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직지 아시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 이게 1377년에 간행됐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게 직지 하권 밖에 없데요. 그것도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이제 남은 건 상권이야. 이것만 찾으면 돼. 3대가 먹고 살아. 호호, 농담이고요. 앞으로 직지에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노래 불러드릴게요. '내 사랑 직지'~!"
청주를 주 무대로 활동하는 박정현 가수. 그녀는 일명 '직지가수'다. 무대에 서기만 하면 직지 자랑을 하고, 입을 열기만 하면 직지 노랫말을 읊어댄다.
2002년 첫 앨범에 담긴 타이틀곡이 '직지'였고, 2집에선 발라드풍으로 '내 사랑 직지'를 불렀다. 몇 년 전 '바보야'란 이름으로 3집을 냈는데 직지를 벗어난 첫 외도작품(?)이었다. 너무 직지만 찾다보니 앨범 판매, 좀 더 솔직히 말해 '돈벌이'가 쏠쏠치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누가 직지가수 아니랄까. 4집 때 또 다시 직지 아이템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이다. 이쯤 되니 직지에, 직지에 의한, 직지를 위한 가수가 확실해 보인다.
☞박정현
- 1960년 청주 출생, 대성여상 졸업
- KBS 청주·충주문화교실 가요강사
- 청주대 평생교육원 가요대학 강사
- 직지홍보예술단장
청주에서 낳고 자란 박씨는 마흔이 다 돼 정식가수로 데뷔했다. 요즘 연예인들보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본인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요즘엔 실버가수로 데뷔하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데요. 100세 시대잖아요. 환갑 넘어서 앨범을 내는 사람도 많아졌답니다."
그녀는 젊은 시절 은행에 다녔다. 남들보다 일찍 결혼을 했고, 3명의 자녀를 뒀다. 은행을 그만두고 나서는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렸다. 오랜 객지 생활 끝에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워냈고, 30대 중후반이 돼서야 청주로 돌아왔다.
"제가 워낙 활동적이에요. 아이들을 키우면서 교회 성가대로 활동했는데, 이 때 양로원 같은 곳으로 봉사를 많이 다녔죠. 가서 노래도 불러드리고. 그러다보니 노래가 점점 좋아지고, 가수를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고향인 청주로 돌아오면서 결심했죠. '나도 가수다'라고."
무대에 서기 위한 준비를 하던 중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작은 행사장에서 몇 번 부른 게 고작인데, 그 실력을 눈여겨본 작사가가 연락을 해왔다. '직지'란 노래를 불러보지 않겠느냐고.
참 좋은 제안 같았다. 마침 청주시가 세계직지추진단이란 부서를 만들어 직지를 브랜드화 하기 시작할 때였다. 내 고향 청주의 자랑, 직지를 시민들 나아가 전국에 알려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왠지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았다.
"1집은 주로 직지에 대한 역사적인 내용을 다뤄 너무 불교적 색채가 짙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래서 2집 '내 사랑 직지'에선 최대한 종교적 내용을 빼고 대중들에게 친숙한 트로트풍을 도입하게 됐죠. 2집부턴 전국적 인기도 꽤 얻었는데 출연하는 방송 프로그램마다 하도 '내 사랑 직지'를 불러대니 PD들이 그러더라고요. 직지 말고 다른 노래를 부르면 더 뜰 것 같다고. 단칼에 거절했죠(웃음). 제가 언제 인기가 필요해서 직지를 불렀답니까?"
직지는 나의 사랑이자, 내 삶의 활력소라 믿는 박정현. 요즘은 대학 평생교육원 등에서 후배 양성에 공을 들이고 있다. 후배 가수들이 노래를 잘하고 좋은 무대에 서는 것이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발전시키는 또 다른 길이라 믿기 때문이다.
"자, 박정현씨. 준비됐죠? 슛 들어갑니다."
"서원 고을 흥덕사에 범종 소리 들려오면 못 다 이룬 첫사랑에/ 눈물짓는 아낙네도 두 손 모아 비는구나/ 서기 어린 직지의 뜻 진리 따라 빌고 빌어 선의 길로 인도할 때/ 속세의 슬픔도 거품인 양 사라지고 내 마음을 밝혀주네"(박정현 1집 '직지' 중에서)
/ 임장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