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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이 숨쉬는 오지의 문화 - 단양군 의풍리

80여가구 사는 마을 정감록 십승지지의 한곳
폐교 의풍분교 캠핑장으로…과일·농산물

  • 웹출고시간2011.10.16 19:01:01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베틀재 오르막에서 내려다 본 의풍리마을 전경. 물이 맑고 깨끗하다.

단양군 의풍리는 충북의 가장 오지마을로 잘 알려져 있는 정감록의 십승지지(十勝之地) 마을로 잘알려져있다.

정감록에 단촌으로 알려진 이곳은 산이 좋고 물이 좋아 여름철이면 많은 사람들이 휴양 또는 산촌 체험으로 찾고 있다.

현대의 도시인들에게는 그저 한번쯤 거쳐가면 좋은 곳이지만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최근까지만 해도 충북의 가장 오지마을, 개발이 안된 곳, 사람살기 어려운 곳으로 불리울 정도로 오지마을 이었다.

의풍리는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이곳을 드나는 길은 오직 3곳이다. 들어오고 나가는 곳 세곳은 예전이나 지금이 마찬가지라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이다.

그중 하나는 제천을 거쳐 영월 하동에서 좁고 긴 계곡을 따라 들어가는 방법, 다른 하나는 경북에소 소백산을 넘어가는 방법, 다른하나는 단양 영춘에서 베틀재를 넘어가는 길 등 3곳이나 어느 곳으로 가도 험난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 이곳을 다녀본 사람들이면 잘 알고 있다.


지금은 폐교가 된 의풍리의 영춘초 의풍분교 전경.

지금은 폐교가 돼 여름철 캠핑장으로 이용하고 있는 영춘초 의풍분교는 충북의 가장 오지에 있는 학교로 불리우기도 했다. 현재는 지역의 주민들이 교육청으로부터 임대를 해 여름철에는 이 곳을 찾는 도시민들에게 대여해주면서 캠핑장, 체험장으로 인기를 얻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폐교가 된 의풍분교는 시원하게 흐르는 남대천을 옆에 끼고 있어 학생들의 체험장으로는 가장 인기가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학생들이 북적일때는 마을의 중심지, 의풍리를 지키는 중심역할을 해왔다. 학교의 교사는 단양 등 타 지역으로 나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생활을 하기도 했다.

예전의 충북 교육감이 이곳 의풍 분교를 찾아 부부교사가 창이 훤히 뚫린 관사에서 감자와 보리밥에 신 김치하나만 놓고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 미안합니다'라며 청주로 돌아가 새로운 관사를 지어준 일화는 아직도 마을 주민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이곳을 방문했던 교육감은 지금도 "의풍분교에 근무한 교사들에게 경의를 표한다"며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이같은 교사가 있는 한 우리나라의 장래는 밝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할 정도로 의풍분교는 오지중의 오지였다.

마을 주민 이모(65)씨는 "예전에 학교가 있을 당시에는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과 시끌 벅적한 모습이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는데 지금은 지나는 차량들의 소음만 들리는 썰렁한 모습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나라가 아무리 경제적인 이익만으로 이곳과 같은 마을의 학교를 없앤다는 것은 국민을 위한 정책이 아니다"며 "돈이 조금더 들더라도 학교를 없애기 보다는 학교를 아름답게 하고 마을을 살기 좋게 만들어 사람들이 들어오고 아이들이 뛰노는 학교를 보는 것이 소원이다"고 말했다.

의풍리 마을의 밭에 허수아비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영월에서 오다보면 김삿갓 묘소가 의풍리가 시작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김삿갓 계곡의 계곡을 지나면 정감록에서나 나올 법 한 의풍리가 논과 밭으로 시작된다. 단양과 영월 영주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자급자족을 하던 의풍리는 지금은 도로가 포장되고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지만 예전의 봇짐 장사도 잘 찾지 않던 곳이라고 마을 주민들은 이야기 한다.
의풍리는 과일과 농산물이 유명하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약 80여가구가 거주하고 있는 이곳은 예전에는 장이 서기도 했다고 단양군청의 직원들은 말은 한다.

호롱불아래에서 고구마 구워먹던 시절이 생각난다고 하는 김모(56)씨는 "이곳은 예전에는 차도 없고 다니는 사람도 없었지만 사람사는 곳 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의풍 하면 충북의 오지라고 보고 있을 정도다"고 말했다.

단양에서 자동차로 40여분간을 달려오면 영춘과 의풍리를 이어주는 배틀재 정상이 나타난다.
도로가 포장이 되기 전까지는 굽이굽이 가파른 고갯길로 일반자동차는 엄두도 못내던 곳을 지금은 포장이 돼 편안하게 다닐수 있다.

배틀재에 서서 의풍리를 보는 소감은 '정말 산골이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본 의풍리 지역이다. 저멀리 겹겹이 두른 산너머로 백두대간이 보인다.
이곳은 경치좋고 물 맑고 인심이 좋아 외지인들이 지나가다 들렀다 소문을 듣고 정착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이다.

2009년 베틀재가 포장된 이후 정상의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있다.

'삼도(충북 경북 강원)를 볼 수 있는 베틀재는 백두대간에서 동으로 뻗은 형제봉(1,177m)과 마대산(1,050m)사이 해발 651m이다. 정감록에 구곡종어 삼풍(三豊) 구인종어 양백(兩白)인 십승지로 오르막길 30리 내리막길 30리다. 3도의 문물이 오고간 역사속의 대로 이다.

고려시대 평구도의 역절마을인 의풍과 조선시대 연원도의 역전마을인 오사역을 연결하는 고갯길을 전국의 보부상들이 넘고 쉬어가며 상황당에서 제사 지낸곳이다.

현대의 고속도로격인 뱃길로 한양왕래를 위해 경상도 강원도 사람들이 넘어야 했던 우리나라 3대 염로로 마포에서 온 소금을 용진나루에서 내려 지게짐을 지고 베틀재를 넘어 강원도와 경상도를 왕래하였다.

임진왜란때는 전혀 피해가 없었고 동학난때에는 천도교 2대 교주인 최시형 처가가 있어 동학혁명군이 의봉봉기때는 도 창의대장 이강년 중군장 김상태, 우 선봉장 권용일, 관동 창의대장 이인영, 김규철, 이명상 의병장과 의병들이 소백산과 의풍을 거점지로 활동하였다.

6.25전쟁때는 인문군 사단과 연대가 점령하였기 국군의 인민군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감행한 조국의 시련과 애환이 서려있는 곳으로 해방후 미 480호 법의 밀가루 공사가 소백산의 벌채용 산판길을 GMC가 처음 열었던 사연이 많은 고개이기도 하다.

충북의 최북단 동부에 위치한 베틀재는 3도접경 태.소백 연접지로 충북정도 100주년 사업으로 시작한 10여년 그리고 60년 숙원사업의 역사적인도로가 개통됨으로써 영춘면민들은 고마운 뜻을 기리고 영원이 기념하기 위하여 개통 기념비를 세운다'

'2009.7.22 영춘면 베틀재 개통기념 추진위원회 일동'

이같은 비문의 자료에 의하면 의풍리는 베틀재 정상에서도 30리를 내려가야 할 정도로 오지로 보부상들도 이곳을 지날때면 제를 올리기도 했다.
임진왜란때는 피해가 없었고 동학혁명과 6.25전쟁때는 요충지로 자리잡는 등 근대에 들면서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곳이다.

/김병학기자

이 기획물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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