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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6월 민주항쟁 세대가 본 촛불시위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만드는 더 큰 대한민국"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수백만 시민 평화 촛불집회

  • 웹출고시간2016.12.29 20:56:01
  • 최종수정2016.12.29 20:56:01

편집자주

2016년 최대 화두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였다.

국가권력 정점을 등에 업은 최씨의 각종 이권 개입과 정·경 유착 등 부정부패 정황이 속속 드러났다.

이런 난세에 촛불 든 영웅이 등장했다. 바로 '국민'이다. 국정농단 의혹이 불거진 순간부터 분노한 국민은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교복을 입고 나온 10대 학생들. 갓난아이를 품에 안은 20·30대 젊은 부부. 자녀들의 손을 잡고 나온 40·50대 중·장년층. 흰머리가 지긋한 60·70대 노인들까지. 바람이 불면 꺼진다던 하나의 촛불은 곧 수백만의 들불이 됐다. 국민들은 폭력 없는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부패한 권력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본보는 4·19혁명과 6월 항쟁 세대를 만나 '촛불 민심'에 대한 소회를 들어봤다.
[충북일보] ◇김현수 충북4·19혁명기업사업회 회장

김현수

충북4·19혁명기업사업회 회장

"너는 총살이다."

1960년 4월18일 경찰에 연행된 김현수(80·충북4·19혁명기념사업회장) 당시 학생에게 들려온 한마디였다.

당시는 사사오입 개헌 등 온갖 불법과 부정선거를 동원해 이승만 정권이 독재하던 시대였다.

이에 분노한 대학·고등학교 학생들은 거기로 나섰다. 그러던 중 마산시위에서 실종된 김주열군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숨져 발견되면서 국민 분노는 극에 달했다.

김 회장은 "4·19 혁명이 있던 해 청주대학교 학생회 임원을 맡고 있었고 지역에선 일명 '주동자'로 불렸다"며 "지금처럼 스마트폰이나 SNS 등이 발달한 시절이 아니어서 거리로 나서기 위해 학생회 임원들과 다른 학교 학생들을 설득하면 일일이 만날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청주·충주·제천 각 대학·고교 학생들과 약속된 날은 4월20일. 하지만 정권의 감시가 각 학교까지 파고들면서 예정보다 2일 빠른 4월18일 충북도청으로 나섰다.

진압에 나선 경찰은 소방차량에 하수구에서 끌어 올린 오물을 학생들을 향해 뿌리며 곤봉을 휘둘렀다. 학생들은 돌멩이를 던지며 저항했다. 그러다 진압경찰의 손에 잡힌 학생들은 트럭에 태워져 경찰서로 줄줄이 연행됐다고 했다.

그럼에도 시위는 계속됐다. 수도권에는 비상 계엄령이 선포됐다. 지방에는 등교정지명령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학생들의 거리 행렬은 계속됐고 시민이 속속 시위에 동참했다. 거센 국민적 분노에 이승만은 결국 하야했다.

김 회장은 지금의 국정농단 사태와 촛불민심을 보면 감회가 새롭다고 했다.

그는 "4·19 때 나선 학생들은 이를 의거(義擧)라고 생각했지만, 이승만이 물러나면서 혁명으로 불리게 됐다"며 "당시는 촬영한 사진이 외부로 유출되면 경찰 등에서 증거가 될 수 있어 함께 거리에 나선 학생들과 사진조차 찍지 못하던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국정농단에 분노한 시민들, 그 분노를 촛불에 담아 거리에 나온 시민들을 보면 세상이 변했다 해도 국민의 힘은 여전하고 위대하다는 생각이 든다"며 "오늘날까지 수많은 민주화 투쟁을 거쳤고 결국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렸다. 나라가 큰 혼란에 빠진 이때 국민이 다시 한번 세상을 바꿔나가고 있다"고 밝혔다.

◇정지성 충북민주화운동 계승사업회 집행위원장

정지성

충북민주화운동 계승사업회 집행위원장

1987년 6월10일. 거리는 분노한 국민으로 가득했다. 이들은 '호헌 조치' 등 전두환 대통령의 비정상적 행동과 국민을 무시하는 처사에 하나로 뭉쳤다. 손에는 저마다 '화염병'이 들려 있었다. 격렬했던 민주화 운동으로 역사에 기록된 6월 민주항쟁이었다.

그로부터 29년 뒤인 2016년. 이번에도 수많은 사람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국정농단, 4·16 세월호 침몰 등 박근혜 대통령의 무능력함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이유는 29년 전과 비슷했지만, 화염병 심지의 불꽃은 '촛불'의 심지로 옮겨붙었다.

이 두 현장에 모두 있던 정지성(58) 충북민주화운동 계승사업회 집행위원장.

정 위원장은 1987년 6월10일 항쟁 당시 '6월 항쟁 국민운동본부 충북본부' 사무처장으로 근무하면서 시위를 주도했다.

정 위원장이 꼽은 이번 촛불집회의 핵심은 '평화'와 '자신감'이었다.

그는 '최순실 게이트'가 촉발한 첫 촛불 집회를 지켜보면서 "군대와 경찰 등을 보유한 정부가 평화시위를 통한 국민의 목소리를 수용할까 하는 불만이 가득했다. 국민의 힘을 무력으로써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며 "1987년에도 그랬다. 불통이었던 전두환 정권은 무자비할 정도의 폭력으로 우리를 억압했다. 결국, 폭력시위인 6월 항쟁이 일어나 전두환 정권은 막을 내렸다"고 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난 10월29일 주최 측 추산 1차 촛불집회 집회인원 2만여명은 시간이 갈수록 몸집을 불려갔다. 국민의 '평화적 집단행동'에 언론은 물론 정부, 정치계까지 움직였다.

정 위원장은 "모든 촛불집회에 참여해보니 '화염병이 없어도 이길 수 있구나, 폭력시위가 아니어도 이길 수 있구나'를 느꼈다"며 "절제된 분노를 지닌 평화집회의 힘을 여실히 보여줬다"고 감탄했다.

그러면서 "6월 항쟁에 참여하기 전 친구들에게 '20년, 30년 뒤에도 민주주의의 가치는 지켜져야 한다. 민주주의는 내가 지켜야 할 가치다'라고 말한 적 있다"며 "그러나 29년이 지난 지금도 정부는 그대로다. 민주화 세대로서 미안한 감정이 있다. 다만, 희망이 있다면 국민 의식 수준이 굉장히 높아졌다. 당시 실패를 맛본 민주화 세대들의 경험과 성숙한 국민 의식이 한데 어우러져 더 큰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으리라 본다"고 했다.

/ 박태성·강준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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