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연자실이라는 표현이 딱 맞는 상황이 벌어졌다. 며칠 전 5학년들이 닭장 따밤랜드 앞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교장선생님, 병아리들이 하나도 없어요." "헉! 뭐라고· 어제도 윤찬이랑 작은 닭장에 7마리 잘 넣어줬는데 무슨 일이니·" 닭장 안에는 하얗고 까만 깃털만 몇 개 널브러져 있을 뿐 어디에도 병아리들이 없다. 아이들은 병아리들과 놀려고 만들어놓은 벤치에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이 사단은 5학년들이 새롭게 시작한 프로젝트로부터 출발했다. 닭장에는 수탉 1마리와 암탉 3마리가 주기적으로 알을 낳으며 잘 살고 있었다. 조금은 엉성하지만 안전한 보금자리에서 별일 없이 겨울을 보냈다. 봄이 되자 5학년들은 새로운 일을 도모했다. 한 마디로 닭들의 생활환경 개선과 식구 늘리기 프로젝트였다. 좁은 닭장에 갇혀 하루 종일 지내는 닭들이 불쌍하다며 닭장 뒤 여유 공간에 놀이터를 만들어주겠단다. 아이들은 직접 각목과 그물망을 구입해왔고 쓱싹쓱싹 뚝딱뚝딱 공간 변신 프로젝트를 재미있게 수행했다. 닭장 벽을 뚫어 커다란 터널도 만들었고 멋졌다. 모두들 박수를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다. 밤새 누가 닭장을 침범했는지 닭 한 마리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땅 쪽에 틈새가 있었다. 작은 빈틈을 침범할 수 있는 것은 살쾡이라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 의견에 반대한 사람은 배움터 지킴이 선생님과 5학년 가연이었다. 살쾡이가 아니라 고양이라는 것이다. 고양이가 어미닭을 잡아갈 수 있다고· 구멍의 크기도 그렇고 고양이가 닭을 잡아먹는다는 것이 말이 돼· 대부분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5학년들은 비장한 마음으로 닭들을 지키기 위해 작은 틈을 막는 보수공사를 했다. 그러나 불행은 다음 날도 이어졌다. 또 한 마리의 암탉이 사라졌다. 그렇게 세심하게 틈을 메웠는데도 말이다. 살쾡이가 땅을 판 흔적도 없었고 고양이를 의심할 다른 증거도 없었다. 아이들은 눈물까지 보이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며 다시 따밤랜드 보수작업에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두 마리 남은 닭들이 무사히 움직이는 것을 보고 그제야 안심을 했다. 5학년들의 또 다른 프로젝트인 병아리 부화는 교장실에서 세 번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20일 간격으로 2마리, 3마리, 또 2마리가 알에서 깨어났다. 처음 태어난 병아리들을 닭장에 넣고 적응시키는 과정에서 수탉이 물어뜯어 1마리를 잃었지만 나머지는 한 동안 무사히 닭장에서 살아남았다. 어느 날 동네 할머니가 손자들이 갖다놓은 병아리를 키울 수 없다고 까만 병아리 3마리를 가져오셔서 모두 7마리가 되었다. 닭들은 새로운 식구들과 새 가정을 꾸려서 적응해나갔다. 어제는 닭장관리 전문가 윤찬이가 병아리들을 작은 닭장에 몰아넣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웃겨서 실컷 웃기도 했다. 5학년들도 마지막으로 태어난 병아리만 이사시키면 되겠다고 했는데 7마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우리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아직도 범인이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누가 우리 닭을 훔쳐갔을까·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남은 암탉 1마리까지 잡아가는 고양이를 윤찬이가 목격했다. 이 모든 사건의 범인이 학교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고양이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지붕 이음매에 벌어진 틈으로 고양이는 유유히 드나들었다는 것도 밝혀졌다. 닭들을 위해 놀이터를 만들어주려고 했을 뿐인데 닭을 모두 잃은 아이들은 망연자실했다. 아직 남은 수탉과 병아리 2마리를 지키기 위해 아이들은 또 다시 따밤랜드 보수작업에 들어갔다.
힙합 음악이 10대들을 열광시키던 시절 나는 참 곤혹스러웠다. 빠르기만 하고 높낮이도 없는 듯한 중얼거림을 노래라고 했다. 웅얼웅얼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는 몇 마디는 욕이었다. 절대 음악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았다. 더욱 납득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패션이었다. 질질 끌리는 바지를 입고 몸이 두 개나 들어갈 법한 셔츠에 거추장스러운 치장까지 주렁주렁 달았다. 껄렁껄렁한 걸음걸이에 문신까지 한 불량스러운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저게 무슨 음악이야? 귀를 닫아버린 나와는 달리 아이들은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힙합의 선구자 '서태지와 아이들'은 금세 그들의 우상이 되었다. 초등학생들도 어느새 찢어진 청바지를 입었고 바지를 질질 끌고 다녔으며 중얼중얼 랩을 외우고 다녔다. 수학여행, 수련활동 장기자랑 시간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네들의 음악을 들어야 했다. 알아들을 수 없으니 고문이었다. "얘들아, 이제 좀 다른 노래 부르면 안 될까?" 안될 말이었다. 나에겐 가까이 갈 수 없는 너무나도 먼 그대였지만 아이들에겐 이미 문화였고 물결이었다. 긴 세월이 지났다. 잠시 유행처럼 지나갈 것 같았던 힙합은 우리나라 대중음악에 큰 획을 그었지만 나는 여전히 관심 밖이었다. 몇 해 전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가 '쇼미더머니'를 보기 전까지는 적어도 그랬다. 여느 음악 경연 프로그램과는 다른 예선전이었다. 넓은 강당에 수만 명의 참가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심사위원인 유명 래퍼가 한 줄씩 맡아 참가자 앞으로 가면 순서대로 그동안 연습한 랩을 선보였다.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한 참가자가 미처 한 소절을 마치지도 않았는데 심사위원은 땡~을 외쳤다. 내가 들어도 실력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더 들을 가치도 없다 여겼을 거다. 자막에는 '죽음의 조', '낙엽처럼 줄줄이 떨어진다.'고 표현했고 그 줄은 팍팍 줄어들었다. 이상하게도 바로 옆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쌈디라는 래퍼가 심사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그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전 시즌에서 프로그램 자체를 비방했던 사람이 왜 나왔냐고 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랬던 그가 심사위원으로 나왔다. 다른 심사위원들이 추풍낙엽 같이 참가자들을 떨어뜨리던 그 시각 그는 한 명의 노래를 끝까지 듣고 있었다. 잘 안 되는 부분은 다시 부르게 하며 조언했다. 당락을 결정하기 위해 랩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존중과 배려하는 그의 태도를 보고 비판하는 말도 싹 사라졌다. 1년에 한 번 있는 힙합인들의 꿈의 무대에서 단 한 줄도 못 부르고 떨어진 사람들은 얼마나 허탈할까?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도 모르고 또 1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반면 끝까지 들어주고 원포인트 레슨까지 해주는 그의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는 정겹기까지 했다. 탈락한 참가자들도 기꺼이 수긍했고 다음을 기약하는 그들의 표정엔 희망이 빛났다. 내가 힙합에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였다. 자막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귀 기울이니 들리기 시작했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정련된 아름다운 노랫말이 주는 여운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살아 숨 쉬는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듣는 사람들도 비트에 몸을 실어 어깨를 들썩이며 공감하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절대 좋아할 수 없을 거라 했는데 관심을 가지니 들렸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니 공감이 갔다. 요즈음은 내수 출신 래퍼 원슈타인의 '적외선 카메라'에 빠졌다. 절대는 없나보다.
출근길, 아파트가 즐비한 도시 숲을 빠져나오면 논과 밭 사이로 좁은 샛길이 나온다. 굴다리를 통과하고 파밭을 지나면 나는 자연스럽게 왼쪽 논을 쳐다본다. 오늘은 선배님이 계실까· 바라보지만 좀처럼 만날 수 없다. 며칠 전 마침내 선배님 부부가 모내기 하려고 논에 물을 대고 계셨다. 반가운 마음에 잠시 멈췄다. "선생니~~~임, 안녕하셨어요? 건강하시죠? 저예요." "허허허. 누구여? 잘 지내요. 건강해요." 문을 열고 나가려니 금방 차가 뒤따라와 출발해야만 했다. 아쉬움에 백미러를 보니 선배님이 손을 흔들고 계셨다. 저녁 때 전화가 왔다. 아침에 그냥 보내서 아쉬웠다며 반가워하셨다. 이제 78세가 되신 김경* 선생님은 내가 교직에서 만난 가장 성실하고 열정적인 분이셨다. 선배님이 보여주신 교사로서의 자긍심과 책무성을 지금까지 본보기로 삼고 존경한다. 퇴직 후 한참 동안 못 뵙다가 우연히 이렇게 농사지으시는 들에서 만나게 되었다. 어느 해 미술 전담을 맡으신 선생님이 우리 교실로 찾아오셨다. 미술실기 능력이 부족하니 학원에 다니겠다고 하셨다. 퇴근 후 가정 살림하기도 바쁜 주부가 지친 몸을 이끌고 학원까지 다니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에 만류했다. 표현기법을 배우기 위한 학원은 더더욱 아니었다. 초등미술교육의 목표는 작가 양성이 아니라 다양한 미적체험과 표현, 감상을 통해 미술을 향유하는 소비자 교육에 방점이 있다. 미술실기 능력보다는 초등미술지도 방법에 대한 연구가 우선이었다. 학원 대신 미술교육 방법을 함께 공부하자고 제안했다. 그 시절엔 수업과 별도로 방과후에 학생들에게 예체능 특기지도를 했다. 나는 담임교사로 매일 5~6시간 수업을 하고 퇴근 전까지 미술을 맡아 미술부원 10여 명을 지도하고 있었다. 다음 날 오후부터 선생님은 몇 달간 우리 반으로 오셨다. 학생들과 함께 그림 공부를 하셨고 옆에서 미술지도 방법도 배우셨다. 선생님의 성실함과 열정은 남달랐다. 교직에 몸담은 지 30년이 된 지금까지 수많은 학생들을 만났지만 김경* 선생님과 같은 학생을 만나본 적이 없다. 배운 것은 집에 가서 잠들기 전까지 몇 번이고 복습하셨다. 명암을 공부하기 위해 사과를 하나 그리면 집에 가서 한 광주리를 그려오셨다. 투자한 시간만큼 그림실력도 금방 늘었다. 지도서로 미술지도 방법을 공부하시니 얼마가지 않아 자신감이 생겼다 하셨다. 아이들에게 부끄러운 교사가 될까봐 걱정했는데 한시름 놓으셨다는 말에 가슴이 찡했다. 이런 일화도 있다. 선생님이 늦은 오후에 접착제를 가지고 이 교실 저 교실을 순회하고 계셨다. "선생님, 뭐 하세요?" "허허허, 찰흙 코 하고 눈알 붙여요. A/S 해요." 아이들은 말랑말랑한 촉감의 찰흙이나 지점토를 좋아한다. 만들기 시간에는 조물락, 툭툭, 탕탕 신나하며 그럴 듯한 작품을 만들어낸다. 완성작은 교실 뒤에 전시하는데 딱 하루만 멀쩡하다. 다음 날 찰흙이 마르면 '움직이는 친구표현하기' 작품은 팔이나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없다. '자기 얼굴 표현하기' 부조는 눈알이나 코가 어디로 갔는지 얼굴이 해골 같아진다. 선생님은 교실마다 다니며 찰흙 눈알과 코가 사라지기 전에 접착제로 붙여주고 계셨다. 미술수업 후 A/S까지 해주시는 전담선생님을 그 후로 본 적이 없다. 교사가 모든 것을 잘하는 만능일 수는 없다. 부족한 것은 공부하고 모자란 것은 채우며 교사도 성장하며 가르친다. 그렇다 해도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교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내 수업의 결과까지 A/S 하시던 선생님의 태도는 쉽게 볼 수 없는 귀한 모습이었다.
"모히또 가서 몰디브 한 잔?" 2015년 영화 『내부자들』이 흥행한 이후로 일상생활에서 참 많이도 들었던 말이다. 그 당시 개그 프로그램에서도 이런 식의 단어 배열을 뒤바꿔 재미를 유발시키는 개그코드가 유행하기도 했었다. 배우 이병헌의 애드리브였다는 후문도 있지만 몰디브도 모히또도 듣기만 하면 웃음을 자아내게 했고 지금도 이 말을 들으면 여운 짙은 영화의 주제와 무관하게 웃음코드로 재미있어 한다. 몇 년을 두고 자주 듣던 말이었지만 나에게 모히또는 그냥 영화의 대사일 뿐이고 몰디브는 에머랄드빛 해변이 아름다운 신혼여행지로 각광받는 곳이라는 생각뿐이었다. 모히또를 맛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몇 해 전 친척 조카가 작업공간을 고쳐서 아트카페를 열었다고 했을 때 일산까지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꽤 유명한 조각가 부부인 그녀의 작업실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한적한 작업실은 지역 사람들을 위한 카페이면서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지만 두 부부의 조각가로서의 삶의 과정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조카의 작품은 예술성과 대중성을 다 잡았다고들 한다. 빈말이 아닌 것이 서울의 지하철이나 거리, 유명 건물에도 설치되어 있다. 울산 언니가 이사한 아파트에서도, 청주의 새 아파트에서도 작품을 마주쳤으니 그 인기를 가늠할 수 있다. 가족의 일상이야기를 현대적인 감성으로 밝고 활기차게 표현하고 있는 그녀의 작품은 누가 보아도 좋아할 만한 톡톡 튀는 작품이다. 사실 내게 예술비평가들의 말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린시절 아래윗집에 살며 같이 놀이를 했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알고 있는 이의 작품이기에 정이 가고 볼 때마다 뿌듯해지는 것이다. 카페 1, 2층을 다 돌아보고 커피를 주문했다. 언제나처럼 아메리카노다. "커피는 아무데서나 마실 수 있으니 모히또 한 잔 마셔봐." 모히또? 영화에 나오는 대사, 몰디브에나 가야 맛볼 수 있는 특별한 것 아냐? 지금까지 이런 생각 탓에 한 번도 먹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고 카페 메뉴판에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었다. 어떤 것일까? 유리잔을 받아들고 처음 생각한 단어는 '청량감'이었다. 5월의 싱그러움을 그대로 담고 있는 비주얼이라고나 할까. 투명한 연두빛에 초록의 조각들이 떠 있고 라임 조각으로 멋을 더했다. 어떤 맛일까? 톡! 쏘는 새콤, 달콤, 상큼한 처음 맛보는 새로운 맛의 세계였다. 와! 모히또 한 잔에 반해버렸다. 모히또 시럽에 애플민트와 라임을 섞어 진토닉과 탄산수를 넣었다고 한다. 미각으로 이렇게 충격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모히또 잔을 들고 주변을 돌아보는데 그제서야 조카사위의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철학적이고 무거운 주제로 작업을 하던 그가 전혀 다른 스타일의 작업을 내놓고 있었다. 숲을 주제로 치유와 회복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단다. 작품의 주된 색채가 연두빛 모히또 색이었다. 두 조각가의 작품으로 채워진 감성적 공간과 너무나 잘 어울렸던 청량하고 상큼한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내가 느낀 멋과 맛을 좋은 이들에게 권하고 싶어서 학교에 모히또를 준비했다. 간간히 학교 숲을 보러 손님들이 방문한다. 학교 숲은 시간의 깊이를 더하며 아름다운 한 폭의 작품이 되어가고 있다. 손님들은 숲의 아름다움에 취하고 세심한 손길에 감동하고 그 속에 담겨 있는 초록교육 이야기를 마음에 품는다. 코스의 마지막은 학교에서 키운 애플민트 잎을 띄운 모히또 한 잔이다. 그가 누구든 상큼한 그 맛에 반해 싱그러운 숲에서의 하루가 더 오래 더 즐거운 기억으로 남길 바라는 마음이다.
까똑~ "엄마, 생신에 갖고 싶은 거 없으신가요?" 둘째 딸의 메시지다. "고마워. 생각해보고 말해 줄게." 라고 답장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히 갖고 싶은 게 없다. 퇴근 무렵 핸드폰 케이스를 보니 낡고 색깔도 바랬다. 아침에 이어 간단하게 답변을 보냈다. "핸드폰 케이스^^" 조금 있으니 딸아이가 폭풍 메시지를 보내왔다. 띵동~ 이건 어떤가요? 띵동~ 저건 어떤가요? 다양한 디자인을 링크해 보내주며 고르란다. 참 편리한 세상이다. 생일날 현관 앞에 택배 박스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라이언 캐릭터 핸드폰 케이스였고 다른 하나는 오렌지와 골드가 섞인 산뜻한 카네이션 꽃다발이었다. 까똑~ "엄마, 꽃이 무사히 도착했나요? 어버이날이 가까워 이번에는 카네이션을 골랐답니다." 평생 엄마의 생일 꽃은 자기가 책임지겠다더니 올해도 잊지 않았다.함께 보내온 화병에 꽃을 꽂고 핸드폰을 새 케이스에 장착했다. 꽃을 볼 때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정성껏 선물을 고른 딸아이의 마음이 느껴져서 참 좋다. 카네이션을 보고 있노라니 엄마가 생각나 전화를 했다. 딸의 생일을 여전히 기억하지 못하셨다. 다섯이나 되는 딸 아들 건사하느라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다른 건 총명하게 다 기억하시는데 자식들 생일은 기억하지도 챙기지도 않으신다. 생일 얘기는 뺐다. "엄마, 어버이날인데 뭐 갖고 싶은 거 없으세요?" "다 늙어서 필요한 게 뭐 있겠노! 없다." "그래요? 그럼 생각나면 말씀해주세요." 하고 끊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어버이날 빨간 카네이션 한 송이가 내 손으로 부모를 위해 뭔가를 산 유일한 것이었다. 어버이날 아침 부모님 가슴에 카네이션 한 송이씩 달아드리는 효도인 줄 알았다. 1년에 한 번 꽃을 달아드리는 그때가 부모님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날이기도 했다. 핀으로 살이라도 찌를까 온 신경을 다 쓰며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며 "엄마, 아버지 은혜 감사합니다."라고 겸연쩍게 말하고 어설픈 포옹이라도 해드리던 그 순간은 지금 생각해도 멋쩍다. 그나마 그것도 아니었으면 언제 우리 세대가 부모님을 안아드릴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이제는 선물도 꽃도 사드릴 수 있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부모님들이 원하는 선물 1호는 현금이라길래 평소에 선물 대신 용돈으로 마음을 대신했다. 엄마를 만나면 이건 큰딸이 사줬다. 이건 며느리가 사줬다 하시는데 내가 드린 현금 선물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니 정작 내가 서운했다. "이거 니가 사준 거 아이가!" 하실 때의 뿌듯함을 느끼고 싶어졌다. 이거 우리 막내딸이 사 준거라고 자랑하게 해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갖고 싶은 게 없으시단다. 뭘 사드릴까 고민하던 참에 엄마가 전화를 하셨다. "야야! 니 선물 생각해보라케가 보이 내가 봄에 입을 티가 하나도 없다 아이가. 얇은 티 하나 필요하데이." 먼저 딸아이가 보낸 꽃 선물 사이트를 찾았다. 빨간 카네이션 대신 신세대 카네이션을 받게 해드리고 싶었다. 몇 송이 되지도 않는데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잠시 망설이다가 클릭, 클릭했다. 지금 아니면 영원히 못할 수도 있는 일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바빠졌다. 이젠 옷 차례다. 여기저기 사이트를 뒤져보았다. 엄마옷, 할머니옷, 어르신 옷 다 검색했지만 디자인도 가격도 사이즈도 마땅치 않았다. 딸아이처럼 링크 걸어서 이건 어때요 물어보기엔 80대 후반 할머니 울엄마에겐 버거운 일이었다. 딸아이 따라하기는 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내일은 엄마에게 딱 맞는 화사하고 편한 '티'를 찾으러 육거리 시장으로 나가봐야겠다.
성불산 소나무숲길을 오르는데 마른 고사리 잎들이 보였다. 어라! 여기 고사리가 있겠는데 싶어 이리저리 찾아보았지만 바싹 마른 고사리 덤불만 가득할 뿐 아기고사리는 하나도 없다. 아직 철이 아닌가 보다. 이렇게 봄철 고사리가 날 때쯤 산을 오르면 시골 분교에서 근무할 때 만났던 아이가 생각나곤 한다. 6학년 여덟 명 중에 유난히 농사일을 잘하고 닭 키우기가 취미였던 승희라는 아이다. 승희는 닭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아이였다. 유치원 때부터 병아리를 키우기 시작해서 6학년이 되도록 닭에 대한 사랑이 변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닭장을 지어주시고 계란을 낳으면 아이 것으로 해주셨단다. 자기 닭장을 가진 아이는 닭 모이도 혼자서 주고 닭장 청소도 알아서 한다고 했다. 승희의 계란은 엄마도 함부로 꺼낼 수 없다고 하시면서도 대견해하셨다. 승희의 닭사랑은 학교에서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수업시간에는 닭 이야기를 주로 했고 시를 쓸 때도 그림을 그릴 때도 심지어 노래를 만들 때도 닭이 주제였다. 닭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었고 구체적이었으며 세밀하게 표현했다. 닭 이야기를 할 때마다 닭이 예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그 아이의 표정은 늘 해맑고 행복했다. 시골아이들이니까 닭도 키우고 농사일도 잘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때의 부모들도 내 자식만큼은 농촌 뙤약볕에서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의지가 대단했다. 커서 도시에 나가 번듯한 직장을 잡기를 바랐던 부모세대들의 가치관은 아이들이 농사일에 관심 갖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농사짓는 방법은커녕 들깨와 참깨를 구분할 수 있는 아이도 드물었다. 승희는 수학 문제 풀기, 과학 이론 이해하기 등에는 관심이 없었고 배우기 힘들어했지만 닭사랑 만큼 산과 들의 곡식과 나무에 대해서도 척척 박사였다. 화단의 꽃 심기, 나무 심기, 텃밭 풀 뽑기, 풀이나 채소 실어 나르기 등을 어른처럼 척척 해냈다. 호미질을 해도 수레를 끌어도 안정적이어서 늘 믿음직스러웠다. 이른 봄날 학급 아이들과 학교 뒷산에 식물을 관찰하러 갔던 날이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봄꽃과 새순을 살펴보고 있는데 승희가 밝게 웃으며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선생님, 여기 고사리 있어요!" 무덤가에서 고개를 숙이고 왔다갔다 하더니 고사리를 찾고 있었나보다. 뛰어가 보니 여기저기 고사리가 쏘옥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선생님, 고사리가 엄청 예쁘지요?" 고사리 하나를 들고 바라보고 있는 승희의 표정이 귀한 꽃 한 송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손놀림도 빨랐던 승희는 금방 한 손 가득 고사리를 내밀었다. 오동통한 고사리로 만든 고사리 꽃다발이 승희의 마음처럼 예뻤었다. 그날 이후로 난 고사리가 정말 예쁘다. 산길에서 고개 내밀고 쏘옥 쑤욱 올라와 있는 것을 보면 그 아이가 생각난다. 제비꽃, 민들레 가득 피어있었던 그 산에서 고사리가 예쁘다고 했던 그 아이 말이다. 서른 즈음이 되었을 승희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그려보곤 한다. 단언컨대 지금도 승희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고사리를 예뻐하던 그 눈빛일 것이다. 닭을 사랑하던 그 마음 그대로 일 것이다. 새로이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 학교숲의 새싹들이 주말 동안 또 얼마나 자랐나 살펴보며 아이들을 기다렸다. 학교버스가 들어오고 아이들이 애기사과꽃, 조팝나무꽃 사이로 조르르 달려와 맷돌 디딤석을 밟고 통통 뛰어온다. 저 아이들도 승희처럼 고사리 한 줄기, 닭 한 마리가 예뻐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으로 자라났으면 좋겠다.
쌩쌩~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로 운동장이 북적북적한다. 점심을 먹자마자 아이들은 줄넘기 100번을 하고 자전거를 탄다. 차고 앞에서 출발한 자전거는 새잎이 돋아나기 시작한 은행나무 앞을 돌아 직선 보도를 달린다. 수돗가 앞 으름덩굴 터널을 통과하여 구불구불 학교 숲의 꽃길을 따라간다. 조회대를 지나 할미꽃, 무스카리 환하게 피어있는 곡선구간을 달려 비비추 동산까지 가면 나지막한 오르막이 나온다. 여기는 초보들이 낑낑거리며 오르느라 정체되는 구간이다. 이어서 최고로 신나는 강당 앞 내리막길을 달리면 출발지점으로 돌아온다. 아이들의 뱅글뱅글 학교 한 바퀴 자전거 여행은 동네 어르신들도 구경하며 대견해하시는 진풍경이다. 작년 연말 체육 담당 선생님이 남은 체육 예산으로 자전거를 구입하고 싶다 했다. 굳이 학교에서 자전거를 준비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는데 자전거 못 타는 아이들이 의외로 많다는 말에 동의했다. 두발자전거 10대와 세발자전거 3대를 샀다. 저학년을 위해 자녀들이 타던 세발자전거와 작은 자전거 2대까지 갖다 놓으며 의욕을 보이는 오선생님의 정성으로 준비 완료했다. 유난히 눈이 많았던 겨울 아이들은 목이 빠지게 눈이 녹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새 학기가 시작되자 꽁꽁 묶어두었던 자전거를 개방했다. 짧은 점심시간은 자전거 전쟁이다. 한 대씩 모두에게 줄 수 없는 이상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 생기기 마련이다. 좌충우돌 말도 많고 탈도 많다. 목이 빠지게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아이들은 누가 많이 탔네 잘 타네 못 타네 줄넘기를 했네 안했네 말들도 많다. 어쨌거나 이런 모습마저도 사랑스럽다. 겨우내 움츠려있던 아이들이 자전거로 학교운동장을 돌며 활기를 더한다. 놀랍게도 자전거를 못 타는 아이가 50%가 넘었다. 각자 다른 이유로 배우지 못했다 한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다. 선생님들은 선뜻 자전거를 배우겠다고 나선 아이들을 격려하며 가르치기 시작했다. 자전거에 다리를 걸치고 두 발을 땅에 붙이고 뒤뚱거리며 균형을 잡는 아이들의 모습이 흡사 오리 같다. 페달에 발을 올려놓기가 무서운지 차마 몸을 싣지 못한다. 뒤에서 잡아주자 용기를 내 보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휘청한다. 친구와 선배, 선생님의 도움을 받으며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자전거를 배우는 아이들의 표정은 심각하기까지 하다. 그마저 귀엽다. 며칠 지나지 않아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이 늘었다. 반면 좀처럼 나서지 않는 아이들도 있다. 주위에서 눈길로만 자전거를 따라다닐 뿐 배우려 하지 않는다. 1학년 쌍둥이 자매가 조회대에 앉아 있길래 말을 걸었다. "자전거 한번 타 볼래· 교장 선생님이 뒤에서 잡아줄게." "저는 자전거 타지 않을 거예요. 무서워서 그래요." 둘은 아직 용기가 생기지 않는지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그래, 얘들아, 천천히 시작해도 돼. 용기가 생기면 그때 해도 늦지 않아.' 채근하지 않기로 했다. 타는 아이들이 많아지면서 위험도 많아졌다. 자전거 코스를 혼자서도 타 보고 아이들과 함께도 타 보았다. 그냥 지켜보는 것과 직접 달려보는 것은 달랐다. 어디가 위험한지 어느 곳에서 더 조심해야 하는지 어떤 규칙이 필요한지 파악할 수 있었다. 학생자치회를 중심으로 자전거 타기 규칙을 정해보게 했다. 중구난방으로 타던 것도 한 방향으로 정하고 자전거 타는 순서도 나름의 규칙을 정했다. 아직도 완전히 정착되진 않았지만, 아이들의 세계에는 그들의 방식이 생겨가고 있다. 우린 위험하지 않도록 지켜주며 더 기다려주면 된다. 아이들이 줄지어 자전거 타는 풍경이 참 예쁜 학교의 봄날이다.
작년 겨울 산악회를 따라 무등산으로 산행 가는 길이었다. 휴게소에 들러 화장실을 다녀온 후 간단한 아침을 먹고 버스에 돌아왔다. 버스가 출발하자 옆자리에 앉은 산행 친구가 핸드폰 메시지를 검색했다. '어라, 내 핸드폰은 어디 있지?' 아무리 찾아도 없다. 들고 나간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다음을 모르겠다. 잃어버렸나? 요즘 들어 깜빡깜빡할 때가 많았었는데 화장실에 놓고 왔나? 내 머릿속이 동그라미 하나를 도려낸 듯 뻥 뚫려버렸다. 어떡하지· 우선 옆 친구 전화로 휴게소 안내센터에 분실물을 습득했는지 물어봤다. 일말의 기대를 했으나 없단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편은 혹시나 누가 주워 갖고 있을까 봐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마음을 가다듬고 휴게소에서의 순간순간을 더듬어 보았지만 떨어뜨린 느낌도 없고 놓고 온 기억도 전혀 없었다. 잃어버렸다고 확정한 순간, 뭐부터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팽팽 돌렸다. 그래 카드 분실신고를 해야지. 매일 쓰는 카드 한 장만 끼워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분실신고를 하고 움직이는 버스 안에서 맥없이 앉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남편 전화로 전화 거는 일만 반복했다. 영영 못 찾으면 가장 난감하거나 안타까운 게 뭘까 생각해 보았다. 전화번호, 몇 년간의 사진들, 일정표, 메모 등등 많기도 하다. 그나마 전화번호는 주소록 앱으로 내보내기 해 놓았었다. 다행이다. 일정표와 메모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래, 사진이 문제다. 딸들과의 제주도 가족여행, 학교에서 찍어놓은 각종 꽃과 아이들의 모습, 소소하게 찍어둔 친구들과의 사진들을 모두 날려버렸다고 생각하니 상실감이 너무나 컸다. 클라우드로 자동 업로드 기능을 해제해버린 것이 후회되었다. 최근 몇 년간 컴퓨터에 파일을 옮겨놓지도 인화하지도 않았다. 내 인생에서 3년 6개월의 추억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니 온몸의 기운이 빠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살아온 기록과 정보가 송두리째 리셋된 것 같았다. 차에서 잠도 오지 않았다. 내 손안의 핸드폰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사진도 동영상도 쉽게 찍을 수 있었던 만큼 사라지는 것도 이렇게 한순간이다. 다음 휴게소에서 화장실을 다녀오니 어찌 빙긋이 웃는 남편의 표정이 수상했다. "연락 왔어요?" 물으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내민다. "당신 나가고 찾아보니 옆자리 친구의 옷 아래에 깔려 있었어." 무음으로 설정해놓아서 그렇게 전화했었어도 아무런 진동도 없었던 거였다. 1시간의 해프닝은 잃어버릴 뻔한 추억을 다시 찾은 것으로 끝났다. 해마다 학교 앨범을 한 권씩 만들어 두었던 시절이 있었다. 잘 나온 사진, 꼭 필요한 사진을 인화하여 학교 앨범으로 만들어 두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학교의 역사였던 만큼 꼭 필요한 일이어서 연례행사로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어떤가? 혹시 나의 잃어버렸던 추억과 같이 쉽게 찍을 수 있고 쉽게 얻을 수 있는 만큼 쉽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최근 학교 앨범을 정리하는 것을 보면서 생각보다 자료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교적 최근 사진도 없는 것이 많았다. 학교 홈페이지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사진들도 어느 순간 도메인이 바뀌면서 찾을 수 없게 되기도 했다. 컴퓨터를 바꾸면서 백업하는 과정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나의 추억이나 학교의 역사나 쉽게 가질 수 있었던 만큼 정리하는 것을 미루거나 저장하는 것을 미루면 어느 순간 훅 날아가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하겠다.
3월의 햇살치고는 제법 따사로운 날,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를 멀리 들으며 봄맞이하듯 교정을 걸었다. 터질 듯 말 듯 하던 매화가 하얗게 꽃망울을 터뜨려 화사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교문 옆 돌담길을 걷는데 "버르르 버르르" 작은 소리가 들렸다. 회양목 잔가지 사이에서 나는 소리였다. 벌들이 회양목 자잘한 이파리 속에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웬 벌들이 저렇게나 많이 몰려 있을까? 한참을 들여다보니 아주 작은 꽃들이 보였다. 겨울 언저리에도 연겨자색 잎을 지켜내고 있던 회양목은 남모르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향기도 제법이다. 그윽한 매화 꽃에 눈길을 주느라 회양목이 이렇게 꽃피워 벌들에게 꽃가루를 나눠주고 있는 줄은 몰랐다. 꽃들은 제각기 대를 이어나가기 위해 자신만의 모습으로 진화하였다. 화려한 꽃모양, 아름다운 색깔, 때로는 달콤한 향기를 뿜어내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회양목을 눈여겨본 적이 있었던가? 한겨울에도 잎을 떨구지 않아 사계절 원예식물로 각광 받으며 학교, 아파트, 공원 등 어디에나 있는 회양목이고 쓰이는 곳도 많다고 하는데 존재감은 없는 것 같다. 교육자의 상상력의 끝은 늘 아이들에게로 향한다. 학교에도 회양목 같은 아이들이 종종 있다. 학생들 중에는 유난히 능력이 뛰어난 존재감을 뽐내는 아이들이 있다. 학습, 운동, 악기, 노래 등에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실력을 보여 주목을 받는다. 학교는 그런 아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성장시켜 주기 위해 노력한다. 반면 회양목과 같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아이들도 있다. 앞장서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조용히 받쳐주고 무리 없이 학교생활을 하는 아이 말이다. 재작년 졸업한 지현(가명)이가 그랬다. 유난히 밝고 활발한 아이들 속에서 지현이는 움츠린 어깨, 자신없는 걸음걸이, 잘 웃지 않는 멋쩍은 표정으로 일관했다. 성실하고 심성도 착하며 학습능력도 뒤처지지 않는다고 했다. 왜 저 아이는 능력에 비해 주목받지 못할까 궁금했다. 선생님들은 타고난 성격이 내성적이고 수줍음도 많지만 뛰어난 형제들과 비교해 자기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어떻게든 지현이의 자존감을 끌어 올려주고 싶었다. 담임선생님도 꾸준히 노력하고 있는데도 쉽지 않다고 했다. 아이들의 변화는 칭찬의 작은 말 한 마디로 시작되기도 한다. 책을 좋아하는 지현이에게 다른 아이들 몰래 교장실에 불러 딸들이 읽던 책을 선물했다. 복도에서 만나면 읽고 있는 책에 대해서 물어보고 웃는 모습이 예쁘다 했다. 지현이 오빠가 하교하는 길목에 서서 기다렸다가 잠시 불러 지현이 놀리는 말을 자제해 달라고 부탁도 했다. 교사로 살면서 가장 보람된 것은 이렇게 작은 관심만으로도 아이들의 표정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어느 날부터 지현이는 읽고 있는 책 느낌을 얘기해주기도 하고 복도에서 나를 만나면 친근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지현이 웃는 모습이 참 예쁘네!"라고 했을 때 멋쩍은 표정으로 "어? 아닌 것 같은데!" 했던 아이가 얼마 후엔 "웃으며 인사해주니 고마워!" 라는 말에 "칭찬해주셔서 감사해요."라고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나무든 꽃이든 사람이든 저마다의 모습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회양목은 그저 이른 봄부터 부지런히 꽃을 피워내며 자신의 삶을 살 뿐이다. 지현이도 그랬을 것이다. 다만 자기의 존재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는 사실 알게 되면 더 신나고 행복하게 뿌리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얼마 전 인터넷 기사를 보다가 마음에 드는 제목 하나를 발견했다. 기자가 옆에 있었다면 맞아 맞아 맞장구라도 쳐주고 싶었던 순간이었다. "누구나 지칠 때 힘이 되는 '명대사' 한마디 있지 않나요?" 대중문화평론가 정덕현의 책 소개 글이었다. 집에만 머물러야했던 작년 한 해 명품 드라마 다시보기에 푹 빠져 살았다. 주인공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명대사였다. 드라마 속 말들은 어쩜 그리 구구절절 가슴을 후벼파는지 대사 한 줄에 가슴 아팠고 기뻤으며 공감 백배였다. "힘들지? 근데 산을 넘다 보면 다음 산은 조금 더 쉽게 넘는 법을 알게 될 거야." 이 말은 드라마 명대사가 아니라 내가 10년 전에 했던 말이란다. 며칠 전, 같이 근무했던 영양선생님이 소통메신저로 짧은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내가 그 시절에 했던 한 마디가 학교 일로 힘들 때마다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단다. 10년을 거슬러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대학을 갓 졸업한 새내기 직장인이었던 선생님은 겨우 23세의 어린 나이였다. 작은 학교였지만 급식 관련 업무를 모두 맡아서 해야 하는 책임을 어깨에 짊어지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함께 일하는 조리실무원들은 선생님의 엄마 나이뻘로 요리에 베테랑들이셨다. 게다가 학교는 유치원 아이들부터 60대 어른들까지 다양한 구성원들이 있으니 입맛도 모두 달라 적은 급식예산으로 모든 이들의 입맛을 만족시키기 쉽지 않았을 터였다. 지치고 힘들었던 어느 하루 내가 건넨 위로의 말이 평생 "마음에 남는 말"이 되었다니 나로서도 영광이고 감사한 일이다. 드라마 속의 명대사처럼 멋진 말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유시민 작가님의 말이 생각난다. 말이나 글로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건 불가능한 것이다. 혹시 내 어떤 말로 변화가 시작이 되었다 한다면 그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라고 했다. 준비가 되어 있었고 찾고 있었던 말일 뿐이라는 것이다. 내가 그날 선생님이 꼭 듣고 싶었던 말을 했었나 보다. 퍼즐을 맞추듯 선생님의 빈 마음 구석에 콕~ 들어가서 10년 동안 용기도 주고 위로도 하며 살아있었다는 것이 신기하다. 내 마음에도 오래 남아있는 말들이 있다. 초임 시절 40명이 넘는 반 아이들과 좌충우돌하며 학교생활을 했던 시기였다. 결혼하고 첫 아이를 낳아 키우느라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유독 그 시절을 생각하면 정신없었고 힘들었던 기억 탓인지 몸이 굳어지곤 하는데 햇살처럼 김성옥 선생님의 밝은 얼굴과 호탕한 웃음을 생각나면 긴장이 풀리게 된다. "자기는 나이도 어린데 어쩜 그렇게 생각이 깊어!" "김 선생은 표정이 밝아서 좋아. 웃는 모습이 정말 예쁘네." 내가 무얼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허둥지둥 막내 교사가 얼마나 깊은 생각을 했으랴! 얼마나 많은 배려를 했을까? 까마득한 대선배님들 사이에서 나의 존재감이 있었을 리 만무한 상황이었다. 선생님은 그런 나를 지켜봐주고 좋은 점만 찾아내어 말로 표현해주셨다. 아직 하는 일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시절 내가 하는 말에 맞장구쳐주시고 내가 가는 길이 맞다고 고개 끄덕여주셨다. 인정해주는 긍정과 칭찬의 말이 내 자존감을 높여주었고 길을 잃고 헤맬 때 다시 일어설 힘과 용기를 주곤 했다. 누구나 마음에 남는 말 한마디는 있을 것이다. 드라마 속 명대사든 일상 속의 평범한 말이든 내 마음의 퍼즐에 딱 맞는 한마디 말이다. 3월 새롭게 시작되는 새학기다. 진심을 담은 긍정과 칭찬의 한마디가 마음에 향기로 남는다는 것을 되새겨본다. 오늘은 어떤 따뜻한 말 한마디 해볼까나!
방학은 아이들에게 꽉 짜여진 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다. 종업식을 끝내고 집으로 홀가분하게 돌아가는 아이들의 얼굴이 세상 행복해 보였다. 교사시절, 나에게도 방학은 꿀맛 같았다. 학기말이 다가올 쯤이면 내 온몸의 에너지가 다 방전되어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어지곤 했다. 방학동안 배터리를 재충전한 후에야 또 힘을 내어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 타고난 튼튼한 체력을 가진 나도 그랬는데 여리여리한 다른 선생님들은 어떠했을까 지금도 궁금하다. 사람들은 학교생활이 다른 직업에 비해 여유로울 거라고들 한다. 초등학교의 경우 늦어도 2시 40분이면 수업이 다 끝나고 퇴근시간도 빠르니 얼마나 여유롭겠냐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각자 자기 직업이 더 바쁘고 힘들다고 하지만 학교에 와서 하루만 지내보면 선생님들이 얼마나 바쁘게 생활하는지 알게 된다. 대부분 이렇게까지 바쁘고 힘든지 몰랐다고들 한다. 교사는 왜 이렇게 바쁘고 힘든 걸까? 일반 회사원들의 일과 무엇이 다른가? 아침활동, 수업, 점심시간, 수업, 업무처리, 수업준비, 부진학생 지도, 특기지도, 각종 행사들, 학생평가 등등 이 안에 다른 것이 뭐가 있을까? 내 교사시절을 돌이켜보면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종종거렸고 밥 한 끼 느긋하게 먹어본 적이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10분의 쉬는 시간에도 학습활동 마무리를 못한 아이들 챙기고 다음 수업 준비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그 짧은 시간에 30여 명의 아이들 숙제 챙기고, 일기장 검사를 틈틈이 해주며 집에 가기 전에 몇 마디라도 적어 주노라면 눈은 핑핑, 손은 삭삭, 다리는 후다닥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화장실 갈 타이밍을 놓치기 일쑤였던 탓에 지금도 화장실 참는 버릇이 고쳐지지 않는다. 점심시간도 마찬가지다. 밥 한 숟갈 뜨다 보면 아이들은 온갖 사연들로 담임을 불러댄다. 쏟았다. 누가 건드린다. 배가 아프다. 먹기 싫다. 고학년은 그런대로 알아서들 하지만 1, 2학년들은 정말 천방지축이다. 내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후다닥 먹던 버릇이 생겨 지금도 여전하다. 가정에서 한둘 돌보는데도 하루종일 정신이 없는데 열, 스물을 한꺼번에 가르치며 돌보는데 어떻겠는가· 돌봄에 방과후수업도 학교에서 도맡아야 하는데 어찌 여유롭겠는가? 그렇다고 이것만으로 기를 다 뺏긴 듯 넉다운이 되는 걸까 궁금했었다. 내 결론은 "선생님들의 학교생활"에는 가르치는 일과 더불어 맡은 아이들 수만큼 다양한 삶의 무게가 더해지기 때문인 것 같다. 교사가 날마다 만나는 아이들은 개성과 능력, 자라온 가정환경이 너무나 다르다. 이 말은 수업에도 생활지도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패턴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각기 다른 아이들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보며 정서적으로 공감하고 모든 학생의 학습능력을 향상시키며 인성까지 포기하지 않고 끌어안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힘들다. 아이들의 삶을 송두리째 맡겨놓고도 믿어주지 않는 학부모라도 만나게 되면 최악이다. 때론 감정이 과해서 때론 감성이 너무나 부족해서 언론의 뭇매를 맞는 교사도 있다. 정말 일부분이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 함께 하고 있다. 때론 부모의 빈자리까지 채워주면서 말이다. 방학이다. 신학기 계획수립, 예산, 각종 공모사업, 연구학교 계획서, 새 학년 계획 그리고 연수 등으로 선생님들은 여전히 바쁘다. 쥐어짜듯 에너지를 모두 뽑아내며 치열하게 학년을 마무리했으니 잠시 쉬어갈 시간입니다. 선생님들, 신학기 학교생활을 위해 충전기를 꽂으세요!
퇴근 후 스타킹을 벗는데 발뒤꿈치가 까슬까슬하다. 어라! 다른 쪽을 문질러 봐도 똑같다. 의자에 앉아 무릎 위에 발을 올려놓고 발바닥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니 가뭄에 메말라가는 흙길같이 거칠다. 엄지발가락은 딱딱해졌고 여기저기 작은 굳은살도 보였다. 쉰이 넘도록 나를 지탱하느라 애를 썼으니 멀쩡한 게 이상하지 위안하면서도 속상했다. 씻고 나서 얼굴에 바르던 로션을 발바닥에까지 발라주었다. 발은 내 몸의 다른 부위에 비해 대접을 덜 받은 것이 사실이다. 밖으로 보이는 얼굴이나 손에 찍어 바르는 고급 크림은 고사하고 온몸에 바르는 바디로션도 발바닥에는 생략했다. 가구나 옷처럼 보이지 않는 부분에까지 꼼꼼하고 세심하게 챙겨야 명품이 되는 건데 내 발을 너무 홀대했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켜자마자 광고가 내 눈앞에 쑥 나타난다. 보송보송 아기 같은 발 이거 하나로 된다고 각질제거 크림을 권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얘들은 내 발에 각질이 생긴 것을 어떻게 알았담!' 특별히 검색해보지도 않았는데 정보가 떡 하니 나타났다. 가끔 생각만 했을 뿐인데 내 생각을 알고나 있는 듯 옷이며 신발이며 슬쩍 권하더니 오늘도 그런다. 빅데이터는 내 고민을 찰떡같이 알아차리고 관심 갈 만한 것을 들이댄다. 참 편리하면서도 무서운 세상이다. 정보제공에 감사하며 부드러운 발바닥을 만들어주는 비법이 뭔지 찬찬히 읽어보니 크림을 사서 바르면 된다고 했다. 한 번만 바르면 굳은살도 각질도 싹 벗겨지면서 새살이 돋아나 아기피부처럼 된다니 난 괜히 걱정을 했나보다. 한번 클릭하니 연관 검색어에 각질제거 크림이 수십 가지를 추천했다. 신박한 각질 제거기도 있었다. 저걸 사야하나 망설이다가 미뤄뒀다. 다음 날 저녁 설거지를 하고 소파에 앉으니 남편이 TV 앞에서 신문지를 깔아놓고 '윙~' 하며 발바닥을 밀고 있다. 남편의 손안에서 손바닥만한 둥그런 기계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광고에서 봤던 각질제거기였다. 남편은 언제 저걸 구입했담!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도 윙~소리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남편이 굳은살은 남편 것일 뿐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도 내 일이 아니라 듣고도 보고도 지나쳐버렸나 보다. 내 발뒤꿈치가 까슬까슬해지니 안보이던 것도 보이고 오래된 기억도 소환했다. 아버지의 발이다. 어렸을 때 보았던 아버지의 발바닥을 떠올리는 것은 덜 아문 상처를 건드리는 것처럼 아프다. 농사꾼이셨던 아버지는 사시사철 쉬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고단한 농부의 삶을 사셨고 겨울 농한기에는 산불감시원 일까지 하셨다. 어느 겨울 아버지가 무명실을 찾으시며 꿰어달라고 하셨다. 어디에 쓰시려고 그러시나 했더니 양말을 벗으셨다. 일곱 식구 삶의 무게를 오롯이 혼자 지고 걸어오신 아버지의 발이었다. 굳은살이 견디다 못해 갈라져 있었고 걸을 때마다 아프다며 꿰매야 된다고 하셨다. 나는 보는 것만으로 생살이 찢어지는 아픔이 느껴져 눈을 질끈 감았다. 아버지는 굳은살은 아프지 않다고 말씀하셨지만 어린 나는 차마 아버지의 발에 바늘을 찌르지 못했다. 내 발 뒤꿈치에 생긴 까슬까슬한 각질과 조그만 굳은살에 화들짝 놀라 이것저것 찾아보면서 정작 남편의 오래된 굳은살은 내 고통이 되지는 않았음을 깨달았다. 아버지의 갈라진 발이 속상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 상처에 연고 하나 발라드릴 생각도 못했던 무심한 딸이었다. 내 일이 돼서야 비로소 깊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남의 고통과 슬픔이 내 아픔의 크기만큼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는 가지며 살아봐야겠다.
2020년이 채 1주일도 남지 않았는데 코로나-19는 잦아들기는커녕 보란 듯이 기세를 떨치고 있다. 연말이면 송년의 아쉬움과 새해를 맞는 기대로 괜히 들떠 있었던 예년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연일 천 명대를 오르내리는 확진자 수에 가슴이 콩닥콩닥 방망이질하듯 뛴다. 보이지 않는 적이 어디서 공격할지 모르니 숨죽이고 움츠려 어쩔 줄 모르는 군인 같다.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연말이다. 3~5월 아이들이 없는 학교에서 등교를 손꼽아 기다리던 그 날들의 떨림이 다시 울려온다. 매일 긴장의 연속이었던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내 노력만으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속수무책인데 나로 인해 모든 것이 막힐까 꼼짝달싹할 수가 없다. 학교의 1년을 되돌아보면 우리 선생님들 그 와중에 참 잘 해냈다. 도시학교와 달리 시골학교는 전체 등교를 계속했고 계획했던 방과후수업도 행사들도 해냈다. 단계별 방역 매뉴얼을 준수하며 해내느라 모든 것이 복잡해졌고 조심스러웠으며 힘들었다. 수도 없이 막혔고 바뀌고 또 바뀌었다. 실행가능성 자체를 의심하며 계획하는 행사나 프로그램은 교사를 지치게 했고 그 피로도는 극에 달했다. 생전 듣지도 보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상황 속에서 선생님들은 수없이 좌절하고 허탈해하면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툭툭 털고 또 하루를 묵묵히 해내고 버텨냈다. 우리에겐 아이들이 있으니까. 교사가 아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우리 선생님들이 어떤 마음을 담는지 어떻게 준비하는지 얼마나 최선을 다하는지 들여다보면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 우리 학교뿐이랴! 학교들마다 다른 상황에서 발 빠르게 대처해내며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있다고들 한다.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학교의 최고 의사결정권자로서도 그 어느 때보다 고민이 많았던 해였다. 아이들이 제일 기다리던 수학여행, 스키캠프, 1박 2일 학교축제를 포기할 땐 정말 안타까웠다. 코로나 확산세가 조금 꺾였을 때 우리는 할 수 있는 것들은 서둘러 해냈다. 도시체험학습 대신에 학교 근처 체리농장, 사과 과수원으로 다녀왔고 밖은 위험하니 버블쇼는 운동장에서, 뮤지컬, 마술관람도 학교로 불러 조심조심 운영했다. 선생님들의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사건은 "쓰담쓰담 손난로-손이 꽁꽁 난로가 필요한 요즘, 슬기로운 우리들의 멋진 하루" 행사였다. 미루고 미뤘던 운동회와 학습발표회 행사를 강당준공식 겸해서 12월 24일에 하겠다고 계획했다. 12월 3일, 코로나가 확산세가 심상치 않다는 뉴스에 선생님들은 불투명한 미래에 또 긴장했다. 이럴 땐 빠른 판단과 결정이 필요하다. 3주 후를 예측할 수 없다면 눈에 보이는 바로 다음 주에 하자 했다. 교장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선생님들이 동의했고 1주일 만에 가능할까 걱정했던 것은 기우였다. 완벽하게 준비되었고 아이들도 멋지게 해냈다. 발레복과 화려한 반짝이 옷 등을 입고 1년 동안 준비한 끼를 마음껏 표현했다. 부모님께는 영상으로 보여드렸고 외부손님을 초대해야 하는 준공식은 과감히 포기했지만 우리는 즐거웠다. 문제의 12월 24일 확진자 수는 1,241명이었다. 선생님들은 그날의 결정을 '신의 한 수'라 했다. 교무부장의 표현을 빌자면 한 편의 쫄깃쫄깃한 첩보영화를 찍은 것 같았단다. 모든 일에 "평범함은 거부한다!"고 외치며 좀 더 다르게 독특함과 개성을 찾았던 우리들에게 지금 가장 절실한 말은 "평범한 일상"이다. 끝도 없는 벼랑길을 걸어왔던 2020년의 끝이 보인다. 이 아슬아슬한 연말이 지나고 새해가 오면 코로나의 끝을 잡고 평범한 일상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월요일 아침, 차에서 내려 잰걸음으로 강당으로 달려갔다. 주말에 시공한 벽면 안전매트가 어떨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완공된 모습을 보자마자 나도 교감도 소리를 질렀다. "와아! 정말 마음에 들어요." 뒤따라 온 현장소장도 "걱정했는데 세련된 색으로 잘 고른 것 같아요."라며 웃으셨다. 나도 그제야 어깨에서 무거웠던 걱정을 내려놓았다. 우리는 지난 8개월간 다목적 강당 건립공사장을 둘러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설계부터 발주, 계약, 공사감독 모두 교육청에서 했기 때문에 학교에서 관여할 일은 별로 없다. 그럼에도 매일 공사장을 들렀던 것은 아이들이 사용할 강당이 좀 더 아름답고 효율적인 공간으로 건축될 수 있도록 과정 안에서 개입하고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서였다. 돌이켜보면 정말로 중요한 순간들이었다. 특히 마무리 단계에서는 나무 한 포기, 돌 한 개 옮길 때도 지켜보며 관여했다. 아이들의 눈높이로 문제점이나 불편한 사항을 미리 따져보고 수정하도록 요구했고 덕분에 때맞춰 해결할 수 있었다. 대규모 공사를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이 공급될 자재의 색과 디자인을 고르는 일이었다. 공사단계별로 사용자인 학교에 많은 선택 기회를 주었다. 지붕 색, 외벽 벽돌, 실내 마감재의 재질과 색, 디자인, 무대막, 내벽 안전매트 등을 골랐다. 건축에 대한 기초지식도 없거니와 집수리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사람으로서 참 난감했다. 샘플로 가져온 작은 나무 조각, 작은 벽돌 하나가 건물 전체에 입혀졌을 때 어떻게 될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2차원의 평면에 그려진 예쁜 디자인이 3차원의 입체로 구현되었을 때 어떤 모습일지 그려가며 골라야 했다. 주변의 색과 모양이 어울리는지 고려하지 않으면 생뚱맞은 느낌이 들 것이 분명하고, 크기도 가늠해가며 선택해야 했다. 요게 좋을까? 저게 좋을까? 많이 고민했다. 다행인 것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이들과 교직원의 의견을 모아 한 가지씩 정리해 나갔고 결과도 대부분 만족스러웠다. 현장소장도 교육청에서도 학교의 작은 의견에도 귀 기울여 주었기 때문에 마음껏 얘기할 수 있었다. 교감도 교사들도 출근하지 않은 여름 방학 어느 날, 업체에서 안전매트의 색을 고르라며 샘플을 보냈다. 초등학교에서는 밝고 선명한 원색이나 화사한 파스텔톤의 색을 많이 한다며 참고자료도 보내주었다. 사진에는 빨강, 파랑, 초록, 연두색 등의 매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혼자 고르려니 부담스러웠지만 난 짙은 고동색과 한 톤 밝은 갈색으로 골랐다. 밝은 나무색 바닥과 내벽에 어울려 안정감을 주고 때가 타지 않아 관리하기도 쉬운 색이며, 무엇보다도 세련된 공간이 될 것 같았다. 납품업체의 생각은 달랐는지 안전매트를 벽면에 시공하기까지 세 번이나 확인 전화가 왔다. 다른 학교와는 다른데 정말 이 색이 맞느냐고 자꾸만 묻는다고 했다. 아이들 색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내 선택을 고수했고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다행히 준공검사에 참여한 분들도 공감해주셨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좋아했다. 못 이룰 꿈과 같았던 강당에 첫발을 들여놓던 날 아이들도 "와! 예쁘다. 멋지다." 환호성을 질렀다. 어려운 색 고르기를 하면서 "아이들의 색"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사업자들은 아이들이 쓰는 공간에 일반적이라며 몇 가지 한정된 색을 추천하곤 했다. 의문은 '아이들의 색이 따로 있나·'는 것이다. 결론은 아니다. 아이들이 사용하는 공간과 용품이 밝고 화사해야 정서발달에 좋다고 한다. 백번 공감한다. 덧붙이자면 어두운 색이 조화롭게 배색되어야 밝고 화사함이 더 빛난다는 것이다.
연세 지긋한 어르신이 학교를 기웃거리고 계셨다. 전쟁이 나던 1950년도에 2학년을 다닌 동문인데 학교가 궁금해서 들어오셨단다. 여긴 이런 건물이 있었어. 저긴 저런 건물이 있었어. 하시며 추억을 더듬으시다 교문 옆에서 노랗게 물든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가리키며 그때도 저 나무가 제법 컸다고 하셨다. 올해 딱 100주년이 된 우리 학교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이다. 학교에 은행나무는 두 그루다. 하나는 아담한 크기로 해마다 잔디밭에 큼큼한 은행알을 떨구는 부인나무로 다정하게 서 있다. 아름드리 나무는 작은 동네 관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고 할 만큼 키가 크고 잘 생겼다. 학교 앞쪽은 주로 상록수인 소나무가 자리 잡고 있어 연중 큰 변화가 없는데 이 두 나무가 봄부터 가을까지 다양한 계절을 펼쳐놓는다. 한여름엔 뜨거운 태양을 피할 수 있는 긴 그늘을 드리워 아이들의 쉼터가 되고 선생님과 옹기종기 모여앉아 수업하는 공간이 되어준다. 나무아래 보도블록에 그려놓은 달팽이 놀이터에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놀 땐 긴 팔을 드리우고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는 것 같다. 늦가을엔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을 후두둑 떨어뜨려 노란색 호수 하나를 금방 만들어 놓고 아이들을 불러 모은다. 벤치에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으면 너털웃음을 지으며 100년의 학교 역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할아버지 같기도 하다. 여름이 지나면서부터 자꾸만 은행나무를 올려다보게 된 것은 순전히 2학년 종혁이가 수업시간에 쓴 글 때문이다. 2학년 담임 안선생님은 수업일기를 밴드에 쓰고 계시는데 학부모님들과 함께 교장인 나도 초대해 주었다. 1주일에 한두 번씩 수업사진과 동영상, 아이들의 수업결과물 등 다양하게 올려놓으신다. 하나하나 살펴볼 때마다 남자아이 둘과 꽁냥꽁냥 재미있게 만들어가는 수업에 빠져들게 된다. 달랑 2명인 학급을 마치 20명 인양 열심히 준비해서 가르친다는 교감선생님의 말처럼 안선생님의 수업은 역동감이 넘친다. 둘만 가르치기엔 너무나 아깝다 노래를 불렀더니 9월에 한 명이 전학을 왔다. 소영이가 합류하며 2학년 수업은 더 활기차고 재미있어졌다. 태풍이 두어 차례 지나간 가을 초입에 2학년들은 학교에 있는 식물을 관찰하고 사진일기를 썼다. 은행나무를 선택한 종혁이의 쓴 글이다. '태풍이 지나가고 난 후 우리학교 은행나무에 커다란 비닐봉지가 걸려 있다. 지난번에는 형들이 뻥 차올린 축구공이 걸려 있었다. 좀 더 있으면 은행나무가 트리가 되겠다.' 평소에 말이 없고 수줍음이 많은 종혁이라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선생님의 수업일기를 보면서 왜 안선생님이 종혁이를 '작은 시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셨는지 이해됐다. 앞니 빠진 시인 종혁이가 연필을 꾹꾹 눌러 시를 쓰고 있는 모습이 상상되면서 내 입술에 힘이 가고 입꼬리도 올라간다. 어르신의 손끝을 따라 은행나무를 올려다봤다. 여전히 비닐봉지가 매달려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비닐봉지가 사랑스럽다. 교장의 눈으로만 봤을 때 은행나무에 걸린 비닐은 쓰레기였다. 크레인이나 있어야 내릴 수 있는 높은 곳에 걸려 있어 해결할 수 없는 천덕꾸러기였다. 종혁이의 눈으로 종혁이의 마음결을 따라 바라보니 은행나무의 비닐봉지가 사랑스러운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바뀌어 보였다. 볼 때마다 웃음이 난다. 은행나무는 70년 전 2학년이었던 어르신을 알아보고 700명이 북적거렸다던 그 옛날을 그리워할까? 종혁이의 은행나무는 언제까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 생각이 많아졌다. 2학년 종혁이의 은행나무 트리를 언제까지나 지켜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