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지역 주류업계 관계자가 민족의 성산(聖山) 백두산에 올라 '3·1운동 100주년 기념' 퍼포먼스를 펼쳐 눈길을 끌고 있다. 충북소주 박지헌(54) 부문장은 지난 21일 백두산 천지 정상에 올라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경축 퍼포먼스를 펼쳤다. 박 부문장은 지난 18일 청주공항을 출발해 중국 길림성 연길공항과 이도백하(二道白河)를 통해 서파산문(西坡山門)을 지나 눈과 비를 헤치고 백두산 천지 정상에 올랐다. 박 부문장은 구름에 가려 좀처럼 만나기 힘든 천지를 앞에 두고 '나의 조국 대한민국 사랑합니다'라는 글귀가 적힌 현수막을 꺼내 들었다(사진). 박 부문장은 "3·1 독립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경축한다"며 "국민들에게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등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퍼포먼스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일본의 상징인 후지산 정상에 올라 일본 정부에 진심어린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애국(愛國) 퍼포먼스'를 펼치고 싶다"고 덧붙였다. / 성홍규기자
[충북일보] 충북을 대표하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흉상이 오는 11월 공개된다. 도는 충북 여성독립운동가 흉상 제작·전시 사업을 위해 최근 흉상 제작 대상인 독립운동가 11명을 확정했다. 흉상으로 만나게 될 독립운동가는 △박재복(1918~1998·애족장) △신순호(1922~2009) △어윤희(1880~1961) △오건해(1894~1963) △윤희순(1860~1935) △이국영(1921~1956) △임수명(1894~1924) △연미당(1908~1981) △박자혜(1895~1943) △신정숙(1910~1997) △이화숙(1893~1978) 등 애족장 또는 애국장을 추서받은 11명이다. 이들은 본적이나 연고가 충북인 자들이다. 박재복은 군시제사 주식회사 대전공장에 근무하며 반일적인 말을 수 차례하는 등 항일의식 고취하는 데 노력했다. 신순호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해 한중 합동으로 항일 운동을 전개했고 한국광복군 창립 후에는 여군으로 활동했다. 어윤희는 개성 성경학원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 2천여 장을 교부받아 각거리에 배포하다가 체포됐다. 서대문형무소에서는 유관순과 3·1운동 1주년 기념투쟁 감행했다. 오건해는 남편 신건식 선생, 딸 신순호, 사위 박영준 등 온 가족이 독립운동 참여했다. 윤희순은 의병이 일으켰을 때 '안사람 의병의 노래'를 지어 부녀자들이 부르게 해 여성의 독립정신 고취시켰다. 또한 군자금을 모아 의병에게 제공해 의병활동을 뒷받침했다. 이국영은 중국 중경에서 한국혁명여성동맹 가입,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항일운동 전개했다.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생계부 부원으로 활동했다. 임수명은 통의부 군사위원장인 신팔균과 결혼한 후 북경으로 망명한 비밀문서 연락 등 독립운동을 도왔다. 연미당은 한국광복진선청년 공작대 한국애국부인회 조직부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적 선전위원회등에서 활동했다. 박자혜는 조선총독부 부속병원의 조산원 및 간호원들을 동원하여 독립만세를 주도하고 국공립병원의 동료들을 포섭하여 태업을 주동하다가 피체 투옥됐다. 이후 중국으로 탈출하여 신채호와 결혼하고 남편의 광복 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신정숙은 광복군에 입대해 징모처 제3분처위원 및 회계조장 등으로 활동했고 여성 독립투사로서 대적 공작 활동을 했다. 이화숙은 통합정부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대한 민족 대표 30명 중의 일원으로 참여, 임시정부의 국무원 참사로 임명됐다. 대한적십자회 상의원 상해 대한애국부인회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전시관에는 흉상과 함께 활동상도 전시될 예정으로 도는 전시관 개관 목표일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로 정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21일에는 전시관이 조성될 청주시 상당구 충북미래여성플라자에서 충북여성독립운동가 흉상 제작 자문회의를 열어 추진상황을 점검했다. 도 관계자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도내 선열들의 숭고한 민족정신을 기리는 기념사업이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며 "여성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흉상 제작·전시를 통해 순국선열들의 독립운동 정신을 되새기는 자리가 마련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 안혜주기자 박자혜 - 신순호 - 신정숙 - 어윤희 - 연미당 - 오건해 - 윤희순 - 이국영 - 이화숙 - 임수명 - 박재복(대체) - 충북 여성독립운동가 흉상 11월 17일 '순국순열의 날' 공개된다 박재복 등 충북 출신·연고자 11명 선정 (인물사진 첨부-박재복은 사진이 없습니다) 충북을 대표하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흉상이 오는 11월 공개된다. 도는 충북 여성독립운동가 흉상 제작·전시 사업을 위해 최근 흉상 제작 대상인 독립운동가 11명을 확정했다. 흉상으로 만나게 될 독립운동가는 △박재복(1918~1998·애족장) △신순호(1922~2009) △어윤희(1880~1961) △오건해(1894~1963) △윤희순(1860~1935) △이국영(1921~1956) △임수명(1894~1924) △연미당(1908~1981) △박자혜(1895~1943) △신정숙(1910~1997) △이화숙(1893~1978) 등 애족장 또는 애국장을 추서받은 11명이다. 이들은 본적이나 연고가 충북인 자들이다. 박재복은 군시제사 주식회사 대전공장에 근무하며 반일적인 말을 수 차례하는 등 항일의식 고취하는 데 노력했다. 신순호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해 한중 합동으로 항일 운동을 전개했고 한국광복군 창립 후에는 여군으로 활동했다. 어윤희는 개성 성경학원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 2천여 장을 교부받아 각거리에 배포하다가 체포됐다. 서대문형무소에서는 유관순과 3·1운동 1주년 기념투쟁 감행했다. 오건해는 남편 신건식 선생, 딸 신순호, 사위 박영준 등 온 가족이 독립운동 참여했다. 윤희순은 의병이 일으켰을 때 '안사람 의병의 노래'를 지어 부녀자들이 부르게 해 여성의 독립정신 고취시켰다. 또한 군자금을 모아 의병에게 제공해 의병활동을 뒷받침했다. 이국영은 중국 중경에서 한국혁명여성동맹 가입,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항일운동 전개했다.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생계부 부원으로 활동했다. 임수명은 통의부 군사위원장인 신팔균과 결혼한 후 북경으로 망명한 비밀문서 연락 등 독립운동을 도왔다. 연미당은 한국광복진선청년 공작대 한국애국부인회 조직부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적 선전위원회등에서 활동했다. 박자혜는 조선총독부 부속병원의 조산원 및 간호원들을 동원하여 독립만세를 주도하고 국공립병원의 동료들을 포섭하여 태업을 주동하다가 피체 투옥됐다. 이후 중국으로 탈출하여 신채호와 결혼하고 남편의 광복 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신정숙은 광복군에 입대해 징모처 제3분처위원 및 회계조장 등으로 활동했고 여성 독립투사로서 대적 공작 활동을 했다. 이화숙은 통합정부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대한 민족 대표 30명 중의 일원으로 참여, 임시정부의 국무원 참사로 임명됐다. 대한적십자회 상의원 상해 대한애국부인회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전시관에는 흉상과 함께 활동상도 전시될 예정으로 도는 전시관 개관 목표일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로 정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21일에는 전시관이 조성될 청주시 상당구 충북미래여성플라자에서 충북여성독립운동가 흉상 제작 자문회의를 열어 추진상황을 점검했다. 도 관계자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도내 선열들의 숭고한 민족정신을 기리는 기념사업이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며 "여성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흉상 제작·전시를 통해 순국선열들의 독립운동 정신을 되새기는 자리가 마련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 안혜주기자
[충북일보=옥천] 정지용(1902∼1950) 시인의 옥천 생가 앞에는 큰 돌다리 하나가 놓여 있다. 이 돌다리(길이 575×폭 112×두께 33㎝)가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의 민족성을 말살하는 동시에 일제에 충성을 강요하는 내용의 맹세문이 적힌 '황국신민서사비'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별로 없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 조차도 그냥 돌다리가 있어 무심코 밟고 다닐 뿐이다. 옥천군은 이 돌다리가 '황국신민서사비'였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 원형 표지석을 최근 만들어 설치했다. 군에 따르면 '황국신민서사비'는 이 지역의 옛 창명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에서 발견된 것이다. '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입니다.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등의 내용이 일본어로 새겨져 있다. 일제는 1937년부터 패망한 1945년까지 학교는 물론 관공서, 회사에서 매일 조회 때 이 맹세문을 외우게 했다. 광복 후 글씨가 잘 안 보이게 지워진 이 비석은 '통일탑'으로 불리다가 1993년에야 일제 강점기 때의 잔재라는 게 알려졌다. 옥천군은 이듬해인 1994년 이 비석을 정지용 생가를 찾는 방문객들이 밟고 지나갈 수 있게 돌다리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돌다리에 대한 정보나 안내문은 그동안 없었다. 옥천군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지난 14일 자세한 설명이 담긴 오석 원형 안내판을 만들어 설치했다. 이 안내 표지석에는 "이 다리는 일제 강점기인 1940년대 옥천 죽향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황국신민서사비'다. 광복 후 글자를 지우고 통일탑으로 사용되다 1994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일제 강점기 일본이 우리 학생들에게 충성 맹세를 강요한 내용이 새겨졌던 비로,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를 되새길 수 있는 자료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강종문 관광개발팀장은 "일제 강점기 때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문화유산이 읍내에 많다"며 "군민들이 아픈 역사를 교훈 삼을 수 있도록 표지석 설치를 늘려가겠다"고 말했다. 옥천 / 손근방기자
[충북일보=충주] 충북북부보훈지청은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선정한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규식(1881.1.29~1950.12.10)·김순애(1889.5.12~1976.5.17) 선생 부부를 홍보하고 나섰다. 김규식 선생은 1881년 1월 아버지 김지성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897년 미국 유학을 떠나 로아노크대학에서 수학했다. 이후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를 받은 뒤 1904년 귀국했다. 1906년 대한자강회 회원으로 여러 강연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했으며 1913년 11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 신규식과 함께 박달학원을 설립하고 한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파견됐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총장 자격으로 한국독립에 관한 청원서와 한국독립 항고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했다. 1921년 임시정부 내에 독립운동 노선으로 갈등이 야기되자, 잠시 임시정부를 떠났다가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에서 국민위원과 외무위원을 맡았다. 1933년 1월 미국을 방문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운동을 전개하고 수천달러를 모금해 돌아왔으며, 1935년 7월 조선민족혁명당의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됐지만 건강상의 문제로 사천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1942년 10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보선됐고, 1944년 부주석에 취임했다. 선생은 1950년 북한군에 납치돼 그 해 12월 10일 평안북도 만포진 부근 별오동에서 70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김순애 선생은 1889년 5월 황해도 장연군에서 출생했다. 1909년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고, 1919년 김규식과 결혼했다. 선생은 1919년 7월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와 지원'을 목적으로 상해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임시정부가 자금난으로 곤경을 겪게 되자, 1926년 7월 임시정부경제후원회에 참여해 임시정부의 재정을 지원했다. 또 간호원양성소를 설립, 다수의 간호원을 양성 배출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독립전쟁에 대비하기도 했다. 선생은 1945년 11월 환국했으며 1946년부터 1962년까지 모교인 정신여자중·고등학교 재단 이사장과 이사 등으로 활약하면서 여성교육에 공헌했다. 선생은 1976년 5월 17일 87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정부는 두 분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김규식 선생에게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김순애 선생에게 1977년 독립장을 추서했다. 충주 / 윤호노기자
[충북일보=청주] 청주의 중심에 위치한 상당공원. 현재는 다양한 행사가 열리며 많은 시민이 찾는 곳이지만, 특별한 조형물이 있는 것은 대부분 알지 못한다. 한봉수 의병장의 동상이다. 한봉수(韓鳳洙·1884~1972) 의병장은 청주 산외일면 세교리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당시 수많은 독립운동에 앞장선 독립 운동가다. 대한제국군 진위대 상등병으로 복무하던 한 의병장은 1907년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같은 해 8월 의병장 김규환(金奎煥) 의진에 가담했다. 이후 일본군 수비대 및 헌병대를 습격하는 등의 활약을 펼치다 해산 군인 100여명을 규합해 대장으로 추대된다. 이때 의병진의 명칭은 왜적구축대(倭敵驅逐隊)로 명명됐다. 한 의병장은 청주 오근장 일원에서 일본 헌병대위 도기선치(島崎善治·시마자키)를 뛰어난 사격술로 사살한 뒤 강원도로 수송되는 세금 수송대를 습격해 군자금을 확보했다. 전의·목천·평택·여주·횡성·문경 등에서 일본군과 33회의 달하는 격전을 치르는 등 신출귀몰한 모습으로 크게 활약했다. 1909년에는 문대장(文大將)으로 불리던 조운식(趙雲植) 의병장과 보은 속리산 등에서 수시로 일본군을 격퇴할 계획을 논의하고, 계속해서 일군을 습격해 전과를 올렸다. 일제 의병탄압 기록인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를 보면 한봉수 의병장을 두고 "해가 갈수록 의병들의 첩보술과 경계술 등 전술이 일본 토벌대를 우롱할 정도로 강화되고 있다"고 나와 있다. 한 의병장은 식량과 무기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적의 세력이 점점 강해지자 부득이하게 의병을 해산했다. 처가인 서울 마포로 피신했으나 일본 헌병에게 체포됐다. 1910년 6월 29일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은 한 의병장은 경술국치로 인해 같은 해 8월 29일 사면받아 면소 판결돼 석방됐다. 3·1운동이 시작된 1919년 손병희(孫秉熙) 등과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한 뒤 독립 선언서를 손에 쥔 채 귀향해 3월 7일 청주 서문장터 입구 마차 위에서 선언서를 살포하고 장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같은 해 4월 1일 청주 북일면 세교리 구시장에서 면민을 동원해 만세시위를 벌이는 등 독립운동을 펼치다 5월 6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한 의병장은 1963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충북남부보훈지청은 한봉수 의병장의 뜻을 기리기 위해 '5월 우리고장 현충시설'로 청주 상당공원 내 한봉수 의병장 동상을 선정했다. 보훈지청은 이와 함께 영동 출신 독립운동가 정돈영(鄭暾永) 선생을 '5월 우리고장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게 됐다. 정돈영 선생은 1919년 4월 3일 영동 학산면 서산리에서 양봉식(梁鳳植)·이기영(李璣榮)·전만표(全萬杓) 등이 주동해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일본 경찰에 체포돼 공주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중 옥사 순국했다. 정 선생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 강준식기자 good12003@naver.com
[충북일보] 충북도의회는 15일 회의실에서 간담회를 열어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상황을 논의하고 현재 추진 중인 기념사업 경과 등을 점검했다. 간담회에는 장선배 도의장을 비롯해 충북독립운동사 연구회를 구성해 활동했던 이상식·박형용·김기창·서동학·송미애 의원, 기념사업 시행부서 주무팀장 등이 참석했다. 도의회는 지난해 9월부터 3개월간 '단재사상 및 충북 독립운동사 연구회'를 조직해 도내 독립운동가와 사적지 현황·실태 등에 대한 고찰 및 체계적인 정리를 통해 조례 제정과 대외 연대사업 추진 필요성을 제시해왔다. 현재 도내에서는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충북여성독립운동가 흉상 제작·전시 및 청남대 내 임시정부 수반 동상 제작과 기록문화 전시관 설치, 100주년 기념 시·군 순회 학술대회 등 총 28개(도 8, 시군 15)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연구회 대표로 활동했던 이상식 의원은 "이번 간담회는 조례에 근거해 지원되고 있는 기념사업들을 중간 점검·평가하는 차원"이라며 "향후에도 지속적인 간담회를 통해 신규사업도 적극 발굴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장선배 의장은 "다양한 기념사업들을 통해 도내 독립운동가에 대한 예우 강화와 물론, 숭고한 민족정신을 되살려 미래 100년을 함께 준비해 나가자"고 밝혔다. / 안순자기자
[충북일보=증평] 증평군을 대표하는 독립투사 연미당(1908~1981)과 그녀의 가족 3대가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재조명 되고 있다. 연미당은 독립운동가의 딸이자 아내, 어머니로서의 삶을 살며 자신 역시 독립운동에 앞장선 독립투사로 증평군 도안면 출신 독립운동가 연병환(1878~1926)의 딸이다. 연병환은 1907년 정미7조약이 강제되자 공직에서 사퇴했다. 1908년 청주 군수로 발령받았으나 이를 고사하고 중국 용정으로 간 뒤 동생 3명을 불러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 연병환은 용정해관에서 번 돈으로 독립운동가를 후원하고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당시 연병환의 집은 지역 독립운동의 거점이었고, 청산리대첩에 숨은 공로가 있다고 전해지는 등 공적이 인정돼 2008년 건국훈장 대통령표창에 추서됐다. 연미당의 숙부 연병호(1894∼1963)는 19세인 1913년에 형 병환이 있는 용정으로 갔다. 대한민국청년외교단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세계한인동맹회에서 활동했으며 만주에서는 독립군으로 활동했다. 광복 후 임시정부환국준비위원회 영접부장으로 활동하는 등 독립에 힘써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에 추서됐다. 연미당의 남편 엄항섭(1898~1962) 역시 독립에 평생을 바쳐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그는 보성법률상업학교에 다니고 있을 당시,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마음먹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프랑스 조계 공무국에 근무하면서 임시정부에 일본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경제적인 지원을 했다. 상하이청년동맹회 집행위원, 임시정부 헌법 개정 기초위원, 한국교민단 의경대장 등으로 활동했다. 연미당은 1927년 19세에 10살 연상인 엄항섭과 결혼한 뒤 청년여자동맹, 애국부인회, 한인여자청년동맹에서 후방사업 지원 및 선전활동을 했다. 1932년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 의거가 일어났을때 도시락 폭탄을 싼 보자기를 직접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임시정부가 일제를 피해 상하이부터 항저우, 난징,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강, 충칭까지 8천km의 대장정을 김구, 이동녕, 이시영 등 임정 요인들을 모시며 함께 했다. 연미당의 딸 엄기선(1929∼2002) 역시 중국방송을 통해 임시정부의 활동상황과 일본군의 만행을 동맹국과 국내 동포들에게 알리는데 매진했다. 또한 중국내 수용소의 일본군 포로 중 한국 국적을 가진 사병들을 위문하고, 광복군에 합류를 유도했으며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는 선전공작에 진력한 결과 1993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군은 이러한 연미당 가족의 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하기 위해 KBS한국방송과 힘을 모아 '독립투사 연미당' 역사 다큐를 제작했다. 이번 다큐는 KBS청주총국(총국장 이강현)이 1년의 제작과정을 통해 역사스토리텔러 설민석의 중국 현지 임시정부 루트 촬영과 드라마 재연을 통해 재미와 감동을 더했다. 오는 13일 토요일 오후 8시 10분부터 9시까지 KBS-1TV(전국방송)에서 전파를 탄다. 증평 / 김병학기자
[충북일보=진천] 충북의 3·1만세운동과 봉화독립만세운동 최초 발생지가 진천지역이라는 주장이 나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9일 진천문화원에서 열린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시군 순회 학술대회'에서 이같은 주장이 제기됐다. 정제우 진천향토사연구회장은 이날 '진천의 3·1운동, 그 기억과 기념'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진천에서 1919년 3월14일 저녁 장날인 15일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했으나 다음날 새벽 일제헌병보조원의 밀고로 발각돼 이상설의 사촌형제간인 이상직 등이 붙잡혀 무산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예수교(성공회) 전도부인들과 천도교도들이 15일 저녁 진천읍내 주변의 걸미산과 돌고래, 도당산, 문안산, 봉화산에서 군민 수백명이 분산해 봉화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고 정회장은 강조했다. 정회장의 이날 발표는 3월23일 횃불 봉화를 올린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봉화시위운동보다 8일 앞선 것으로 일제 측 1차 사료 기록이 아닌 증언을 담은 '진천군지'(1974년)에 근거해 주목을 받았다. 기존 학계에서는 일제 측 기록을 근거로 3월19일 괴산읍내 장터 만세운동을 충북 최초의 3·1만세운동으로 보고 있다. 정 회장은 "진천지역 만세운동은 절대다수 농민 대중이 참여해 초기부터 비교적 격렬해 순국 희생자가 많았다"라며 "전 계층이 참여한 민중적 성격의 독립운동"이라고 강조했다. 진천지역은 당시 만세운동에서 일본 헌병의 발포로 만승면(광혜원면) 시위에서 4명, 백곡면 시위에서 1명 등 5명이 순국했다. 이날 학술대회는 주제발표에 이어 김도형 독립기념관 연구위원, 오만환 진천향토사연구회 이사, 이상임 문화관광해설사, 이인석 진천군청 학예연구사가 참여한 종합토론을 진행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충북도와 충북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100주년기념사업추진범도민위원회가 주최하고 충북학연구소와 진천문화원이 주관했다. 진천 / 김병학기자
[충북일보=보은] 보은지역 3·1만세운동은 면 단위 중심으로 전개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충북도와 충북3·1운동·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100주년기념사업추진범도민위원회가 주최하고 충북학연구소·보은문화원이 주관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시·군 순회 학술대회'가 8일 오후 보은문화원 시청각실에서 열렸다. 이날 학술대회는 국사편찬위원회 김대길 박사가 '보은지역 3·1만세운동의 전개와 의의'를 주제로 발표했다. 김 박사는 "보은지역 만세시위운동은 주로 면 단위로 전개했고, 지금의 보은읍에서는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어 "도내 다른 군에선 여러 차례 만세운동 가운데 한두 번은 대개 읍내나 시장터에서 전개한 것이 일반적"이라며 "이는 5일마다 장시가 열리는 장터에서 주민들을 규합해 만세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조건에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보은지역은 비슷한 여건이었음에도 읍내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지 않았고, 장날 장터를 이용한 만세운동이 보이지 않는다"며 "이런 이유 등은 앞으로 분석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보은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실행한 것은 다른 지역보다 늦은 1919년 4월에 접어들어서다. 일경과 헌병대가 감시와 경계를 강화하고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구금·태형·징역형 등의 처벌과 일제의 총격으로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주민들을 규합하기 어려운 요소가 될 수도 있었던 것으로 김 박사는 분석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보은지역에서는 4월3일부터 18일까지 7건의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산외면·내북면·탄부면·수한면·삼승면과 보은면 학촌리 지역이다. 김 박사는 일본 측 자료(조선소요사건일람표) 가운데 '미연에 방지된 시위'로 기록한 22건에도 주목했다. 그는 "만세시위운동이 준비단계에서 탐지돼 실행에 옮겨지지 못한 것과 시위운동을 전개했지만 곧바로 일제가 해산하거나 진압해 무산한 것으로 기록했는지에 대한 재검토와 분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박사는 보은군 수한면 묘서리에 살던 권양하씨가 작성한 일기를 발굴해 당시 만세운동 상황을 소개했다. 이어 종합토론에서는 구금회 보은중 교사가 "읍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지 않은 것은 동학농민전쟁 최후의 항쟁지인 보은에 대한 일경의 감시체계가 작동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김양식 충북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미연에 방지된 시위를 주목한 점은 탁견이 아닐 수 없다. 보은은 미연 방지시위사건이 22건일 정도로 지역사회 저변에선 3·1운동 참여 열기가 대단했다"며 "앞으로 보은 3·1운동을 기억하고 기념할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박진수 보은문화원 이사는"보은 3·1운동은 손병희 선생과 접촉했던 윤정훈 선생과 천도교와의 관련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은 / 주진석기자
[충북일보=충주] 100년 전 충주시 신니면에서 용원장날에 울려 펴졌던 만세운동이 재현됐다. 4일 신니면 용원초등학교 앞에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 '독립의 횃불 전국릴레이' 및 제13회 신니면민 만세운동 재현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는 광복회 충북지부북부연합지회와 충북북부보훈지청 주관으로 광복회원 및 시민 등 2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식전공연과 만세재현행사, 횃불 행진 순으로 진행됐다. 올해는 만세운동 재현행사와 더불어 '독립의 횃불 전국릴레이행사'가 진행돼 선열들의 고귀한 애국정신을 기리는 독립만세운동의 의미를 더했다. '독립의 횃불 전국릴레이'는 지난달 1일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 17개 시도, 23개 만세운동 지역을 순회하며 릴레이 봉송으로 펼쳐지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충주는 20번째로 횃불을 이어받았다. 신니면민 만세운동은 충주지역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으로 1919년 4월 1일 장날을 맞아 면민 200여 명이 장터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전하고 있다. 당시 이를 주도했던 손승억 등 8명은 현장에서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만세운동 참여자에게 건국훈장 독립장, 건국훈장 애국장 및 대통령 표창을 추서한 바 있다. 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 2003년 12월 만세운동 유적비를 용원초교 앞에 건립했다. 2006년부터는 매년 선열들의 고귀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를 갖고 있다. 충주 / 윤호노기자
[충북일보] '독립의 횃불'이 오는 5일 청주에 도착한다. 충북남부보훈지청은 이날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미원천 잔디공원에서 '독립의 횃불 전국 릴레이' 행사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독립의 횃불 전국 릴레이'는 3·1절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3·1독립만세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계승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의 계기를 알리기 위해 지난 3월 1일 서울에서 처음 시작됐다. 서울에서 출발한 '독립의 횃불'은 전국 23개 만세운동지역을 거쳐 오는 11일 서울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장으로 입성하는 42일간의 대장정 중이다. 청주지역은 22번째 개최지로, 이날 행사는 1919년 청주지역에서 진행된 '미원 쌀안장터 3·1만세운동'과 연계해 1·2부로 나뉘어 진행될 예정이다. 1부 쌀안장터 3·1만세운동 100주년 기념식에서는 쌀안장터 만세운동 3일간의 기록 낭독·독립선언서 낭독 등이 진행된다. 2부 독립의 횃불 봉송 및 3·1만세운동 재현행사에서는 독립유공자 유족, 국민대표, 기관 단체장 등 봉송 주자 100명의 횃불 봉송, 3·1만세운동 재현 거리 행진 등이 이어진다. 민족대표 33인 중 충북 출신 5인(손병희·신석구·신홍식·권동진·권병덕) 코스프레 행진, 충북에너지고등학교 학생들의 대취타 연주 등 다양한 행사도 마련됐다. 충북남부보훈지청 관계자는 "1919년 당시 전국에 들불처럼 번졌던 뜨거운 독립의 열정을 독립의 횃불로 다시 한번 타오르게 하는 뜻깊은 행사에 청주시민의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란다"고 말했다. / 강준식기자 good12003@naver.com
[충북일보] 현 도청 소재지 청주는 과거에도 규모가 제법 큰 고을이었다. 독립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던 암흑의 시대. 청주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투신했다. 성암(星巖) 이광(1879~1966) 선생과 소당(素堂) 김제환(1867~1916) 선생도 청주 출신의 독립운동가다. 다른 독립운동가들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광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막대한 공을 세운 인물 중 하나다. 1907년 신민회에 가입해 만주로 망명한 뒤 1911년 교민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했다. 경학사는 농사를 짓고, 배움을 통해 독립 국민의 자질을 갖추기 위한 기관이었다. 군관 양성 사업으로는 신흥강습소를 설치, 신흥학교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1912년 중국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 대표 39명 중 1명으로 참가해 서명했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넘어가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의원으로 선출돼 임시정부 수립에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 1930년 대한독립당주비회(大韓獨立黨籌備會)를 결성해 기관지 한국의혈(韓國之血)을 순간(旬刊)으로 발행,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1932년 9월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 간부로 선전활동, 1938년 임시정부 호남성 외교원, 1944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당원으로 독립운동에 힘썼다. 이광 선생은 공적을 인정받아 지난 1963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으나 현재까지도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옛 청원군) 이목리에서 태어난 김제환 선생은 1913년 배일항거운동을 하던 중 일제 헌병대에 구금됐다. 완강한 단식투쟁을 벌여 석방된 뒤에도 일제 총독에게 일본의 불의를 힐책하는 항일유서를 보내는 등 열혈 독립운동가였다. 김제환 선생은 이후 일제에 맞서 단식을 결행하다 결국 자결했다. 1990년 뒤늦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김제환 선생의 고향에 위치한 이정사(梨亭社)는 김 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김 선생의 제자들은 1954년 조선후기 학자 남당(南塘) 한원진(1682~1751), 성암(惺菴) 박유형(1858∼1929) 선생의 위패를 함께 봉안했다. '낭성사'로도 불린 이 사당에는 1969년 정당 김성환(1875∼1958)·각재 신태구(1886∼1929) 선생을 추향하고 매년 3월 8일 향사하고 있다. 현재도 찾아가면 위패를 만나볼 수 있다. 충북남부보훈지청은 이광 선생과 김제환 선생의 위패가 있는 이정사를 각각 4월 우리고장 독립운동가와 현충시설로 선정했다. 꽃이 피는 4월. 꽃보다 아름다웠던 우리고장 독립운동가를 이렇게나마 기억하는 봄이 돼야 한다. / 강준식기자 good12003@naver.com
[충북일보=괴산] 괴산군 동부리에 위치한 홍범식 고택은 '괴산 3.19만세운동'을 주도한 벽초 홍명희가 태어난 곳이다. 홍명희의 아버지 홍범식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대한제국이 국권을 빼앗기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결했다. 홍범식은 홍명희에게 "죽을지언정 친일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마라"라는 유서를 남겼다. 아버지의 유훈을 받은 홍명희는 고향 괴산에서 3·1운동을 주도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해 끝내 변절하지 않았다. 지난 1730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홍범식 고택은 조선 중기 양반가옥의 대표적인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어 문화·역사적 가치 또한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홍범식 고택으로 들어서면 먼저 사랑채를 만난다. 홍명희는 사랑채에서 1919년 3월 18일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19일 괴산장날에 600여명의 군민들과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일로 홍명희는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루고 독립운동에 매진하게 된다. 사랑채는 좌측에 위치해 있으며, 전체적으로 뒷산의 자연경관을 집안으로 끌어들여 조화시키며 오밀조밀한 내부공간을 연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에서 중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안채가 나온다. 안채는 정면 5칸에 측면 6칸의 'ㄷ'자형으로, 일자형 광채를 맞물리게 해 전체적으로 'ㅁ'자형 구조다. 좌우대칭의 평면구조를 갖는 중부지방의 살림집의 특징적인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안채에서 나오면 길은 장독으로 이어진다. 제법 큰 장독대와 광채가 양반가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괴산 / 김윤수기자
[충북일보=증평] 증평군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에 대한 사회적 예우 분위기 조성에 나섰다. 홍성열 증평군수와 우진수 충북북부보훈지청장은 28일 증평읍에 소재한 독립유공자 연병호 선생의 후손 연규은씨의 자택을 찾아 독립유공자 명패를 달아주고 고마움을 표했다. 이번 행사는 국가유공자의 헌신에 보답하고 명예와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국가보훈처에서 통일된 문구와 디자인으로 명패를 제작 배부하는 독립유공자 명패달아주기 사업의 일환으로 마련됐다. 증평군에는 연병호, 이태갑, 조문환 선생 등 3인의 독립유공자 후손이 이번 대상에 포함됐다. 연병호 선생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로 김구 안창호 등과 세계한인동맹 한국국민당 신한독립당을 조직하고, 임시정부 환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한 공적을 인정받아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이태갑 선생은 1919년 3월 30일, 2천명의 군중을 인솔해 청안면 장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결과 2년형을 선고받는 등 독립을 위해 애쓴 결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된 조문환 선생은 청년 소년운동에 적극 참여해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군 관계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유공자 후손가정에 명패를 직접 달아드릴 수 있어 의미가 있었다"며 "앞으로도 독립유공자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나라사랑의 참뜻을 기리고 명예를 드높이는데 더욱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증평 / 김병학기자
[충북일보=옥천] 3.1 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옥천군 청산면에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독립 만세 공원이 들어선다. 군은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주관하는 지자체 공모사업에 선정돼 국비 1억원을 확보했다. 이번 공모사업은 정부가 지역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공간을 마련해 지역민의 역사적 자긍심을 선양하고자 계획됐다. 옥천군 청산면은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충북 도내에서 만세운동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기미년 3월 26일 수백명의 청산면민이 만세 시위를 벌인 후 해산했으며, 4월 2일 장날을 이용해 다시 수천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였다. 주재소 헌병대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해 그 중 김철수 선생은 현장에서 순국하고, 김인수 선생은 고문 중 순국했다. 이후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박동희·고한주 선생 등 청산면 출신 14명 중 9명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으나, 만세운동에 대한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나머지 5명은 아직도 유공자명단에 이름이 올라가지 못했다. 군은 이러한 청산면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독립열사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올해 안에 2억2천만원을 들여 현 백운리 마을소공원 5천120㎡ 부지에 '청산 3.1 독립 만세 공원'을 조성한다. 면민으로 구성된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발족해 독립기념탑 건립을 건립하고 독립유공자 동상과 공적안내판을 세운다. 공원 주변 수목 식재와 함께 태극기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전시 시설도 마련해 나라에 대한 존경심과 애국심을 고취할 계획이다. 공원 조성지 반경 200m 안에는 초·중·고등학교가 모두 위치해 있어 자라나는 지역 청소년들이 옥천 독립운동의 역사를 배우고 기억할 수 있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전재수 기획감사실장은 "이 사업 공모를 위해 청산면민발전위원회, 청산이장협의회 등 주민들이 자발적인 서명 운동을 전개하는 등 민·관이 함께 뜻을 모았다"며 "공원 건립 과정에 있어 주민들의 의견도 충분히 수렴해 독립운동 중심지로서 청산면의 가치를 높여나가겠다"고 밝혔다. 옥천 / 손근방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