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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아름다움 자태와 기교 - 겸암정사와 시북정의 의미

겸암정사 '강학 공간' 정자와 '살림 담당' 안채 공존

  • 웹출고시간2013.10.20 13:25:25
  • 최종수정2013.11.14 15:28:33

겸암정사

안동지역의 대표적인 정자인 겸암정사에는 많은 역사가 담겨있다. '겸암정사'는 사랑채와 강학공간의 역할을 하는 정자와 살림을 담당하는 안채가 공존하고 있는 특이한 형태다.

정자의 역할이 공부하는 유생들의 생활을 보살펴주면서 자연과 교감하면서 마음을 닦고 도학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겸암정사와 명옥대 시북정 낙암정 등 안동지역의 정자에 대해 알아본다.

안동의 '겸암정사'는 사랑채와 강학공간의 역할을 하는 정자와 살림을 담당하는 안채가 공존하고 있다. 이는 공부하는 유생들의 생활을 보살펴줘 자연과 교감하면서는 마음을 닦고 도학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한 특별한 정자로 알려져 있다.

겸암정사에 대해 연구하고 논문을 발표한 이희승(안동민속박물관) 학예사를 통해 겸암정사의 역사와 구조 및 배치, 관련된 인물 등에 대해 들어본다.


안동민속박물관 민속향토사연구담당 이희승씨 인터뷰

"중요민속자료 제 89호…학문연구·제자양성 등 서당 역할"

△겸암정사는 누가 언제 만들었는가

- 겸암정사는 하회마을의 부용대의 서편 강물이 크게 감돌아 굽이치는 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정자를 지은 사람은 겸암 류운룡(柳雲龍) 선생으로 향리에서 자제들 훈도에 전념하고 부모 봉양에 힘써왔다고 전한다.

겸암은 15세에 스승인 퇴계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에 힘썼으며 선생께서 향리인 도산에 서당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찾아가 배움을 청해 퇴계 또한 그의 학문적 재질과 성실한 자질에 감복해 총애가 끊이지 않았다.

그는 29세가 되던 1567년에 화천(花川) 건너 부용대의 서편에 겸암정사라는 정자를 짓고 학문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썼다. 그의 스승인 퇴계는 주역의 겸괘에 형상하기를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는 스스로 자기 몸을 낮춘다는 뜻이 담긴 '겸암정(謙菴亭)'이라는 현판을 써주며 '그대가 새 집을 잘 지었다는데, 가서 같이 앉고 싶지만 그러하지 못해 아쉽네'라는 편지글을 적어주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겸암은 그 이름을 귀하게 여겨 자신의 호로 삼았다.

겸암정이란 현판은 스승인 퇴계 선생의 친필로 겸암정사라는 현판은 원진해(元振海)가 9세 때에 쓴 것이라 전한다. 이 현판은 선생의 6대손인 양진당 류영 선생이 겸암정사를 중수할 때에 찾아서 걸었다고 전한다.

△겸암정사의 구조와 배치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 중요민속자료 제89호로 지정된 겸암정사는 선생께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 양성에 힘쓴 곳이다. 겸암정사는 학문연구와 제자 교육을 담당하는 서당의 구실을 했다.

건축물의 구성과 배치도 이와 같은 강학의 기능이 잘 반영돼 있다.

'一' 자형의 겹집인 정사와 'ㄱ' 자형의 홑집인 안채가 절벽 위 터전에 함께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정자의 뒤쪽에 자리 잡아 정자의 경관을 해치지 않고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즉, 사랑채와 강학공간의 역할을 하는 정자와 살림을 담당하는 안채가 공존하고 있다. 이는 이곳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의 생활을 보살펴줌으로써 자연과 교감하는 가운데 마음을 닦고 도학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사랑채 격인 정사는 겹집으로 一자형의 8칸 집으로 앞 퇴 부분을 다락집 형으로 높여서 만든 것으로 구조하는 특색을 지녔다. 자연석을 다듬어 기단을 조성한 후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웠다. 누하주와 누상주의 굵기는 비슷하다. 지붕은 팔작지붕에 홑처마로 지어 소박하다고 하겠다.

평면의 구성은 정사를 바라보면서 왼쪽으로부터 구들 놓은 2칸 통의 방, 그 다음 우물마루로 깐 대청 4칸을 가운데 놓고 오른편에 1칸 방과 그 앞에 1칸의 마루를 배치해 전체 8칸의 규모이다.

왼쪽 방에는 암수재(조용히 닦는 곳)란 현판을 걸고 오른쪽 방에는 강습재(강설하고 익히는 곳)라는 현판을 걸었다. 정자의 전면과 좌․우측면은 쪽마루를 돌리고 계자난간을 설치해 각 공간으로 출입의 편의성과 안전성을 고려한 것으로 유명하다.

마루에서 올려다보는 천장은 연등천장의 양식을 따서 서까래와 대들보, 종보, 대공 등의 목재를 결구한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들보 위에 올린 종량이 거의 대들보에 밀착돼 있다. 휘어진 목재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대들보가 종보를 받는 부분을 고려해 중대공을 따로 특별히 마련하지 않고도 가구를 결구하는 멋을 부렸다.

대청에 겸암정, 겸암정사의 현판이 걸려있으며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선생이 창건유래를 자세하게 기록한 기문이 함께 걸려 있다.

안채의 편액은 허수료(虛受寮)이다. 살림집의 안채가 아니라 강당에 부수된 요사로 왕래하는 이들이 숙식할 수 있도록 했다. 평면이 'ㄱ' 자형이고 둥근 기둥을 사용하여 건물의 인상이 당당하고 활달하다. 다듬은 자연석을 정갈하게 쌓아 올려 높은 죽담을 조성하고 역시 자연석으로 초석을 놓았다.

지붕의 형태는 팔작집으로 평면의 구성은 왼편부터 부엌 1칸, 앞퇴가 있는 방이 2칸, 대청 2칸을 구성하고, 이어 2칸 통의 건넛방, 'ㄱ' 자로 꺾이는 동쪽 날개에 2칸의 홑 겹방과 반 칸의 내루(內樓)를 배치했다. 반 칸 크기인 내루는 기둥 밖으로 다시 반 칸을 돌출시켜 결국 1칸의 크기인데 이곳에도 난간을 만들어 마무리했다.

이 부분의 구조는 이 집의 특색으로 내루 처마에는 겸암정강수계를 적은 현판이 걸려 있다. 강수계의 내용은 강도수덕(도리를 강론하고 덕을 닦는다), 강신수의(믿음을 강론하고 의리를 닦는다), 강척수의(친족의 도리를 강론하고 우의를 닦는다)이다.

특히 안채 내루와 겸암정사 사이의 간격에 낮은 맞담을 쳤고 산의 작은 돌과 기와편으로 무늬를 구성한 토담으로 중앙에 일각문을 내고 이곳을 통해 안채의 내정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했다.

△겸암정사와 관련된 역사적인 인물은 있는가

- 류운룡(1539~1601)이 있다. 자는 응현(應見)이고 호는 겸암(謙菴)이며 본관은 풍산이다. 황해도 관찰사 입임(立巖) 류중영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안동 김씨다.

심학연원(心學淵源)의 적통인 류운룡은 목민관의 귀감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의 아우인 서애 류성룡과 함께 하남백숙(河南伯叔)이라 불리는 그는 슬기롭고 총명해 15세에 퇴계 문하에 나아가 수학했다. 퇴계는 겸암의 학문적인 자질을 아껴 자주 글로써 칭찬하고 격려했다고 전한다.

선생은 34세에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음직인 전함사별좌(典艦司別坐)로 벼슬길에 나간 후 의금부도사와 인동현감을 거쳤다.

인동현감 재직 시에는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무덤 뒤에 오산서원(吳山書院)을 창건하고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를 세워 충절의 기풍을 높이는데 일조했다고 전한다.

지주중류비는 구미시 오태동에 세워져 있다. 지주중류란 중국의 백이숙제(伯夷叔齊) 묘에 쓰여 있는 문구로 지주란 황하 중류에 있는 산 이름이다. 옛날 중국의 우(禹) 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 지주산을 깨뜨려 하수(河水)를 통하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임진왜란 때는 풍기군수로서 의주의 행재소까지 정조문안사를 파견하고 군국편의소를 올리기도 했다. 군국편의소의 내용 중에 죽령(竹嶺)을 요새화하는 방안을 거론해 당시에 커다란 주목을 끌기도 했다.

또 류영(1687~1761)이라는 인물이 있다.

자(字)는 덕유(德遊), 호는 양진당(養眞堂)으로 겸암 류운룡의 6대 손으로 현감을 지낸 세철(世哲)의 증손이고 성신(聖臣)의 아들이다.

류영은 효성이 두터워 아버지가 만년 앞을 못 보자 아우들과 함께 밤낮 곁에서 모시며 몸소 온갖 시중을 들고 집안사람들을 시키는 법이 없었다고 전한다. 영조 4년(1728) 호서지방에서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 청주 등지가 함락되고 인심이 흉흉해지자 의병을 규합해 출진하기도 했다.

특히 문중사업에 힘을 쏟았는데 거듭되는 병란으로 유실되고 흩어진 겸암의 유고를 모아 겸암문집을 간행하고 풍산류씨족보를 처음으로 편찬 간행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종택과 능골에 있는 재사를 수리하고, 겸암정사가 오랜 풍우로 몹시 퇴락하자 옛 모습대로 복원했다.

명옥대

# 명옥대(鳴玉臺)

명옥대는 현종6년(1665)에 사림(士林)에서 옛날 퇴계 이황 선생이 후학들에게 강도(講道)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누각형(樓閣形) 정자(亭子)다.

고사찰인 봉정사 어귀의 좌측 석간수가 흐르는 계곡 건너 방형 일곽의 흙담속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는 정자이다. 봉정사의 동문에 여러 층으로 된 기암이 있는데 그 높이가 두어 길이 쏟아지는 것이 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장소이다.

′낙수대(落水臺)′였으나 육사형(陸士衡, 名 機)의 초은시(招隱詩)에 ′나는 샘이 명옥을 씻어내리네(飛泉漱鳴玉)′라는 글귀를 따라 ′명옥대(鳴玉臺′로 개칭했다고 한다.

60여년전에도 중수한 했는데 재목은 비교적 좋은 상태이고 기둥에 남아있는 흔적으로 보아서 뒤쪽 2칸은 방으로 꾸며서 있던 것을 후대에 지금과 같이 전면적으로 개방된 루마루 형식으로 개조한 것으로 판단된다.

봉정사를 찾는 불자들이 잠시 쉬어가는 휴게실 역할을 하고 있다.

(경북 안동시 서후면 태장2리 산 72-1번지)

낙암정

# 낙암정(洛巖亭)

낙암정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있어 절벽 아래로 낙동강 줄기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건물구조는 안동지역에 있는 일반적인 정자의 형태와 다를 바 없으나 난간기둥이 윗부분에 비해서 아랫부분이 짧은 것이 특징이다. 1451년(문종 1)에 배환이 처음 건립하였고 1813년(순조 13)에 중건했다. 1881년(고종 18)과 1955년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배환 공은 백죽당 배상지(裵尙志, 1351∼1413)선생의 아들로 태종(太宗) 1년(1401)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병조좌랑 등 직을 거쳐 황해·전라·충청도의 관찰사를 역임한 뒤 판진주목사(判晋州牧使)가 됐다.

주변은 깨끗하게 관리가 되고 있다.

(경북 안동시 남후면 단호리 2-1)

시북정

# 시북정(市北亭)

순천김씨 후손 김동렬이 소유, 관리하는 것으로 조선 선조 때 호조참판을 지낸 신빈(申賓)이 주택을 지으면서 대청을 정자식으로 건립한 것이었다.

지금은 정침(正寢)은 없어지고 대청만 남아 있다. 후에 주택이 김종영에게 양도되면서 그의 아호를 따서 정자를 시북정이라고 하였다. 규모는 정면 4간, 측면 2간 팔작와가로 돼 있다.

이 건물은 임진왜란때 호조참판을 지낸 신빈(申賓)공이 주택내 별도 건축한 정자이다.

그후 김종영 공에게 양도 돼 시북정이라 명명되었고 지금은 순천김씨 소유로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一'자형 목조 기와집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의 겹처마 형식이다. 5량가로 안동 지방의 전형적 정자 양식을 보인다.

현재는 제대로 손을 보지 않아 문짝의 문풍지가 너덜해지고 정자안에는 잡동사니가 뒹굴고 있어 후손들의 돌봄이 필요하다.

연로하신 할머니가 문간방에서 거주하면서 지키고 있다.

(경북 안동시 풍천면 구담리 468번지)

/김병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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