이 포로가 되고 1911년 5월 김상태마저 일본군 포로가 되어 자결하는 등 의병부대의 세력이 현격히 약화되자 결국 청풍에서 마지막 남은 병력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지칠 줄 모르는 불굴의 의지로 의병전쟁을 수행하던 이명상은 1909년 5월 경북 순흥군(영주) 함산골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적의 총에 맞아 전사하였다. 목숨을 바쳐 항일의병활동을 하였지만 그의 가족이나 후손에 대하여는 전혀 알 수 없다. 고향에서도 그의 이름은 생소할 뿐이어서 점점 기억 저편으로 잊혀져가는 많은 독립운동가 중에 한사람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고 후세에 교훈으로 남기기 위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015년 6월 27일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5묘역으로 안장하여 추모하고 있다.

/ 김미화(충북대학교 사학과 한국근현대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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