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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0.05.27 17:19:36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 대웅보전의 비로자나 부처님

만세루 앞에 보물 290호인 대웅보전이 서있다.

대웅보전은 맞배지붕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법당이다.

이 대웅전을 조선 광해군 때 중창하였는데 현종 때 큰 비로 오른쪽 2칸이 무너졌다. 이듬해 보수하여 오다가 1973년 완전 복구수리를 하였다 한다.

법당 안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앙에 안치하고 좌우 협시로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모셔져 있다.

일반적으로 비로자나불을 주존 으로 모시면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을 좌우 협시로 모시고 대웅보전이라는 전각의 이름을 붙이는데 선운사는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를 모셔 대웅보전의 명칭을 붙었다.

중앙의 주존불 비로자나불이 천개의 꽃잎을 가진 연꽃 좌대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계시다.

수인은 좌우 두 손 모두 엄지를 손에 넣고 주먹을 진 다음, 왼손 집게손자락을 펴서 바른 손으로 감싸 쥐고, 바른 손의 엄지손가락과 왼손의 집게손가락 끝을 서로 대는 손 모양을 취한 지권인을 하고 있다.

지권인은 무언에 설법으로 그대의 불성을 보라. 모든 것은 원래부터 둘이 아니다. 그 어느 것도 불성을 떠난 것이 없다. 그 무엇도 불성을 물들이지 못한다. 오직 불성으로 깨어나 그대의 불성을 보라라는 비로자나 부처님이 설법한다는 수인 이다.

부처님이 앉은 좌대의 천엽연화의 꽃잎 하나하나는 백억의 국토를 표현 한 것으로 비로자나불이 계신 공덕세계 무량광대 장엄함이 헤아릴 수 없는 연화장의 세계를 말한단다.

삼존불단 뒷벽 3칸 벽에 직접 그린 탱화가 비로자나, 약사, 아미타불 불단과 삼존불이 일치한다.

대웅보전 앞쪽 천장 양 옆 넓은 공간에 힘차게 약진하는 용으로 가득 채웠다. 이는 선운사 창건 설화 용추 못의 상징이 아닌가 생각 된다.

대웅전에서 나와 정면 앞 소맷돌 계단을 내려오니 6층 석탑이 서있다.

원래는 9층탑이었으나 3층이 없어지고 6층이 남았는데 기단부와 상륜부에 새로운 석재가 끼어있어 아쉽다. 이 석탑은 비례 감각이 알맞은 고려 풍의 탑으로 전해진다.

◇ 관음전에 지장보살이

탑 왼 쪽에 마을 집같은 요사채 관음전이 조그마하게 있다. 전각과 전각 사이에 끼어 있던 위치 때문에 관음전의 현판을 내건 것 같다.

관음보살이 모셔져야 할 관음전에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안에는 보물 제 279호인 아름다움으로 이름이 난 지장보살이 넓적하게 살찐 얼굴, 작은 눈, 코, 입이 얼굴 가운데 몰려 있고 목이 짧은 중년 여인처럼 통통한 몸매를 하고 있다. 몸을 감싼 옷주름이 매우 두텁고 장식적인 수법으로 보이며 전체적으로는 고려 말이나 조선 초의 보살상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이 지장보살을 일인이 훔쳐 가져갔던 것을 1940년에 다시 찾아 모셨다. 다행이 찾았지만 이를 찾지 못했다면 상처 난 선운사였을 것이다.

조선 성종이 선운사를 왕실의 원찰로 삼아 승하하신 윗대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지장보살과 삼장을 모시고 중창불사 하였다고 한다.

또한 관음전 한쪽 벽면에 팔상전에서 모셔야할 팔상탱화 한 폭이 걸려 있고 지장상의 오른쪽에 대웅전의 삼존불 앞에 놓았던 불상의 칭호를 적은 장식물과 자그마한 보살상들이 옮겨져 있다. 왼쪽으로 명부전에서 옮겨온 동자상과 숙종 때 명심 암의 명파대사가 주선하여 펴낸 "석씨 원류"를 새겨 만들은 목판이 있다.

◇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찾아 온 석씨 원류

전북 유형문화재 14호인 '석씨원류'

석가모니의 일대기 등을 기술

정유재란으로 본당을 제외한 당우가 모두 불탔는데 "석씨 원류" 가 일부 소실되고 일부 일인이 가져 간 것을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석씨 원류" 한질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석씨 원류는 인조 26년 최서룡, 해운법사가 4권 406장으로 복간하여 상단에 삽화를, 하단에는 내용을 새겨 놓았다.

모두 409개의 목판 삽화는 조선시대 삽화 중 가장 걸작으로 전북 유형문화재 14호로 지정되어 보관되어 있다.

◇ 16나한을 모신 나한전

관음전의 진기한 보물 속에 나와 영산 전으로 갔다.

영산 전은 태학대사가 숙종 때 이층 장육 전으로 중창하여 오다가 백년 만에 기울어져 순조 때 단층으로 복원하여 세웠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크기가 다른 돌들을 적당히 다듬어 축대를 싼 건물이다.

장육 전에 모셨던 석가모니 부처님과 미륵, 재화 갈라 양 보살과, 16나한상을 모셔 영산회상을 이루고 있는데 2층 때 장육 전에 비하여 영산 전이 좁아 답답해 보인다.

◇ 산신각과 명부전

영산 전에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석축을 오르면 산신각으로 안에는 호랑이와 노인모습과 산신상을 봉안 하거나 탱화로 그림만 모시기도 한다.

산신은 요마를 물리치는 가람수호신 기능과 산속 생활의 평온을 비는 외호신을 받드는데 우리 민속 신앙과 불교가 접목된 신앙으로 부와 복을 받고 질병 없이 부귀장수를 누리게 하는 전각이다.

산신각에서 밑으로 내려오면 전각의 끝이 명부전이다.

명부전에는 지장과 도명존자 무독, 귀왕의 삼존과 시왕 상 사자판관 인왕상이 줄 지여 있어 자신도 모르게 명부전 분위기에 심체 되어 자신도 모르게 합장이 된다.

◇ 노을 속에 핀 동백꽃

명부전의 분위기와 달리 대웅보전 뒤쪽에 천연 기념물 제184호인 동백나무가 수령 500년을 자랑하며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 늪 15,000여 평에 300여 그루의 동백꽃이 피고 진다.

해마다 5월 만개했던 꽃이 떨어질 무렵이 되면 선운사 뒤뜰에 단을 차리고 축을 지어 올리는 동백 연과 검단, 학명, 백파, 영호 등 대승을 기리는 보은에 제를 고창 군민이 들인다.

동백꽃이 질 때는 꽃송이 몸체가 떨어져 시신처럼 느껴 흘러간 인생의 무상함이 아인가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동백꽃은 슬픔의 상징이다. 섬마을에 이별이 있다면 꼭 동백꽃을 뒤에 두고 이별을 한다.

선운사에서 바다가 멀다. 누가 이곳에 오백여 연전 삼백여 그루의 동백을 심었을까? 생각하니 진리와 참선으로 떠나간 선사들을 위하여 후일에 스님들이 심어 놓은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와는 아무 관계없이 남해에서 동백 한 그루를 구하여 화분에 심었다. 동백꽃은 왕성했지만 꽃은 피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도 피지 않아 바다가 있는 곳에서 자란 동백은 염분이 필요 할 것이라 생각되어 접시에 선운사 부근 곰소에서 사온 천일 소금을 올려놓았다. 며칠 후 신기하게 다수의 동백꽃이 피였다. 보은 천일염이었던 선운사와 동백은 우연이 아닌 불가의 만남이 아닌가 생각해 보며 동백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노을에 보이지 않는 동백 새들이 둥지를 틀어 울고 있는 소리는 완전한 오케스트라 이였다.

◇ 진흥 굴 주위에 핀 상사화

새소리를 들으며 노울 따라 낙조대가 있는 도솔 암으로 발길을 옮겼다.

마치 인간 세상에서 하늘로 오르는 기분이다. 사람이 입을 다물면 자연이 입을 연다는 진리처럼 호젓한 산길, 나무 숲, 이름 모를 새, 물소리가 선경을 이루고 있다.

산길 따라 오르면 지명을 따 장사 송이란 이름의 소나무가 한그루 서있는데 한 줄기에서 여덟 가지를 위로 뻗은 천연기념물 해묵은 반송이 서있다.

여기서 조금 오르면 신라 진흥왕이 수도했다는 진흥 굴이 나온다.

진흥굴은 불교에 심취한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도솔왕비, 중애공주와 더불어 선운사 진흥굴에 와서 기도를 올렸다는 굴이다.

근방에 그리움 있는 상사화가 늦은 봄을 장식 한다. 꽃이 피면 잎이 지고 꽃이 지면 잎이 나는 운명으로 꽃과 잎은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그림이 있는 이별이란다. 동학군이 관군과 전투를 하다가 몰살을 당했다 하는데 이 곳의 상사 꽃들은 그들이 서로 죽음으로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넋이라 한다.

◇ 낙조에 빛인 도솔암

도솔암 마애불 (보물 1200호)

여기서 오르면 도솔암 주차장이고 가파르게 오르면 검단 선사가 창건한 지장 기도의 요람 도솔 암이다. 암자 마당에 서있는 고목나무가 몸은 비록 썩었지만 청조한 나무 가지에 잎을 달고 나한전, 요사채 겸 종무소를 바라보고 있다.

나한전을 지나 깎아지듯 한 절벽에 거대한 마애불이 음각 되어 있다.

동불 암 마애불이라 부르기도 하는 바위 양쪽에 칠송대 소나무가 바람 따라 승무, 바라춤을 춘다.

보물 1,200호로 가로 3m에 높이 7m 쯤 되는 이 마애불 앞에서 동학도 대장인 전봉준, 그를 보좌한 총관령 김개남, 손화중 등이 술잔을 높이 들어 맹약한 맹약 글을 마애불 가슴속에 복장해놓고 사나이 길을 떠나 역사 속으로 간 곳이란다. 동학도 들이 모여 결사한 것은 미륵이 출현으로 민심을 모으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불상 가슴 가운데 부분을 때어냈다.

마애불 옆 나한전을 지나 가파른 좁은 바위틈 돌계단 오르면 바위 한편을 의지해 자리 잡은 상 도솔암 이다.

'도솔천 내원궁'이란 현판을 달고 있다.

도솔천은 칠보를 단장한 외원 내원궁이 있고 미륵보살이 천인들과 함께 살고 있는 육계의 하늘 중 넷째 하늘이다.

도솔천 현판과는 달리 보물 제280호인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다.

이는 선운사 관음전에 지장보살을 모신 차원이 아닐까 생각된다.

상 도솔 암에서 왼쪽을 아슬아슬하게 오르면 오를 때와 달리 바위가 평지처럼 펼쳐져 있다

그 위에 신선암이 구름 속에 떠서 장군봉, 만월대를 가슴에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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