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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3.09.26 08:44:52
  • 최종수정2013.09.26 08:45:14
삼척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라면 죽서루를 들 수 있다.

죽서루는 '관동 제1루'라소 불리울 정도로 주변경관이 아름답다. 조선 중기의 화가인 겸재 정선의 그림이나 고려시대 이후 수많은 시인들의 작품에는 그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경회루는 단일 평면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누각으로, 태종 12년(1412)에 기존에 있던 연못을 확장해 만든 경회루는 왕이 신하들이나 사신들과 함께 큰 연회를 열던 곳으로 우리나라의 국난을 겪어온 산 증인으로 불리우고 있다.

# 죽서루

죽서루

관동팔경 가운데 유일하게 강가에 자리잡은 '죽서루'는 어느 시기에 누구에 의해 지어졌는지 알 수 없다.

고려 명종 때의 문인 김극기(金克己)의 죽서루 시(詩)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1190년 이전부터 이미 죽서루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현재의 누각은 조선 태종3년(1403) 삼척부사 김효손이 옛 터에다 새로 지은 이후 10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다.

죽서루는 객사(동헌)의 부속건물로서 접대와 휴식을 주목적으로 하는 '향연을 위한 누각'으로 기단과 초석없이 두리기둥 밑면을 그렝이질하여 자연암반 위에 직접 세운 것이다.

누각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연꽃으로 수놓은 연등천장이며, 우물마루가 끝나는 사면에는 계자난간을 세우고, 기둥 사이는 벽체나 창호없이 모두 개방했다.

또 처마는 겹치마,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정면 7칸, 장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지만 본래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좌우 각 1칸이 놓인 공포의 모습이 다르고, 또 내부 천장에 있어서 측면 밖으로 나와있던 도리의 뻘목들이 그대로 남아있음을 볼 수 있다.

죽서루라는 이름은 누각 동쪽에 대나무 숲이 있었고 그 속에 죽장사라는 절이 있어 죽장사 서편에 있는 누각이라 하여 죽서루라 이름지었다는 설과 죽죽선녀의 유희소가 있는 그 서편의 누각이라 하여 죽서루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누각 앞에 았는 '죽서루(竹西樓)'와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편액은 숙종41년 삼척부사 이성조의 글씨이고, 누각 안의 '제일계정(第一溪亭)'은 부사 허목의 글씨다.

김대화 삼척 문화원장 인터뷰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죽서루의 건립연대에 대해 김대화 삼척문화원장은 "죽서루는 삼척시내에 흐르는 오십천(五十川) 물줄기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절벽에 자리 잡고 있는 죽서루는 언제 누가 지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원종 때 동안거사 이승휴가 죽서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고 전하고 있어 그 이전에 지어진 것은 틀림없다"고 말했다.

죽서루의 역사에 대해 김 원장은 "조선 태종 때 삼척부사를 지낸 김효손(金孝孫)이 다시 지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그것만 해도 610년 전으로 당시 리모델링한 것"이라며 "이후에 여러 번 손을 보았으니 원형이 그대로 유지되었다고는 보기 어려울 것이다"고 전했다.

그는 "보물 제213호로 지정된 것이 1963년 초이니까 50년이 넘었다"며 "죽서루에는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비롯해 수많은 명사들의 시가 걸려 있는데, '關東第一樓(관동제일루)'라는 큰 액자는 숙종 때의 부사 이성조(李聖肇)가 걸어놓았다고 한다는 설과 조선 헌종 때 이규헌이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라고 써놓았다고 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죽서루의 특징에 대해 김원장은 "죽서루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기단(基壇)이나 초석(礎石) 없이 두리기둥 밑면을 자연암반 위에 그대로 올려놓았다는 점"이라며 "누각의 바닥은 우물마루로 짜놓았고, 천장은 연등천장(椽燈天障)이며, 우물마루바닥 바깥쪽으로는 계자난간(鷄子欄干)을 설치했고, 기둥과 기둥 사이는 창호나 벽체 없이 모두 비어있다"고 강조했다.

죽서루의 구조에 대해 "'루(樓)'라는 것은 사방이 막힘이 없고 마루를 다락과 같이 높여 지은 건축물을 일컫는 말이며, 죽서루의 죽서(竹西)는 누각의 동쪽에 죽장사라는 절과 죽죽선녀라는 명기(名妓)가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죽서루의 가치에 대해 김원장은 말을 아끼지 않는다.

"죽서루가 관동팔경 중에서 유일하게 바다가 아닌 강을 옆에 끼고 있으면서 제1루로 불리는 것은 오십천의 유유히 흐르는 맑은 물과 깎아지른 절벽 위에 걸터앉은 듯한 모습이 자연과 잘 어우져서 그런 것 아닌가 생각된다"며 "현재 죽서루 일대를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발굴조사가 진행중에 있고 이미 객사터 등 유적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그동안 삼척의 대표적 문화재이자 관광명소로 시민과 관광객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오던 죽서루가 역사문화공원으로 재탄생될 것으로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 경복궁 경회루

경회루

경회루는 단일 평면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누각으로 알려져 있다.

1층에는 돌기둥을 세우고 2층은 마루를 깔았다. 2층의 마루바닥은 가운데는 높고 주변은 낮은 3단 구조로, 중앙에 위치한 가장 높은 1단은 3칸, 한 뼘 아래의 2단은 12칸, 가장 낮은 바깥쪽의 3단은 20칸으로 되어있다.

이같은 구조는 주역(周易)의 원리에 기초한 것으로 중앙의 3칸은 천지인(天地人)을, 12칸은 1년 12달을, 바깥의 20칸에 세워진 24개 기둥은 24절기를 의미한다.

경회루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아있던 것을 1867년 고종 때 재건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때 청동으로 만든 두 마리의 용을 연못에 넣어 물과 불을 다스리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같은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경회루의 돌기둥과 석상에는 6.25 한국전쟁 당시의 총탄 자국이 선명하지만 다른 부분은 모두 건재하다.

경복궁 근정전 서북쪽 연못 안에 세운 경회루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의 경회루는 작은 규모였으나, 조선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면서 크게 다시 지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은 상태로 유지돼 오다가 270여 년이 지난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고쳐 지으면서 경회루도 다시 지었다.

연못 속에 잘 다듬은 긴 돌로 둑을 쌓아 네모 반듯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누각을 세웠으며, 돌다리 3개를 놓아 땅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이때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는 왕비의 침전 뒤편에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앞면 7칸·옆면 5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해 만든 공포는 누각건물에서 많이 보이는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태종 때에는 48개의 기둥에 꿈틀거리는 용을 조각하였으나, 다시 지으면서 지금과 같이 간결하게 바깥쪽에는 네모난 기둥을, 안쪽에는 둥근기둥을 세웠다.

경회루는 침전영역 서쪽에 위치한 연못 안에 조성된 누각이다. 외국사신의 접대나 임금과 신하 사이에 벌어지는 연회장소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경복궁 창건 당시는 작은 누각이었던 것을 태종 12년(1412)에 크게 연못을 파고 지금과 같은 규모로 만들었다. 그 후 성종 때 건물이 기울어져 다시 고쳐 지었는데 돌기둥에 용과 꽃 장식을 하여 화려하게 치장하고, 연산군 때에는 연못 안 인공섬에 만세산을 조성하고, 그 곳에 월궁을 꾸며 조화를 장식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모두 소실됐다.

한편 경회루 북쪽에 있는 하향정 정자에 대해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대표 혜문)가 철거를 요구하고 나서 관심을 끌고 있다.

이들은 지난 5일 "이승만 대통령이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경복궁 하향정에서 낚시하는 사진을 발견했다"며 "이승만 대통령이 경복궁에서 낚시를 위해 하향정을 건축했다는 소문이 사실로 확인된만큼 조만간 하향정 철거를 요청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향정은 경회루의 북쪽에 있는 정자로 광복 후 이승만(1875~1965) 초대 대통령이 경회루에서 낚시를 즐기기 위해 지은 건물이란 소문이 돌았다.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조선궁궐과 상관없는 하향정의 존치는 문화재보호법 제3조에 규정한 문화재 원형보존과 복원이란 대원칙을 무시한 행정행위라는 취지로 지난 5월 문화재위원회에 하향정 철거를 요구하기도 했으나 거절당했었다.

# 해암정

해암정

강원도 추암촛대바위 입구에 자리잡은 해암정은 삼척 심씨의 시조 심동로가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제자를 가르치며 생활할 때 지은 정자로 알려져 있다.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처음 짓고 조선 중종 25년(1539)에 심언광이 다시 지었다.

당시 심동로는 어려서부터 글을 잘 하였는데, 고려말의 혼란한 상태를 바로잡으려 노력하다가 권력을 잡고 있는 간신배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고향으로 내려갔다.

왕은 그를 말렸으나 노인이 동쪽으로 간다는 뜻의 '동로(東老)'라는 이름을 내려줘 동로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ㅤㅂㅡㅇ 옆면이 여덟 팔 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송시열이 덕원으로 유배되어 가는 도중 들러 남긴, '초합운심경전사(草合雲深逕轉斜)'라는 글이 유명하다.

/김병학기자

이 기획물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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