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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5.04.30 19:04:56
  • 최종수정2015.04.30 19:04:56

조혁연 대기자

[충북일보] 병마절도사는 조선시대 각도의 최고 무관, 즉 오늘날로 치면 방위사령관으로 종2품의 품관을 지녔다. 우후(虞侯)는 병마절도사를 보필하는 직으로 달리 아장(亞將), 부장(副將)으로 불렸고, 종3품의 품관을 지녔다.

1728년 무신란 당시 충청도 병마절도사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직손인 이봉상(李鳳祥·1676-1728)이었고, 바로 밑의 우후는 박종원(朴宗元?-1728)으로 상당산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인좌 반란군이 청주읍성을 급습하던 그날(3월 15일), 병마절도사(혹은 兵使) 이봉상은 질펀한 술자리를 가졌다. 후대의 표현이지만 다산 정약용은 '서원에서 슬픔에 잠겨'[悲西原]라는 한시에서 이렇게 감회를 읊었다.

'도적떼는 못가에서 칼날 갈고 있을 때(群盜池邊礪鋒刃) / 원수의 감영에는 풍류 소리 요란하다(元師營中鬧絲竹) / 곤드레 술에 취해 고운 기생 옆에 끼고(紅酒··挾素妓) / 아문에 칼날 미쳐도 나른하여 못 일어나(劍及牙門·不起)'-<다신시문집 제 1권>

그러나 어찌됐건 병사 이봉상은 '국가'라는 제단에 피를 흘림으로서, 지금은 청주시 모충동의 표충사에 그 위패가 모셔져 있다. 반면 당시 우후였던 박종원은 처음부터 무장답지 않은 길로 나갔다.

상당산성 남문 모습.

그는 이인좌 반란군이 청주읍성을 거쳐 상당산성으로 몰려오자 저항의 칼을 빼는 대신 싹싹 빌며 지체없이 항복했다. 1744년(영조 20) 상당산성의 승장 영휴(靈休)가 지은 것으로 《상당산성고금사적기》(上黨山城古今事蹟記)가 있다. 이 사료에 의하면 당시 상당산성내 승장 쌍눌(雙訥)이 승병 10여명과 함께 결사항전을 주장했으나 우후 박종원은 항복후 곧바로 반군에 가담했다.

정부군에서 반란군으로 신분이 바뀐 박종원은 이인좌를 수행해 청주에서 경기도 안성의 청룡산 일대까지 북진했다. 양진영이 대치를 하고 있는 가운데 위세를 떨친 것은 정부군이 발사한 떼불화살인 신기전(神機箭)이었다.

'갑자기 대군이 쏜 신기전을 보고서야 비로소 경영(京營)의 군사가 온 것을 알고 놀라고 겁에 질려 물러나 도망하니, 위협에 못이겨 따른 무리는 이때 대부분 도망해 흩어지고, 적의 괴수 이인좌·박종원 등은 4, 5초(哨)의 병력을 거느리고 청룡산 속으로 물러가 둔을 치고 죽산의 군사가 오기를 기다렸는데…'-<영조실록 4년 3월 23일자>

박종원은 이후 얼마가지 않아 일대 마을에 숨어 있다가 수색에 나선 관군에기 발각됐다. 그리고 칼을 뽑아 저항하는 와중에 관군 조태선(趙泰善)이 쏜 화살이 그의 목에 적중하면서 생포됐고 현장에서 목이 베어졌다. 영조실록은 그 직후를 이렇게 적었다.

'정오가 채 못되어 말을 달려 승첩을 알려 왔고, 포시(·時)에 박찬신이 고각(鼓角)을 울리며 깃대에다 적의 머리 여러 개를 매달고 오니, 군중에서 승전곡을 울리고 군사와 말이 기뻐 날뛰었다.'-<〃>

인용문 중 '포시'는 오후 3-5시를 가리킨다. 수급된(목에 베어진) 박종원의 머리는 한양도성 돈화문루의 깃대에 내걸렸다. 그러나 박종원의 불행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의 아들도 연좌제에 의해 참수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당시 대신 이종서, 이병태 등이 '비록 한때는 시원하시겠지만 반드시 뒷날 후회하실 것입니다'라고 박종원 아들의 참수를 말렸지만 분기탱천한 영조의 화를 누를 수는 없었다. 1년 후 영조는 "그들이 강직한 신하였다"고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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