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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부일의 수필로 찾아가는 문화유산 - 석굴암(上)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세계속 한국문화유산

  • 웹출고시간2010.09.09 18:56:47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구름을 토한 산허리 석굴암

석굴암 가는 길

ⓒ 석굴암 홈페이지
석굴암에 오르는 길은 역사의 한 처럼 비탈에 매인 험준한 굽이 길이다.

이 길 따라 곡예사처럼 오르니 높은 산허리에 넓은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다.

산등선에서 부는 바람여서 인지 주차장이 온통 바람의 소리였다. 바람을 안고 앞 계단 위 매표소에서 매표를 하고 오르니 흙길이 이어진다.

이 길 따라 억새와 낙엽의 길, 솔 바람소리에 귀를 맡기고 오르면 석굴암 마당 감로수가 나온다.

여기에서 좌측 계단 따라 오르면 계단 옆에 돌무덤 석재들이 쌓여 있는데 일제가 석굴암을 해체, 복원 할 때 석굴암의 원 자재를 기술 부족으로 조립하지 못하고 남긴 석재들 이다. 이 돌 대신 시멘트로 공사하여 석굴암의 원형을 잃었다.

원형을 잃은 서글픈 마음에 오르면 기와집 앞을 가린 석굴사원 석굴암이다.

석굴암은 국보 제24호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이다.

◇김대성의 창건 설화

국보 제24호 경북 전주시 진현동 891 석굴암

ⓒ 석굴암 홈페이지
석굴암은 신라의 재상이던 김대성이 현생의 어머니와 전생의 어머니를 위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을 세웠다한다.

대성은 아주 가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인 대성은 어머니와 열심히 품을 팔아 전답을 조금 사서 열심히 살았다. 어느 날 흥륜사 스님이 탁발을 와서 전답을 부처님께 받치면 이승에서 못한 일이 저승에서 이루어진다며 시주하기를 권하였다. 이 말을 들은 대성이와 어머니가 선뜻 시주를 약속하였다. 그 후에 대성이가 시름시름 앓다 그만 죽고 말았다.

대성이 죽던 그날 밤 신라의 국상 김문량에게 밤하늘에서 < 모량리의 대성이를 네 집에서 태어나게 할 것이로다>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후 김문량의 아내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 아기가 왼손을 꼭 쥐고 펴지를 않더니 이래만에 손을 폈는데 " 대성 " 이라고 새긴 점이 있었다. 그래서 이름을 대성이라 지었다 한다.

대성이 벼슬길에 올라 있던 어느 날 토함산에서 곰 한 마리를 사냥 했다. 그날 밤 꿈에 곰이 나타나 <네가 나를 죽였으니 그 원수를 갚 겠다> 하고 곰이 덤벼들어 겁에 질린 대성이 용서를 빌었다. <그러면 나의 명복을 위하여 절을 세워 주겠는냐> 하여 절을 지어 주기로 약속하고 꿈에서 깼다.

대성이 곰을 사냥한 것을 후회하여 곰을 위해 웅(장)수 사를 짓고 가난했던 전생의 어머니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생의 어머니 김문량의 아내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헤 진다.

그 후 석굴암에 당대의 고승 표훈, 선사를 두어 전생의 어머니 명훈을 빌고 불국사에 신림을 두어 위령케 하였다한다.

◇하늘에 뜬 석굴암

동해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해발 565m 토함산 자락에 위치한 석굴암.

석굴암은 흙길 따라 오르면 동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해발 565m 토함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이 석굴암은 752년 신라 35대 경덕왕 11년 불국사를 창건한 김대성이 창건 하였다한다. 창건 년대가 없이 내려오다가 조선 숙종 때 김시한이 석굴암을 답사하고 보았던 석굴암의 그때 그대로의 모습을 일기에 남겨 근대의 역사가 되었다.

그 후에 두 차례 중수되고 조선 말 울산병사 조순상이 대 수리하여 오다가 일제가 해체 공사를 했다.

이때 수리 중 콘크리트로 공사를 하여 자연스럽게 들어왔던 바람 햇살을 차단하여 큰 지장을 초래 하였다. 굴 내부에 비가 새고 습기가 서려 재 보수 하였지만 성공치 못하고 이어져 오다가 1962년부터 64년까지 누수와 침수 방지 및 결로 방지를 위한 해체 복원공사를 하였다.

그러나 콘크리트에 붙은 원석을 해체하지 못하고 전실을 복원하면서 목조건물을 앞에 세워놓고 유리문으로 석굴암을 밀폐 옆에 환 풍 장치를 설치 인위적으로 공기를 순환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한다.

태양 따라 실내외 명암이 달라지던 본존불 상이 입체적 조명 따라 온 누리에 빛을 냈다. 그러나 지금은 빛을 잃고 전구의 조명이 비춰주어 안타깝기만 하다.

이 안타까움에 석굴암내의 과학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석굴 내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과학의 원리 석굴암


석굴암은 병풍처럼 있는 암벽을 배경으로 하여 앞에 평평하게 터를 닦고 그 위에 석재를 조립한 후 흙을 덮어 굴처럼 보이게 한 석굴속의 사원이다.

석굴암 입구를 들어가면 네모난 공간에 원형의 주실 로 설치되었다. 본존불 앞뒤 두 곳에 석탑이 1기씩 안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져 버렸다.

인왕상과 사천왕상 등이 벽면에는 보살 제석 상을 화강암에 살아 있는 듯 조각하여 놓았다.


석굴암 입구에 사천왕 금강역사 등이 부조되어 있음을 일반 사찰의 입구를 상징 한다.

석굴 전실에 들어가면 벽면 좌우에 4채의 팔부신이 마주보며 서있고 금강역사가 한 채 서있다. 이를지나 석굴암 원 실의 통문 비도로 들어가는데 양측 벽면에 사천왕이 길을 인도하여 준다.

비도를 지나 석실 부처님의 세계로 중앙 본존불을 빙 돌아 전면에는 제석천, 문수 보현보살이 있으며, 양쪽에 5명씩 10대 제자를 조각하고 본존불 뒷면 중앙 11면 관음보살을 가운데에 두었다.

이 둘레 위에 열개의 감실이 있고 감실 속에 보살 나한상이 여덟 구가 배치되어 있는데 두 감실에 배치되어 있는 부처님과 본존불 앞 탑이 일인에게 도난당하여 가슴이 아프다.

천정은 궁륭형 별자리 하늘 모양으로 가운데에 아름다운 연꽃 판을 덮었고 전실 가운데에서 보도록 하여 본존불 머리 후 면벽에 큰 연꽃으로 된 두광을 두었다. 참배할 때 두광이 본존불 머리 같이 알맞도록 붙여놓은 것이다.

◇38체의 작품이 하나의 예술로


석굴사(석굴암)에는 38체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모두가 국보 24호로 지정 되어 있다. 석굴암의 미술, 조각, 과학의 오묘한 진리가 있는 곳이다.

전실내의 팔부신상은 고대 인도의 악귀들인데 부처님의 설법으로 부처님께 귀의하여 본당 입구를 지키는 신들이란다.

또한 팔부신상 옆에 금강역사는 부처님의 정법을 지켜주는 외호 신으로 허리에만 옷을 걸치고 있으며 용맹과 날램을 표현하는데 한쪽은 입을 벌리고 또 한쪽은 입을 다물고 있다. 이를 아, 흠이라 하는데 모든 법의 최초와 최종을 상징한다고 한다.

다시 전실에서 원 실로 통하는 길, 비도 앞의 사천왕을 바라보면 동서남북을 지키며 불국으로 가는 불자들을 보호하는 사천왕들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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