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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아름다움 자태와 기교 - 약천정과 청계정의 역사

연꽃·소나무·백사장과 어우러진 정자들 '최고의 장관'

  • 웹출고시간2013.09.15 19:21:01
  • 최종수정2013.09.26 08:46:08

약천정(왼쪽) 청계정

양천정과 청계정은 후손을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유희를 즐기기위해 축조된 다른 정자와는 의미가 다르고 후손들이 아직도 현지에 거주하면서 세가를 이루고 있을 정도다.

약천정 이라고 불리우는 정자는 삼척의 죽서루와 밀양의 영남루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후세를 위한 열정을 간직한 영양지역의 문화유산이다.

악천정과 청계정과 서석지에 대해 박종태 영양문화원장에게 듣는다.

# 박종태 경북 영양문화원장

△약천정의 역사는 어떠한가?

-영양군 수비면(首比面) 발리리(發里里) 618번지에 있는 이 정자는 영양군지 약천정기에 따르면 삼한공신 금자광록대부 판리부사(三韓功臣 金紫光祿大夫 判史府使)를 지낸 영렬공(英烈公)의 22세손인 약천 금희성(琴熙星)의 정자라고 기록돼 있다.

△약천정을 세운 금희정은 어떤사람인가·

금희정 선생은 1778년 수비면 발리리에서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총명효우 해 일찍이 글을 배웠으며, 경학과 문장이 뛰어나서 옥산서당에서 오랫동안 많은 문인 후배들의 양성에 전념했다고 전한다.

△약천정의 특징은?

-약천정은 자손에 의해 100여 년전에 세워졌으며 부근에는 계산운물(溪山雲物)과 화조풍연(花鳥風煙)이 경치가 좋아 오십천(五十川)의 석대 위에 위치한 수양산(首陽山)이 앞에 있고, 일월산의 쌍봉이 멀리 바라보이며 동으로는 검마산(劍磨山)과 울령산(蔚嶺山)이 높이 솟아 있어 이곳에 앉아보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또 서쪽으로는 옥목봉(玉木峯)이 보이고 남으로는 오로봉(五老峯)과 아미산(蛾眉山)이 둘러 있으며 정자 아래는 장수계(長水溪)에 흘러가는 적은 냇물이 있고 정자 앞마을에는 선생의 자손들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있어 세거지로 불리우고 있다.

이 정자는 북향으로 반곡(盤谷) 와구령(臥丘嶺)에 있는데 그 규모는 세간 겹집으로서 난간이 계단을 제하고 사방으로 둘러 있으며 앞면과 중간이 마루, 좌우가 방으로 건축됐다.

마루위에는 선생의 증손 금병규가 서울에 있을 당시 경대부와 사귀면서 정기와 제영(題詠)을 받아 편액을 많이 빛나게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약천정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 이 정자에는 옥목산하에 있던 옥산서당이 허물어진 관계로 옥당서당기, 옥산서당운 등도 있으며 약천정기는 철종조의 판서 정기회(鄭基會)선생이 지었다.

철종조 판서 이유승(李裕承), 판서 조병칠(趙秉弼), 참판 조병익(趙秉翊) 선생이 지은 정기중건기 등이 있으며 승지 박이양(朴彛陽) 선생이 쓴 영모재(永慕齋)의 편액과 승지 윤충구(尹忠求) 선생이 지은 약천정운이 있다.

또 지방출신인 남주 조승기(南州 趙承基) 선생이 지은 상양문이 있고 승지 겸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李始榮)선생의 친필인 약천정과 반곡정사라는 현판이 있다. 이 현판은 이시영 부통령이 21세때 글씨를 썼다고 하며 판서 이유승선생과는 부자지간이라고 전한다.

이 정자 원장 안에는 한 그루의 향나무가 삿갓모양을 이루고 있어서 정상에 향기를 풍기며 주위에 노송이 둘러 있어 정자를 더 한층 시원하고 경관을 운치있게 해주고 있다.

지난 1985년 8월 5일 도 문화재 자료 제78호로 지정됐다.

△청계정은 누구를 위한 정자인가?

-청계정(靑溪亭)은 영양군 청기면(靑杞面) 청기리(靑杞里)에 있는 것으로 문월당 선생의 둘째 아들인 우재(愚齋) 오익(吳瀷) 선생의 정자다.

오익은 1591년(宣祖 24年 辛卯) 영양(英陽) 대천(大川)에서 출생해 해월 황여일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자성이 후중하고 품행이 독실했다고 알려져 있다.

△청계정을 세운 이유는?

-오익이 수차례 과거시험에(科試)에 응시했으나 시운(詩韻)이 다른 사람을 뽑는 데에 불만을 품고 귀가한 후 과거를 봐서 벼슬하는 것을 버리고 세거(世居)하면서 부모에게 효도하였으며 형제간에는 우애가 있었다고 전한다.

그후 병자호란이 일어난 후 비분강개해 모든일을 자포자기하고 글을 쓰는 것으로 소일하며 지냈다. 당시 대명절의로 널리 알려진 표은 김시온 선생과 사귄 후 돈간제(敦艮齋) 가까운 곳에 정자를 짓고 못을 파서 고기를 기르며 나무를 심어서 휴식하는 곳을 만들어 청계정이라고 이름지었다.

△청계정의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청계정 앞에는 청계천 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앞산은 천일봉(天一峯)이라 하여 명현들이 놀던 곳이다.

선생은 이 곳에 살림 나온 후 자손들이 세거하여 화수촌을 이루고 있으며 정자에는 은행나무와 괴목이 경치를 더 좋게 하며 우재기(愚齋記)와 청계정기가 걸려 있으며 규모는 세간 겹집으로 동서 서실이고 중간에 마루로서 난간이 있다고 영양군 청계전기에 실려있다.

이 정자는 17세기 중엽에 지어진 건축물로 화려한 꾸밈이 없어 소박하지만 견실한 구조를 보여 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3대 정원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서석지에 대한 설명을 해달라

- 서석지는 담양 소쇄원, 완도 세연정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정원으로 불리우고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정원이다. 자세한 설명을 자료를 통해 설명하겠다. 영양을 찾으면 서석지와 선바위 관광지를 한번 찾아보시면 영원한 추억이 될 것이다.

# 서석지 경정

서석지

서석지는 정영방이 광해군 5년(1613)에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는 연못과 경정이라고 불리우는 정자가 있다. 자양산의 남쪽 완만한 기슭에 위치한 연못을 중심으로 경정·주일재·수직사·남문 등의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서석지는 담양 소쇄원, 완도 세연정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정원으로 불리우고 있다.

경정은 넓은 대청과 방 2개로 되어있는 큰 정자다. 주일재는 '운서헌'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는 서재이다. 주일재 앞에는 연못쪽으로 돌출한 석단인 '사우단'을 만들고 소나무·대나무·매화·국화를 심었다.

연못은 사우단을 감싸는 'U'자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 연못의 동북쪽 귀퉁이에는 산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도랑을 만들었고, 반대편의 서남쪽 귀퉁이에는 물이 흘러나가는 도랑을 만들었다.

각양각색의 형태로 솟아있는 연못 안의 크고 작은 돌을 '서석군'이라 하는데, 이 연못의 이름은 서석군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특히 돌 하나하나에 모두 이름이 있어 정영방 선생의 학문과 인생관은 물론, 은거생활의 이상적 경지와 자연의 오묘함과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심취하는 심성을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이종국(45)씨는 "이곳의 정자가 유명해 매년 찾아오곤 한다"며 "올해는 연꽃과 주면 풍광이 잘 어우러져 최고의 경치를 자아내고 있다. 영양에 이같은 좋은 정자가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경북 영양군 입암면 서석리)

#월송정

월송정

월송정(越松亭)은 광동팔경의 제1경으로 고려시대 시인가 묵객들이 즐겨찾았다고 전해진다.

퇴락했던 것을 조선 연산군때 강원도 관찰사 박원종이 중건햇으나 다시 황폐해져 1933년 이 마을 사람 황만영과 전자문 등이 중건했으나 일제 말기에 이곳에 주둔한 일본군에 의해 철거돼 터만 남아있었다.

그후 1969년 재일교포로 구성된 금강호의 후원으로 2ㅊㅇ 콘크리트 건물이 새로 세워졌으나 원래의 모습과 너무 달라 해체하고 1980년 현재와 같이 세웠다.

이 정자는 사선이라고 물린 신라시대 영랑 술랑 남석 안상 등 네 화랑이 유람했다는 설화가 남아있다.

만 그루의 소나무가 4km 가 넘는 흰모래와 잘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월송이라는 이름은 사선이 달밤에 송림에서 놀았돈 데서 유래됐다고 전한다. 또 월국에서 솔씨를 가져다 심어서 월송정이라고 불리운다고 전한다.

바로 앞에 보이는 바닷가는 모래가 고운 백사장이 널려있어 최고의 경치를 보이고 있다.

진소영(여.29)씨는 "월송정이 소나무와 잘 어우러져 진풍경을 보이고 있다"며 "그러나 정자에서 웃옷을 벗은 채 누워서 낮잠자는 모습을 보니 흉하다. 모두 다 같이 조심스럽게 사용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망양정

망양정

망양정은 경북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로 산포리의 뒷산 정상부에 위치해 있고 정자 아래에는 망양해수욕장이 있다.

망양정은 정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다포양식 건물로 지붕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이은 것으로 평면에는 통칸 통칸의 우물마루를 깔았고 전후 좌우에는 계사난간을 두른 누마루 형식이다.

망양정은 관동팔경의 하나로 기성면 망양리 해안에 처음 세워졌으나, 1471년(성종 2)에 평해군수 채신보가 현종산 기슭에 옮겨놓았다고 전한다.

그후 1517년(중종 12)에 비바람으로 정자가 파손되자 다음해 안렴사 윤희인(尹希人)이 울진군수 김세우와 협의해 중수했다고 한다.

1592년(선조 23)에 평해군수 고경조가 다시 중수하고 숙종이 안원군 편액을 보내 걸어 놓았다.

이후 1854년 울진현령 신재원과 군승 남치붕이 망양정을 이축할것을 의논하고 향회에 제안하여 둔산 해안봉을 이축장소로 정하였으나 추진하지 못하다가 1860년(철종 11) 울진현령 이휘호가 군승 임학영과 함께 근남면 신포리 둔산동으로 이전했다.

망양정이 오래되어 피폐된 것을 1957년 울진군 및 울진교육청의 주선으로 보조금과 함께 목재를 기증받아 보수를 했고 1979년에 보수 정화를 실시했으나 1996년에 정자가 15도쯤 기울어져 도.군비로 기둥 및 부식된 부분을 교체했다.

이후 북부권 문화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2005년 완전 해체하고 새로 지었다고 한다.

망양정의 현판은 전임군수였던 이태영이 쓴 것으로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 조선 숙종이 하사한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편액과 시, 아계 이산해의 시, 송강 정철의 시 등이 정자 안에 걸려 있다.

망양정은 수차례에 걸친 중수와 이건, 경북 북부권 문화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새로 지어져 문화재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전한다.

(경북 울진군 근남면 삼포리)

/김병학기자

이 기획물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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