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이 돌아왔다. 평가 담당 교사가 학생 생활 통지표 「나의 배움과 성장 이야기」를 가져왔다. 학생들이 한 학기 동안 참여한 교과 학습 평가, 출결 상황과 가정통신을 학부모에게 보내는 성장 기록지다. 아이들의 배움과 성장을 들여다보고 싶어 반별로 하나씩 넘겨 가면서 찬찬히 살펴보았다. 오늘은 특별히 가정통신이 눈에 들어왔다. 학급별로 읽다 보니 선생님들의 성격이 그대로 보였다. 학생 개인별로 잘한 점과 보충할 점에 대해 안내한 글이었다. 어느 선생님은 간결하고 간단하게 어떤 선생님은 세심하고 자세하게 적었다. 꼼꼼하기로 유명한 선생님은 과제를 하지 않은 횟수까지 정확하게 안내하고 2학기에는 좀 더 성실하게 과제수행을 위해 노력해 달라고 쓰셨다. 한 선생님은 학생의 행동 특성과 학습 태도를 다양한 나무에 비유해 시적으로 표현했는데 아이들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서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기도 했다. 어떤 방법이 더 낫다, 못하다 하기는 어렵다. 다만 생활 통지표에는 학부모가 궁금하게 여기는 학생의 학교생활을 최대한 친절하고 자세하게 알려주어야 한다. 학생의 현재의 모습을 과정 중심으로 객관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성장 가능성과 잠재력까지 살펴서 기술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교사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학생의 배움과 성장을 끌어내는 교육 전문가임을 여기서 보여주어야 한다. 교장인 내가 읽어도 담임교사가 어떤 마음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지 느껴지는데 오직 내 아이만 바라보는 학부모는 어떨까? 정성을 다한 글 한 줄에서 교사의 깊은 고민과 아이들을 위한 사랑의 마음이 보일 것이다. 교사 평가와 더불어 학생들은 「나의 학교생활 돌아보기」를 별지로 작성했다. 학교생활과 학습 태도로 구분해서 자기 평가를 했다. 기억에 남는 학습활동과 이유, 내가 성장한 점과 2학기를 위한 나의 다짐도 적었다. 아직 글쓰기가 서툰 1~2학년은 간단하게 작성할 수 있도록 하였고 3학년부터는 더 구체적으로 이유를 밝혀 쓸 수 있게 두 가지 버전이었다. 아이들의 글을 하나씩 넘겨 가면서 읽으니 한 학기 동안 어떤 활동을 가장 즐겁게 참여했는지 어떤 순간에 감동하였는지 알 수 있었다. 아이들도 성향에 따라 달랐다. 자신에게 아주 후한 아이와 대조적으로 충분히 잘하고 있음에도 자신에게 매우 엄격하게 점수를 주는 아이도 있었다. 짧은 문장으로 아이의 전부를 파악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살펴볼 좋은 기회가 되었다. 하나씩 넘기는데 3학년의 글씨가 눈에 띄었다. 또박또박 반듯하게 썼고 정성스러웠다. 얼마나 바르고 예쁘게 썼는지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글씨는 자기의 얼굴이라고 했다. 예전보다 아이들의 필체가 많이 흐트러진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예쁜 얼굴이 어디 달라질까만 또박또박 쓴 글씨의 주인이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는 태도를 지닌 아이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여름방학을 앞두고 선생님들은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아이들은 한껏 들떠서 방학을 기다린다. 한 학기를 마무리하며 학생을 평가하는 교사도 자신을 돌아보는 학생도, 글과 글씨에서 지금까지 쏟아온 최선의 모습을 보여주었기를 바란다. 글과 글씨는 자기의 마음이요 태도이며 얼굴이기 때문이다.
대학시절이었다. 어느 날 같은 과 친구에게 오빠의 죽음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군의관으로 군대 생활을 하던 오빠가 특별히 아픈 곳도 없었는데 갑자기 사망했다는 것이다. 사망 원인이 불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자세한 설명도 없었고 군에 해명을 요구할 수도 없었다고 했다. 슬픔에 가득 찬 친구를 옆에서 바라보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었다.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도 모르겠고 내가 해줄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오빠의 장례식을 치르고 온 친구는 오랫동안 슬퍼했다. 매일 같이 울고 다녔다. 강의를 듣다가도 갑자기 울었고 밥을 먹다가도 눈물을 흘렸으며 길을 가다가도 갑자기 주저앉아 흐느꼈다. 나와 주변 친구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이 얼마나 사무치면 그럴까 싶어 안타까웠고 옆에서 친구의 눈치를 봤다. 처음엔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해서 어색하고 멋쩍었는데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친구를 보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우리는 그 아이만 나타나면 분위기가 숙연해지고 조심스러워지는 상황이 반복되자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친구들은 너무 오랫동안 슬퍼하는 친구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너무 과하게 슬퍼한다고 말이다.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6개월 이상 그렇게 울고 다녔다. 다행히 신이 사람에게 망각이라는 선물을 준 덕분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그 아이의 울음도 잦아들었고 나는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 얼마 전 가족을 잃는 슬픔을 겪게 되면서 잊고 있던 그 일이 다시 소환되었다. 내 조카 정훈이가 세상을 떠났다. 서른이라는 어린 나이에 암이 발병했다. 수술하고 잘 치료해서 완치 판정을 받으러 간 날 또 다른 암을 발견했다. 10여 년을 의연히 버텨왔는데 하늘이 데려가 버렸다. '조카를 잃었다.' 이 짧은 문장을 쓰는데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번쩍 전율이 흐르고 손끝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 벌써 두 달 보름이 지났는데도 금방이라도 흐를 것처럼 눈물이 고이고 가슴이 뻥 뚫린 사람 같아진다. 언니만 생각만 하면 가슴이 미어지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그 누구보다도 의지가 강하고 끝까지 온 마음을 다해 병간호하던 큰언니가 몸부림치며 슬퍼하는 모습이 나에게 전이된 것 같다. 일상생활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을 그대로 하다가도 톡 하고 건드리면 터지는 봉숭아 씨앗 주머니처럼 슬픔의 주머니를 톡톡 터트리는 것 같다. 어떨 땐 같이 했던 추억의 시간이 그렇게 만들고, 조카 또래 나이의 사람만 봐도 그렇다. 드라마의 슬픈 장면은 그냥 넘길 수 없다. 친구 오빠의 죽음은 온전히 나의 일이 될 수 없었고 남의 일이라서 그랬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 가족의 일이 되니 과한 슬픔의 표현이라는 말은 틀린 말이 되었다. 대학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친구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아마도 똑같이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모르고 옆에서 그냥 서성일 것 같다. 다만 가족을 잃은 슬픔은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끌어안고 가는 것이고 묻어두었다가도 언제든지 꺼내어 마주하며 충분히 슬퍼해도 된다는 것을 알기에 더 오래 함께 슬퍼하며 지켜봐 줄 것 같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늘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언니의 시간에 끼어들어 이런저런 이야기 들어주기, 안부 물어주기, 맛있는 것 챙겨주기 등을 하려고 노력한다. 말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그냥 누군가가 옆에서 함께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백옥같았던 조카의 얼굴이 떠오를 때면 '정훈아!' 한 번 읊조려보고 검지 손가락으로 눈가의 눈물을 살짝 찍어내는 일이 언제까지가 될지 나도 모르는 일이다. 아주 많이 오래 슬프다.
사람을 잘 기억해야 성공한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난 성공과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생체시계와 기억 능력은 줄어들며 뇌의 작동속도 또한 느려진다더니 요즘 나의 상태다. 분명 아는 사람인데 이름과 호칭이 생각나지 않아 순간 당황하는 일이 많아지는 요즘 닭발 모임에서 위로를 받았다. 닭발 모임은 작년 연말 산악회 파랑새 총무님의 저녁 초대로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선약이 있어 저녁 식사 후 뒤늦게 합류했다. 함께 참석한 등대님과 남편은 닭발을 맛보라고 권했다. 이미 배가 부른 상태라 거절하는데도 꼭 먹이고야 말겠다는 표정으로 닭발 접시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마지못해 뼈 있는 닭발 한 개를 입에 넣은 순간 나도 모르게 밥상을 당겨 앉았다. 너무 맵지도 달지도 않은 양념, 호로록 혀끝과 앞니로 뼈를 발라내 씹었을 때의 쫄깃한 식감이 기가 막혔다.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하나만 먹은 사람은 없다던 그 맛이었다. 어느새 내 앞접시에는 잔뼈들이 가득 쌓였다. 얼마 전 삼천포 산행 후에 다시 총무님의 닭발이 화제에 올랐다. 바닷가 공원에서 몇몇 산우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입맛을 다시며 맛의 환희가 다시금 떠오른다고 회상했다. "파랑새님, 닭발 또 먹고 싶어요." 안 먹어 본 사람은 궁금해서, 먹어본 사람은 잊을 수가 없어서 연호했다. "닭발! 닭발!" 총무님은 "내가 한 닭발 해요."라며 성화에 못 이기는 척하면서 기꺼이 수락했다. 닭발 모임 날, 총무님은 한껏 솜씨를 발휘해서 주요리 양념 닭발을 비롯하여 호박전, 미역국에 따뜻한 밥까지 준비했다.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7명의 여자만 다시 모였다. 산에서만 보던 사람들을 퇴근 후 집에서 만나니 정말 새로웠다. 늘 등산복 차림으로만 만나다가 옷도 헤어스타일도 대화의 주제도 달라지니 처음 만나는 것 같았다. 늘 조용히 웃기만 하던 동년배 민비는 의외로 수다쟁이였고, 늘 주변을 배려하는 막내 샹그릴라는 애교쟁이기도 했다. 분위기를 이끄는 이슬 언니는 술자리에서도 여전히 재미있었다. 60대 후반의 나이에도 산행의 선두를 놓치지 않는 울트라언니는 동생들을 세심하게 챙겨주는 다정한 큰언니 같았다. 한참을 웃고 떠들다 문득 우리 몇몇은 서로 이름도 직업도 잘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린 여러 해 동안 수없이 많은 산을 함께 오른 사람들이다. 높은 산 너럭바위에서 점심을 같이 먹기도 했고 멋진 풍경에서는 어깨동무하고 사진을 찍었는데도 말이다. 산악회에서는 별명으로 서로를 호칭한다. 금지된 일도 아닌데 그 사람의 이름이나 직업을 굳이 묻지 않는다. 이름도 모르지만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서로를 돕는다. 산길을 잘 읽는 사람은 앞서서 이끌고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은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와서 인생 사진을 찍어준다. 어떤 이는 가녀린 몸이지만 과일이며 커피며 간식을 무겁게 챙겨와 휴식 시간을 달콤하게 해준다. 음식 잘하는 언니는 맛깔스러운 반찬을 챙겨와 먹여주고, 자기는 마시지도 않으면서 꽁꽁 얼린 맥주를 가져와 주변을 행복하게 해주는 이도 있다. 발걸음이 빨라 앞서가다가도 험한 바위 앞에서는 꼭 기다렸다가 끌어올려 주는 사람도 있고 발을 내딛기 무서운 미끄러운 바위에서는 심지어 허벅지나 어깨를 내어주며 디딤돌이 되어주기도 한다. 이 모든 일에 이름과 직업도 지위의 높낮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나이와 성별을 따지지 않아도 되었고 그저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나누며 산행 친구가 되었다. 서로를 안다는 것이 뭘까? 이름과 직책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쌓은 촘촘한 시간의 기억이라 말하고 싶다. 자꾸 바뀌는 호칭 한 번 기억 못 한 것이 뭐 그리 대수람! 자신을 위로하고 나니 파랑새님의 닭발이 또 먹고 싶어진다.
지난 5월 말 학부모 수업 공개의 날이었다. 많은 학부모님이 참관하러 오셨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의미 있는 배움을 위해 교육과정을 분석하고 재미있는 교육활동을 준비했다. 학생들은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인 자세와 태도로 수업에 임했다. 교직원들도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교장인 나도 참관하러 오신 부모들도 만족했고 칭찬의 말을 쏟아 놓았다. 누구 하나 앞서거나 뒤처지지 않고 역할을 다하고 있었기에 누가 더 잘했는지 가릴 필요도 가릴 수도 없었다. 지난주, 공문이 하나 왔다. 교원성과상여금에 대한 설문조사였다. 적절한 문항에 체크를 해야 하는데 어디를 눌러야 할지 망설이느라 하나하나 읽고 또 읽었다. 교육공무원으로서의 태도, 학습지도, 생활지도, 전문성 개발, 담당업무 등의 영역에서 어디에 배점을 높여야 공정한 성과상여금을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누가 알지? 정량평가로 수업시수 1시간 덜 했다고 성과가 낮고 전문성 개발 1시간 더 많이 했다고 선생님의 교육적 성과를 높였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참 어려운 질문들이었다. 그때 남편의 밭이 떠올랐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만 자란 남편이 농사를 시작했다. 무엇을 어떻게 할지 모르는 초보 중에 왕초보 농부이다. 반면 난 농부의 딸이다. 놀다가도 부모님이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가 밭일을 도왔다. 고추 따기, 부추 베기 심부름도 내 몫이었고 때론 논에서 피를 뽑는 일까지 했다. 대학 시절 여름방학이면 엄마의 콩밭에서 열무 뽑는 일을 돕느라 9월이면 새까만 얼굴이 되곤 했다. 농부의 딸로 늘 논, 밭 가까이에 있었는데도 농사짓는 법을 모르기는 나도 매한가지였다. 난 돕기만 했지, 농업경영인은 아니었다. 다만 최근 몇 년간 학교 텃밭 농사를 지어봐서 왕초보는 아니다. 남편은 이웃 어르신의 도움을 받아 거름을 뿌리고 로터리를 치고 두둑을 만들어 검은 비닐을 씌웠다. 상추, 옥수수, 양배추, 땅콩, 고추, 토마토, 야콘, 케일, 고구마, 대파를 심었고, 이웃이 분양해준 작물들도 많아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다. 그렇게 남편의 밭은 모양을 갖춰가고 있다. 주말에도 바빴던 나는 5월 말, 농사전문가 지인과 남편의 밭에 가 보았다. 옥수수가 내 키만큼 자랐고 상추도 먹기 좋게 잎이 풍성해졌다. 여리여리한 토마토 가지가 굵어졌고 고구마잎도 무성해졌다. 겉으로 보면 제법 그럴듯해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성과가 좋아 보였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초보 농부의 밭고랑 사이를 다니며 자세히 들여다봤다. 상추가 옥수수 두 줄 사이에 심겨 있었다. 봄 상추를 다 먹고 나면 이 그늘에 무얼 심어야 할까? 토마토 모종에 지지대를 세우고 줄을 엮어 줬지만 어설펐고 무성한 잎 사이에 곁순은 그대로 있었다. 곁순을 따주고 줄도 꽁꽁 묶어 주었다. 아직 농사 용수가 없는 밭에 남편은 집에서 허드렛물을 모으고 냇가에서 물을 떠다가 열심히 물을 주었다. 앞집 아주머니는 자기 스스로 힘을 받아 자라게 물을 그만 주라는데도 어느 정도로 줘야 할지 몰랐다. 잎이 너무 무성하면 열매가 덜 맺힌다는데 어떤 결과가 있을지 모를 일이다. 초보 농부의 농사 결과는 금방 판가름 날 것 같다. 상추는 벌써 여러 가정의 밥상에 오르는 작은 성과도 생겼다. 옥수수는 8월, 땅콩은 9월, 고구마는 10월이면 수확시기이니 확인할 수 있다. 물을 너무 많이 줬는지 거름이 더 필요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교육을 농사에 비교하곤 하지만 그 성과를 알기엔 농사와는 달리 너무나 멀고 길다. 지금은 섣부르게 판단할 수가 없는데 자꾸 순위를 매기라고 하니 매번 마음이 부대낀다.
여느 때처럼 아침 결재를 하고 학교 숲에서 꽃들을 살피는데 저쪽 담 너머에 무슨 사단이나 벌어진 듯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일까 궁금해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갔다. 가까워질수록 소리는 커지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베트남? 러시아? 외국어였다. 남자들이 함께 모여 떠드는 소리가 마치 언쟁하는 것 같았는데 간간이 웃음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니 싸우는 것은 아니었다. 학교 담 너머 바로 옆집이 외국인 근로자들의 숙소였던 거다. 10여 년 전, 음성 시골 학교에 근무할 때 잠시 대낮에 출장을 나갔다가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길을 걷는 사람들이 모두 외국인이었고 한국인의 모습은 아예 볼 수가 없었다. 주변에 외국인 근로자들이 많았고 차가 없는 그들이 삼삼오오 걷는 모습이 마치 한국인들보다 외국인이 더 많아 보였다. 그 후로도 더 많은 이들이 들어왔고 공장에도 농촌에도 그들이 없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됐다. 코로나로 외국인의 입국이 제한되었던 농촌에는 일손 부족이 심각하다더니 그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작년 11월 카트만두발 비행기에 우리나라로 입국하는 네팔인들이 가득 찼었다. 어디 네팔뿐이겠는가. 외국인 근로자들의 증가는 다행한 일이다. 각종 산업에서 우리가 꺼리는 힘든 일을 그들이 맡아주고 있으니 말이다. 신협 이사장님의 축산농가에도 농촌지도자회장님의 대추 농사에도 일손 구하기가 힘들어 울상이더니 한시름 놓겠다고 생각하니 알 수 없는 떠들썩한 소리가 반갑게 느껴졌다. 청주 시내 초등학교에도 학급수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외국인 근로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주변 학교는 오히려 학급수가 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문으로 듣고 뉴스로 보던 일이 실제로 우리 학교에서도 일어났다. 외국인 근로자의 자녀가 입학생으로 들어오더니 얼마 전에는 베트남 국적의 학생이 편입학을 요청했다. 학교로서는 어렵고 혼란스럽다. 어느 날 갑자기 한 번도 없던 일이 생긴다. 국적도 다르고 교육시스템도 다르니 일일이 찾아봐야 하고, 처음 해 보는 편입학 절차인 만큼 처리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다. 업무를 처리하는 교무부장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우리 학교로 온 학생은 중학교에 가야 할 나이지만 한국말을 먼저 익히고 중학교에 보내고 싶다는 부모의 요청으로 초등학교로 왔다 한다. 엄마의 한국말 실력으로는 편입학 행정절차와 각종 안내를 이해시키기 어려웠는데 지역 다문화센터 코디네이터가 함께 오셔서 통역과 행정절차에 대해서 이런저런 도움을 주셨다. 학력심의위원회에서 5학년 편입학을 결정했다. 베트남 이름을 그대로 쓰는 작디작은 아이가 교장실을 방문했다. 우리가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먼 이국땅에 와서 낯선 환경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학생만큼 어려울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서야 엄마가 일하고 있는 한국에 온 아이였다. 말도 통하지 않는 학교에서 적응해야 하니 그 긴장감과 두려움이 얼마나 클까나! 어깨를 잔뜩 움츠린 아이에게 손을 잡아도 되냐고 물었다. 아이가 손을 내밀었다. 작은 손을 잡아주며 아이에게 말했다. "우리 학교에 온 것을 환영해요. 한국에서의 학교생활 처음엔 힘들고 어렵겠지만 배우고 익히면 금방 익힐 수 있을 거예요. 선생님과 친구들에게도 친절하게 잘 대해주라고 얘기할게요. 힘든 일 있으면 내가 언제든지 도울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자그마한 여학생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이가 엄마를 쳐다보니 엄마가 눈빛으로 격려했다. 아이는 그제야 살짝 웃으며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외국인 노동자들도 학교에 온 아이도 우리가 함께 끌어안고 가야 할 사람들임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요즘이다.
아이들과의 만남이 더 즐거워지는 요즘이다. 서로의 표정을 보며 이야기 나누는 행복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 마스크를 벗으면서 이제 아는 얼굴도 많아졌다. 학교를 종횡무진하며 말썽을 피우는 아이, 놀이터 그네에서 떠나지 않는 아이를 알게 되었고 누가 인사말을 다정하게 하는지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아는 이름도 생겨서 가끔 누구야 라고 불러주면 수줍게 웃으며 고맙다고도 한다. 작년, 아이의 이름을 몰라줘서 생겼던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현관에서 검정 티셔츠를 입은 통통한 남자아이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교장 선생님, 안녕하세요?", "응, 넌 인사를 바르게 잘하는구나? 몇 학년이니? 이름이 뭐니?" 벌써 저만치 걸어가며 하는 말이라 정확하게 알아듣지 못했다. 며칠 후 한 아이가 지나가면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교장 선생님.", "응, 인사해줘서 고맙다. 넌 누구니? 몇 학년이니?", "지난번에 말씀드렸는데…." 아이가 의아해하는 것을 느꼈지만 변명도 하지 못했는데 지나가 버렸다. 얼마 후 등교 시간, 주차장에 서 있는데 어머니 한 분이 말을 걸었다. "교장 선생님이시죠? 우리 영우(가명)가 교장 선생님 때문에 엄청 속상하대요. 이름을 알려드렸는데 모르신다고요." '영우? 누굴까?' 매일 만나는 아이들은 대부분 나에게 인사를 하고 나는 수시로 이름을 묻는데 교장이 이름을 기억해주지 않아서 서운하단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당황스러웠다. 누구의 잘못이랄 것도 없다. 아이는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을 마스크를 쓴 채로 몇 번 보고 인지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 몰랐을 것이다. 비슷한 머리 모양, 검은색 옷, 평균 키, 큰 특징이 없는 아이들을 인사 한두 번으로 어떻게 알아보며 이름까지 기억하겠는가! 문제는 학교 어디서든 그 아이를 다시 만나도 또 알아보지 못할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묘책을 생각하다가 담임에게 아이의 사진을 슬쩍 찍어서 보내달라고 했다. 마스크 쓴 모습과 마스크 벗은 사진을 다 받았다. 아이는 평범하고 귀여운 모습이었고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얼굴이었다. 다른 옷을 입고 등교하면 또 만나도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쨌든 영우를 찾아 자연스럽게 아는 척을 해주기로 했다. 교실로 찾아가서 사과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어느 날 오후, 창문 아래에서 6학년 선생님과 학생들 목소리가 교장실에 들려왔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 밖으로 나갔다. 아이들을 쭉 둘러봐도 영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이 수업을 끝냈을 때 시선을 멀리 두고 "영우야?"하고 불렀다.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아이들의 무리에서 한 아이의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자세히 보니 사진 속의 그 아이였다. 앞머리가 약간 일직선인 특징만으로 아이를 찾아냈다. "너희들이 수업을 열심히 하길래 교장 선생님이 나와 봤어. 영우야, 네가 수업에 열심히 참여한다고 선생님이 칭찬하시더라. 반장 역할도 잘한다며? 앞으로도 기대할게." 마치 우연히 지나가다가 칭찬하는 것처럼 한 마디 건네고 유치원 쪽으로 걸어갔다. '됐어. 자연스러웠어.' 마치 암호를 푸는 숙제를 끝낸 것처럼 마음이 후련했다. 지난 2월, 졸업식 날 오후에 영우 어머니는 교무실과 교장실에 예쁜 꽃바구니를 보내셨다. 아이가 교장 선생님이 자기를 알고 있다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면서 말이다. 둘이 이 비밀을 알게 된다 해도 나의 노력을 이해할 거라 믿는다. 푸르른 5월, 아이들 얼굴을 맘껏 볼 수 있어서 정말 좋다. 뿌연 안개 속에서 아이들 얼굴만큼이나 밝은 세상으로 빠져나온 기분이다. 학생을 만날 땐 또 다른 영우가 없도록 귀를 쫑긋 세워본다.
교실 수업에 들어가 보면 아이들 연필 잡는 법이나 글씨 쓰는 자세, 필순이 중구난방이라 놀랄 때가 있다. 초임 시절 1, 2학년을 맡았을 땐 한두 명의 아이만 있었던 일이다. 아무리 가르쳐도 고쳐지지 않아 애썼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은 왜 이렇게 많아졌을까? 너무 일찍 연필을 잡게 해서 그렇다. 요즘 아이들은 고집이 너무 세다 등 다양한 얘기를 하는 데 정말 그럴까? 고학년 아이들의 맞춤법과 띄어쓰기, 글씨체를 보면 또 한 번 놀란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과정을 점프한 교실 수업 방법이 하나의 원인은 아닐까 싶다. 처음 교실에 컴퓨터를 설치하던 날이 생각난다. 공문서를 손으로 직접 작성하다가 타자기로 타닥타닥 작성하던 때였고 시각적 매체로 OHP를 이용하는 것만으로도 나름 교육 공학적인 교실이라고 했던 시절이었다. 교실의 교단 선진화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아이들과의 교수 학습 방법도 획기적으로 변했다. 다양한 정보기술 장치와 소프트웨어가 보급되었고 학급에서 사용되는 수업 기자재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다. 놀랄 만큼 발전된 교실환경과 수업 매체는 세계적인 수준이라 자부했고 다른 나라 교육 현장을 방문해 보고 실제를 확인했다. 그즈음 선생님들의 수업 공개 행사에 가 보면 정말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TV 화면에서 뿅~뿅~ 소리가 나오고 학습 목표도 클릭 한 번으로 쫙~ 학습 내용도 클릭 한 번으로 툭~ 튀어나왔다. 손으로 학습지 만들고 실물 자료 사방으로 찾아다니고, 연구수업 준비하느라 전지 펼쳐놓고 밤늦게까지 그림 그리던 나의 예전 수업과는 비교도 안 되게 확 달라진 모습이었다. 선생님의 수고는 인터넷 검색 몇 번으로 교수, 학습 자료를 금방 찾아낼 수 있는 편리함이 덜어줬다. 이런 획기적인 수업 방법의 변화가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온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고도화된 기술이 수업에 들어오면서 교실에서는 뭔가 잃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것이 순서와 반복 그리고 연습이라는 것을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초등학생일수록, 저학년일수록 올바른 순서를 반복적으로 제시하고 따라 하는 연습의 과정에서 쌓이고 정착되는 학습의 과정이 필요한데 그게 생략되고 줄어들었다. 1학년 아이에게 한글의 첫걸음으로 연필 잡는 법, 자음과 모음의 필순 하나하나 정성껏 가르쳤었다. 문제는 한 번에 정확하게 할 수 있는 아이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수없이 따라 쓰게 하고 받아쓰기를 했다. 매일 하교 전에 받아쓰기 다 메기고 틀린 글자 고쳐서 보내느라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꼈다면 요즘 선생님들은 믿을까 모르겠다. 칠판 글씨 하나도 정자로 한 자씩 정성껏 써 내려갔다. 아이들이 선생님의 글씨를 보고 배우고 따라 쓰면서 반복과 연습의 과정을 갖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이미 써놓는 학습 목표를 짠~ 하고 보여주는 것, 발표 자료에서 문장이 한 번에 쫙~ 제시하는 교사의 기술을 보여주면서 아이들의 시각을 자극했지만, 노작의 시간이 사라진 것이다. 더욱이 2015 교육과정에서 받아쓰기의 축소도 한몫을 담당했다. 받아쓰기는 단어나 문장을 듣고 따라 쓰면서 쓰기의 정확성과 유창성을 연습하는 과정이고, 한글 학습 초기 단계인 1학년에서 받아쓰기를 하면서 연필 잡는 법, 필순,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연습하고 교정하는 법인데 그 시간이 줄어든 것이다. 좀 더 확대하면 꼭 한글만이 아니다. 올바른 학습 내용과 태도, 생활 방법도 마찬가지다. 가르치기만 하고 올바른 순서와 반복, 연습의 기회를 주어 내면화와 정착이 될 수 있도록 함에도 너무 성급하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 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
며칠 전 월출산을 갈 기회가 생겼다. 오랜만의 일이었다. 우리나라 산 중에 "악"자를 품은 산은 대부분 수려한 경치를 자랑한다. 월악산, 설악산 등이 그렇다. 남도의 월출산은 "악"자도 없는데 바위산으로 단연 으뜸이라고들 하더니 정말 그랬다. 월출산은 산 전체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멋진 경치로 눈을 사로잡았지만 정말 험했다. 산행의 묘미는 기대하지도 못한 멋진 풍경이 나타나기도 하고 형형색색 피어난 꽃과 나무로 감동을 줄 때이다. 이번 산행에는 진달래가 그랬다. 아직 쌀쌀한 날씨라 기대하지 않았던 진달래가 산행의 초입에서부터 지천으로 피어서 산꾼들을 맞이해주었다. 나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처음부터 나를 위해 준비한 선물같이 행복한 순간이었다. '산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라고 하듯 서서히 바위가 나타나면서부터는 달라졌다. 흔들거리는 돌멩이도 밟아야 했고 돌이끼 낀 바위 위를 걸어야 했다. 발을 헛디딜까 조심하느라 열심히 발만 보았다. 바짝 긴장하며 조심조심 나아가야 했으며 가끔 미끄러운 길에 움찔했다. 오르고 또 올라서 능선 하나를 지나고 다시 내려가 또 다른 바위산을 올라갔다. 거친 바위를 오를 땐 손을 둘 데가 없어 당황하기도 했고 발을 디딜 곳이 없어 아찔하기도 했다. 산행 친구가 내려준 밧줄에 몸을 의지하기도 하고 길이 잘 보이지 않아 헤매기도 했다. 산세가 험하고 바위도 많았으며 비가 온 뒤라 미끄러운 길도 있었기에 바짝 긴장하고 산을 올랐다. 앞만 바라보기도 바빠 옆도 뒤도 곁눈질할 여력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오르는데 앞서 걷던 남편이 멈춰 서서 말했다. "뒤 좀 돌아다 봐. 우리가 온 길이 저렇게 멋지네." 뒤따라오는 사람에게 길을 내주고 잠시 멈춰 서서 숨을 내쉬며 뒤돌아봤다. "우왕! 멋지다."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내가 지금까지 디딘 발자국들을 따라오며 바위가 하나씩 위로 불쑥불쑥 솟아난 것처럼 울퉁불퉁 바위산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몸을 완전히 돌려 남편과 함께 뒤를 보고 섰다. 모두 우리가 쉬지 않고 내디딘 길이며 숨이 멎도록 힘들었어도 참고 걸어온 길이었다. 온 몸을 던져 올라온 바위였으며 덜덜 떨면서도 한 걸음씩 나아온 길이었다. 아래만 보고 걸을 땐 그냥 돌덩이이고 나뭇가지이며 나무뿌리였는데 멀리 와서 뒤돌아보니 그림이 되고 풍경이 되어 있었다. 눈앞이 너무 힘들어서 뒤돌아볼 여유가 없었어도 나의 길은 어느새 하나의 풍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옆에 서 있는 남편의 눈이 유난히 촉촉해 보인 것은 감상에 젖은 내 마음 탓일 거다. 남편은 얼마 전 명예퇴직을 선택했다. 학교라는 산에서 앞만 보고 걸어온 남편이 이제 지금까지 걸어온 학교라는 먼 길을 뒤 돌아보고 흐뭇해 했으면 좋겠다. 가르치는 일에 늘 최선을 다했던 남편이었다. 한여름 민소매만 입고 앉아 땀을 뻘뻘 흘리며 교재연구를 하던 남편의 모습에서 교사의 책임감을 보았었다. 제주도 수학여행에 한라산 등반을 일정에 넣어 운영하는 열정에 감탄하기도 했었다. 어느 제자는 명절마다 찾아와서 선생님의 이정표 대로 따라 걷는 길이 재미있다고 고백했다. 졸업하고 취직하고 어느 땐 신붓감을 데려오더니 이젠 두 아이와 함께 손잡고 찾아와서 우리의 길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끼게 해준다. 학생들과 함께했던 나날은 그저 하찮은 일상 같았어도 순간순간 최선을 다했기에 누군가에게 닿아 따듯한 온기를 내뿜고 있을 거다. 때로 거칠고 힘들었던 일들은 바위산의 돌멩이처럼 묵묵히 견디는 인내로 어딘가 위로의 말로 남았을 거라 믿는다. 그 모든 순간이 모여 우리의 삶이 되고 역사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함께 서서 뒤돌아본 풍경이 더 애틋해 보였다.
코로나와의 싸움에서 또 졌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변 대부분 사람이 확진되었어도 무사하길래 슈퍼 면역력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 내 오만을 조롱하기라도 하듯 작년 11월 확진되어 1주일 내내 앓아누웠을 때 이미 졌는데 그걸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엔 마스크 확보하느라 전쟁, 거리두기와 확진자 격리 방법, 신속항원검사 및 처리 방법 등으로 또 전쟁을 치렀지만 우리는 잘 해왔다. 재빠르게 급식실 칸막이를 설치하고 우리의 선견지명에 우쭐하기도 했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교육활동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코로나, 너에게 만만하게 질 수는 없지!'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3년의 전쟁 끝에 2월 말, 대응 매뉴얼이 완화되면서 이제는 식탁 칸막이를 없애도 된다 했다. 새 학년을 시작하기 전에 깨끗하게 치우고 아이들을 맞이할 수 있다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이 화근이었다. 행정실장으로부터 식생활교육관으로 빨리 와 달라는 전갈을 받고 달려갔을 때는 이미 사태가 벌어져 있었다. 작업을 하던 시설 주무관도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뽀얀 식탁에 군데군데 생채기가 났다. MDF 판에 시트지를 눌러 붙인 상판이 한 조각씩 떨어져 나가 마치 작은 웅덩이가 생긴 것 같았다. "으악!" 저절로 신음이 나왔다. 칸막이를 고정하기 위해 붙여놓은 강력 테이프가 식탁 상판을 다 뜯어먹은 거였다. 벌써 4개의 식탁이 망가졌다. 더는 작업하지 말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다. 드라이기로 병에 붙은 라벨을 깨끗하게 떼어냈던 경험이 생각나서 한두 개 해보라 하고 출장을 갔다. 그날 내내 틈만 나면 식탁을 손상하지 않고 칸막이를 떼어낼 방법에 대해 검색했지만 그런 자료는 없었다. 다음 날 출근하니 드라이기가 효과가 있었다길래 모두 살린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다. 반쯤은 무사하지 못했다. 얼마나 접착력이 강했는지 드라이기를 사용해도 어려웠다고 했다. '언젠가 없애야 할 때를 염두에 두고 붙였어야 했어.'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그렇다고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초기 코로나 시기에 칸막이를 설치할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할 때만 해도 3년이나 사용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단단하게 고정하지 않았다면 내내 불편했을 거다. 구매한 업체에 문의해 보니 상판을 교체하는 방법밖에 없다며 견적이 430만 원이란다. 설치한 비용보다 더 많다. 지금 당장 예산을 세워놓은 것도 아니고 올해 시설관리비로 쓰일 곳도 많아 선뜻 사용할 수가 없었다. 난감한 일이다. 정말 오랜만에 서로 얼굴 보며 깨끗하고 깔끔한 식탁에서 식사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상상했었는데 흥부네 누더기옷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을 때마다 내 마음에 멍이 든 것처럼 한숨이 나왔다. 최상의 방법은 아니지만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방법을 찾아 보았다. 퍼티로 구멍을 메우고 비슷한 나뭇결 무늬목 접착 시트지를 찾아 바르면 4만3천 원이면 될 것 같았다. 430만 원이냐? 4만3천 원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일단 4만3천 원으로 결정했다. 며칠 후 퇴근 무렵 행정실장이 주문 상자를 들고 왔다. 빨리 결과를 보고 싶은 마음에 바로 급식실로 달려갔다. 영양교사와 행정실장과 함께 퍼티를 발랐다. 구멍이 크지는 않아서 오래 걸리지 않았다. 건조도 빨랐다. 사포로 가볍게 면을 고르고 시트지를 하나 붙여 보았다. 솔직히 감쪽같지는 않지만 조금 봐줄 만했다. 아이쿠! 코로나야, 그래 또 졌다. 지고 또 졌어도 우리는 오늘처럼 붙이고 떼어내고 메꾸어 가며 너를 상대해 왔다. 앞으로도 묵묵히 또 그렇게 걸어갈 텐데 말이다. 이제는 좀 져줘라
시업식, 입학식을 시작으로 다시 새 학년이 시작됐다. 2월 내내 올해는 어떻게 아이들과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까 고민하며 계획하느라 선생님들도 교직원들도 바빴다. 드디어 출발이다. 초등학교 입학식은 학부모들에게 그 어떤 학교행사보다 긴장되는 일인 것 같다. 아이가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을 거쳐 학교에 입학하는 일은 부모로서 최대의 사건 중에 하나다. 우리 아이가 학교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새로 만난 친구들과 잘 지낼까? 학습 능력은 어떨까? 돌봄교실과 방과후학교에는 참여할 수 있을까? 수많은 질문과 염려, 궁금증을 가지기 마련이다. 정작 아이들은 의기양양하게 학교에 들어서는데 부모님들은 마치 본인이 1학년에 입학이라도 하는 듯 들떠 보인다. 그런 부모님들에게 꼭 먼저 알려주고 싶은 것이 있다.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특성이 있으며 그것을 찾아주고 그 능력을 잘 키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 학교다. 아이가 어떤 모습이든 학교는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아이를 사랑하고 보호하고자 하며 잘 가르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말이다. 작가 영민 글, 그림의 라는 동화책을 찾아내고 '맞아 바로 이 책이야' 하며 입학식 때마다 읽어주곤 한다. 내용을 살펴보면 왼쪽에는 귀여운 아이, 조용한 아이, 덜렁대는 아이, 활동적인 아이 등 다양하게 자신의 단점을 걱정하는 모습이 그림이 그려져 있다. 오른쪽에는 그것을 단점으로 보지 않고 장점으로 보며 부러워하는 친구들의 말 주머니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내 단점이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장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이는 존재만으로도 사랑받아야 하고 학교도 부모와 똑같은 마음으로 아이를 맞이한다는 것을 말이다. 입학식에 온 부모는 참 사랑스럽다. 아이의 움직임, 표정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바라보며 아이가 잠시 딴짓이라도 할라치면 연신 눈짓을 보내며 격려한다. 자녀가 학교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온 정성을 다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얼마나 사랑스럽고 얼마나 대견한 아들이고 딸일까! 그런 부모에게 교장으로서 꼭 말하고 싶은 또 한 가지가 있다. 교사의 시간은 곧 아이들의 시간이니 제발 아껴달라는 것이다. 아이가 등교해서 하교 때까지 교실에서 담임교사와 보내는 시간은 5~6시간이다. 부모와 함께 지내는 시간보다 결코 적지 않다. 집에서 부모와 같은 공간에 있다고 정말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부모와 아이는 나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 반면 초등학교 저학년의 경우 담임교사와 보내는 그 시간은 온전히 함께 하는 시간이다. 아이는 해바라기처럼 교사를 바라보며 따라 하며 사랑의 눈빛을 보낸다. 교사의 말과 몸짓, 표정, 심지어 복장까지 함부로 할 수 없는 이유다. 교사 한 명이 많으면 스무 명이 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스무 명의 아이와 함께 있는 교사의 한 시간은 스무 시간이 되는 거다. 요즘 교사에 대한 인기도가 현저히 떨어졌다는 뉴스를 접하며 씁쓸했다. 학부모는 교사의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전화로 언성을 높이고 따지고 그래도 부족하다 싶으면 교육청을 찾고 심지어 국민신문고에 올려 불만을 표출한다. 학부모님들은 알까? 사소한 불만이나 불편함을 토로하기 위해 항의하는 각종 민원이 결국은 내 아이의 시간을 뺏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담임교사가 일일이 학부모의 민원에 응대하고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시간은 결국 아이들의 시간이다. 교사의 시간은 곧 소중하게 지켜줘야 하는 내 아이의 시간이다.
큰 학교로 옮기고 난 후 지인을 만나면 괜찮냐고 물었다. 보은에서는 가장 큰 학교이고 아이들도 많으니 각종 민원이나 다양한 어려움이 있을 거라 예상하고 하는 말이다. 나는 대답 대신 큰 학교라 가장 좋은 것이 뭐냐고 물어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대답을 정해놓아서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아이들이 전학을 가도 전학을 와도 매우 놀라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변화이고 좋은 점이라고 말했다. 농촌 소규모학교에 근무해본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잘 알기에 공감하며 함께 웃곤 했다. 작은 학교에서는 학생 한 명이 전학 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가슴이 철렁하곤 했다. 소문만으로도 전 교직원이 이야기의 진위를 따져가며 수군거렸다. 무슨 일인지 어떤 사정인지 확인하고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땐 모두 안도했다. 반대로 학부모가 사실이라고 알려오면 비상사태가 벌어졌고 일말의 여지가 있다면 어떡하든 문제를 해결해서 학생을 붙잡으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전학을 간다던 학생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기도 하니 노력이 헛되진 않았다. 학생 한 명이 전학 가는데 웬 호들갑이냐고 말하겠지만 결코 만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다자녀 가정의 아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학생 수가 적으니 2~3명이 한꺼번에 전학을 가면 학교에는 치명적이다. 학년에 따라 또 달라진다. 학년별로 학생 수가 고르게 분포되었다면 좋으련만 전혀 그렇지 않다. 어떤 학년은 10명이 넘어 우스개로 과밀학급이라고 말하는데 어떤 학년은 2~3명이라 학급수를 유지하는데 간당간당하기 때문이다. 6학급을 유지하는 것과 5학급이나 4학급이 되면 아이들의 교육환경도 달라지고 교사의 업무량이 훨씬 많아져 힘들어지게 된다. 학교가 작아지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고 늘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 중소도시의 큰 학교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그 속도를 잠시 잊었었다. 학생 수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는데 연말이 가까워지자 우리 학교도 예외가 아님을 깊이 깨달았다. 우리 학교는 최근 7~8년 사이에 인구 감소가 심각해지면서 학년별 4개 학급이었다가 6학년을 제외하고 모두 3학급이 되었다. 6학년 4학급이 졸업하고 나면 입학하는 1학년이 몇 개 학급이 편성될 것인지 초미의 관심사였다. 동광초는 모든 마을이 소규모학교 일방 공동 학구라 학부모의 선택에 따라 학급수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3학급이 되려면 최소 51명은 되어야 하는데 예비소집 첫날, 달랑 5명이 왔다. 다시 가슴이 철렁했다. 이게 뭐지? 직원들 앞에서는 담담한 척했지만, 속마음은 타들어 갔다. 3일간의 예비소집 결과 3개 학급이 편성되었을 때 우리 모두 정말 기뻐했다. 선생님들과 모든 교직원이 한마음 한뜻으로 열심히 교육과정을 운영한 것을 학부모님들도 알아주신 것 같았다. 문제는 다른 학년에서 터졌다. 간당간당 3학급이었던 3학년이 세종으로 인천으로 전학을 가서 50명이라는 것이다. 아빠의 직장을 따라 전학 가는 것을 막을 방도도 없거니와 작은 학교에서 데려올 수도 없는 노릇이니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특별한 대처도 못 하고 한 학급이 줄어 버렸다. 농촌 작은 학교에서 6학급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고 떠나왔어도 계속 마음이 쓰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큰 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올해는 2개 학급이 줄었는데 내년에는 또 얼마나 줄라나. 자연감소에 의한 학급수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인구 감소에 대한 놀라움이 이젠 공포로 다가온다. 점점 작아지는 학교는 결코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학교가 작아지는 속도만큼 농촌도 도시도 나라도 점점 작아지고 있는데 막을 방법을 모르겠다.
닫혔던 세계로의 문이 하나씩 열리고 이제 다시 여행의 시간이 돌아왔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직접 겪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상황에 마주할 때가 많다. 처음 유럽 여행을 갔던 해였다.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에서 환승하여 제네바로 가는 길이었다. 우리가 내린 곳은 D 터미널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공항은 빈틈없이 채워진 쇼핑센터 같았다. 어디가 게이트인지 어디까지 면세점인지도 모를 만큼 번잡스러웠다. 떠나자마자 만난 이국적인 공간의 생소함에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환승 시간이 2시간이 넘게 남았고 겨우 D에서 F까지 가는 길이니 천천히 구경하며 걷는데 아무리 걸어도 E 터미널이 보이지 않았다. 양옆으로 늘어져 있는 면세점은 끝도 없었다. 우리의 발걸음이 아무리 느려도 멀어도 너무 멀었다.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행들과 그때부터 부랴부랴 발걸음을 재촉했다. D와 F 사이 거리는 쉬지 않고 걸어도 적어도 30분 이상 소요된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겨우 E가 보이고 복잡한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한참을 빠져나가며 뛰고서야 겨우 우리가 타야 하는 F 터미널의 게이트에 도착했다. 겨우 2분이 남았다. 문제는 아직 일행이 다 도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땀을 닦으며 탑승구 위 전광판을 보니 보딩 타임이 20분 늦춰져 있었다. 덕분에 숨을 돌리고 무사히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아찔한 경험이었다. D와 F 사이가 그리 먼 줄은 처음 알았다. 거리 얘기를 시작하니 26년 전 첫 중국 여행이 떠오른다. 중국을 자주 드나들던 셋째 형부가 가이드를 자처하며 인천에서 배로 중국 여행을 가자고 했다. 톈진~베이징~연변으로 가는 일정이었다. 인천 버스 터미널에 정오에 도착했다. 여객선터미널로 이동해서 배표부터 끊자고 하니 오후 5시에 출발하는 톈진 가는 배는 늘 텅텅 비어서 미리 끊을 필요가 없단다. 형부를 믿고 영화까지 보고 터미널로 갔는데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여름방학이라 대학생들과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이 몰려든 것이다. "톈진행 매진"이라는 글자를 본 순간 얼마나 당황스러웠던지 웃음도 안 나왔다. 하루 한 대밖에 없는 배였다. 평소에 한가했다고 매표도 하지 않고 영화를 보자고 한 형부가 원망스러웠지만, 적극적인 의사 표현을 하지 않은 우리도 할 말이 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멍하니 매표소 위를 보니 "웨이하이행" 표가 남아 있었다. 웨이하이는 어디지? 벽에 붙어있는 중국 지도를 찾아보니 지도상으로 톈진과 그리 멀지 않아 보였다. 하루를 기다리느니 웨이하이로 가서 톈진으로 이동하자고 제안했다. 다들 좋은 의견이라며 다시 즐거운 마음으로 배를 탔다. 문제는 다음 날 아침 도착한 후였다. 웨이하이에서 톈진까지 기차로 19시간 거리였다. 지도에서 한 뼘도 안 되었는데, 19시간이나 걸린다는 사실에 입이 쩍 벌어졌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기껏해야 6시간 걸리는 나라에 살았던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대륙적 사고라고 하더니 커도 너무 큰 나라였다. D와 F 사이의 거리도 지도상의 한 뼘의 거리도 직접 걸어보고 직접 뛰어 봐야 체감할 수 있다. 지금은 손안의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검색을 하며 모든 것을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때론 진땀을 빼고 때론 황당한 상황에 헛웃음을 웃으며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일은 신기했고 즐거웠으며 행복했다. 생생한 여행의 경험과 다양한 체험은 내 일상에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믿는다. 어떤 상황이든 한 번 더 생각하고 좀 더 멀리 보고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라고 여행길에서 배웠다.
오랜만에 대면 졸업식을 했다. 참석하신 학부모님들이 감격의 눈물까지 흘리시는 것을 보고 나 또한 뭉클해졌다. 졸업식에서 무슨 말을 할까 항상 고민이다. 많은 학부모님을 만날 기회이니 학교자랑도 해야 하고 졸업생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도 많았다. 다음은 올해 나의 졸업식 이야기다. 안녕하십니까? 먼저 오늘 영광의 주인공, 75명의 졸업생 여러분! 진심으로 졸업을 축☆하☆합니다. 졸업생들과 함께 보낸 2022년 동광 교육은 안으로도 밖으로도 빛이 났습니다. 모든 선생님이 정성껏 준비한 교과교육과 방과후학교 다양한 체험학습 등 참으로 알찬 교육과정을 운영했습니다.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요? 학생회가 준비한 아침 음악방송, 점심시간이면 울려 퍼지는 중창단의 노랫소리, 학교 숲을 중심으로 한 생태환경교육이 생각나네요. 세계 수준의 공연팀을 10번이나 초청해서 문화예술의 맛에 흠뻑 빠져보기도 했습니다. 오랜만의 공개수업에는 정~말 많은 학부모님들이 수업의 감동을 함께 해주셔서 저 또한 감동이었습니다. 롤러와 플로어 볼의 전국대회 출전과 수상은 짜릿한 기쁨이었고 전국We프로젝트 운영 기관 부문 대상을 수상했을 때는 더없이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2022년은 탈바꿈의 한 해였습니다. 보건실, 교장실, 후관 외벽공사, 과학실, 상상 마루를 새롭게 단장했더니 학생들의 만족도가 엄청 높았습니다. 특히 상상 마루가 좋아졌다고 교장실까지 찾아와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네요. 학생들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2023년에도 본관 외벽과 중간 창 교체 체육관 바닥 공사를 할 예정입니다. 이럴 땐 손뼉을 쳐주시던데…. 이런 변화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예상됩니다만 학부모님과 학교운영위원회, 동문회에서 든든하게 지원해주시리라 믿습니다. 학교장으로서 학생들을 고이 길러 보다 넓은 세상으로 보내는 것은 큰 기쁨이고 보람입니다. 아이들과 정이 많이 들었나 봅니다. 계속 데리고 있으면서 더 많이 사랑해주고 더 많이 가르치고 더 오랜 시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잡고 싶어도 떠나보낼 시간이 다가오네요. 사랑하는 졸업생에게 두 가지만 당부하겠습니다. 첫째는 "인성이 실력이다"입니다. 우리 졸업생들은 참으로 착하고 따뜻하며 배려 깊은 학생들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보여준 대로 따뜻한 마음을 가족과 친구, 이웃과 나누는 착한 마음을 늘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착한 인성이 여러분을 끝까지 빛나게 할 것입니다. 둘째는 어떤 일이든 "일단 도전!"입니다. 안 될 거라 미리 포기하지 말고 일단 시작해보세요. 눈앞에 길이 보일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빠르게 변한다 해도 도전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있기 마련입니다. 일단 시작하되 성실과 최선을 다한다면 어느새 성장해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들께 말씀드립니다. 부모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정성, 희생으로 우리 졸업생들이 이렇게 멋지게 성장하여 더 큰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정말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앞으로도 아이들이 믿고 의지하고 따라갈 수 있는 올곧은 빛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네 분의 담임선생님들과 졸업생을 키워낸 6년간의 모든 선생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우리 선생님들이 학생 한 명 한 명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과 노력을 하고 사랑을 쏟으셨는지 학생들은 잘 알 것이라 믿습니다. 교장으로서 늘 감동하며 감사했습니다. 여러분들의 그 고귀한 사랑이 졸업생들의 가슴에 남아, 앞으로 어떤 힘든 일이나 나쁜 유혹이 눈앞에 닥칠지라도 흔들리지 않게 꽉 붙잡아 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졸업생 여러분! 여러분의 빛나는 졸업을 다시 한번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새해가 밝았다. 원하지 않아도 또 한 살의 나이를 먹었다. 반백 년 쉰을 넘기면서부터 인생 후반을 향해 전력 질주하는 것 같다. 어렸을 때는 그리도 길었던 1년이 지금은 시작과 동시에 끝난 기분이다. 세월 참 빠르다. 몇 해 전부터 딸들과 함께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아이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위험할 것 같아 시작한 일이었는데 올해도 금요일 밤늦게 서울에 와서 새해를 맞이했다. 딸들과 지낼 때마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참 다른 시대를 살고 있다 느낀다. 세대가 다르니 생각하는 것도 삶의 방식도 다르다지만 디지털을 이용하는 경험치에서 특히 더 그렇다. 큰 애가 경동시장 안에 극장을 개조해 12월 중순에 스타벅스를 열었다며 가보자고 했다. 오래된 전통시장 안에 대규모의 카페라니 흥미롭다. 딸들과 나는 동의했는데 남편은 그 시간에 동묘에 가고 싶단다. 오래된 물건, 골동품을 늘어놓고 파는 구제시장이 펼쳐진 곳이다. 남편은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자전거를 타고 달려갔다. 우리는 옛 경동극장으로 갔다. 가는 길에는 어르신들이 시장을 꽉 채우고 있었고 간간이 젊은 사람들도 보였다. 시장 구석 3층에 오래된 인삼 파는 가게들 사이를 지나니 카페가 나타났다. 레트로라는 말에 어울리게 실내장식이 고전적인 느낌이었다. 1960년에 문을 연 경동극장은 언제인가 문을 닫았고 폐건물로 있던 곳을 새롭게 개조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관 스크린이 있던 곳에 주문대가 있고 의자들은 모두 앞쪽을 향해 있는 극장의 원형을 그대로 살렸다. 아직 오전인데도 자리가 꽉 찼다. 주문대 앞에 줄도 길었다. 내 생각에 한 명은 주문대에 줄을 서고 다른 사람은 자리를 찾으면 좋을 것 같은데 아이들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딸들과 다닐 땐 되도록 지켜보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에 조용히 있었다. 이리저리 자리를 찾아다니더니 방금 일어난 커플이 나가기를 기다려 자리 잡았다. 그리고는 둘 다 핸드폰을 꺼내 이 매장만의 시그니처 메뉴는 없는지 찾아본다. 어떤 메뉴를 주문할 건지 묻고는 그 자리에서 앱으로 주문했다. 사이렌 오더라고 한단다. 스타벅스 로고에 있는 여자가 신화에 나오는 "사이렌"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문득 진동벨도 없는데 우리 음료가 준비된 것을 어떻게 알지 생각했다. 벽면의 하얀 스크린에 알 수 없는 단어들이 떠 있었다. A-85, 콩콩이, 예지니···. 저건 뭐니? 묻자 메뉴가 준비되면 영사기로 엔팅크레딧이 올라가듯 주문자의 이름이나 번호가 위로 올라가도록 한다고 했다. 카페에 진동벨이 처음 생기고 "드르륵" 움직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던 일이 떠올랐다. 키오스크 앞에서 주문이 서툴러 한참을 헤맸었던 기억도 얼마 되지 않았다. 이젠 아예 앉은 자리에서 사이렌 오더로 주문하고 번호가 뜨면 가서 커피와 음료를 가져온다. 넷 밖에 안되는 가족 안에서도 다가온 미래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이렇게 다르다. 아이들은 이미 미래를 누리며 살고 있고 나는 그 변화를 좇아가야 할 것 같아 마음이 바쁘다. 남편은 자전거를 타고 과거를 향해 달려갔다. 뉴스에서는 시대를 앞서가는 유명 브랜드가 전통시장 안에 다양한 세대가 모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 속에 모인 사람들을 보며 저들은 또 어떤 시대를 살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제각기 다른 시대를 사는 것은 아닐까? 같은 나이의 친구,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동료라고 같은 시대를 살고 있을까? 같은 50대라고 세대가 같다고 할 수 있을까? 가르치는 교사인 우리는 적어도 반걸음은 앞서가야 한다고 떠벌렸었다. 휴, 이젠 서둘러 가도 한걸음 늦겠다!
가끔 학부모가 서운함을 전하거나 민원을 제기할 때가 있다. 그럴 때 학교에서 제일 먼저 할 일은 설명이 아니라 공감이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억울함을 느낀다면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그 답답한 속사정을 먼저 들어주어야 한다. 생활에서 살짝 억울한 일을 경험하고 나니 더욱더 확고해진다. 10월 초 히말라야 등반을 준비하며 경량 패딩을 하나 샀다. 로고에 여우가 웅크리고 있는 북유럽 브랜드다. 하나쯤은 갖고 싶었던 터라 청주시청 근처 수입 브랜드 전문 아웃도어 매장에서 나름 비싼 값에 샀다. 네팔의 가을은 생각보다 춥지 않아 4천600m에 올랐을 때 처음 입었다. 다음 날 새벽 옷을 접어 가방에 넣는데 등 오른쪽 부분에 6㎝ 정도의 하얀 줄이 있었다. 뭐지? 어두컴컴한 롯지였고 출발 시각이 다가와 일단은 넘겼다. 다음 날 저녁 급격하게 추워져서 다시 패딩을 꺼내 입었다. 마침 조명이 밝은 호텔이라 잠들기 전 옷을 벗어 자세히 살펴봤다. 하얀 줄은 퀼팅 라인에 깃털이 수북이 빠져나와 덩어리진 것이었다. 검정 패딩에 흰색으로 굵게 주차선을 그린 것처럼 선명했다.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는 깃털 뭉치가 다 나오면 빵빵한 패딩이 홀쭉해질 것 같아 어떻게든 밀어 넣어 보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교환해야겠다 생각하며 입지도 않다가 트래킹 마지막 날 바람이 몹시 불고 추워져서 반나절 더 입었다. 귀국하자마자 코로나가 발목을 잡아 매장에 갈 수 없었다. 판매자와 통화 후 사진을 보내고 1주일 후 방문했다. 판매자는 사장이 봐야 한다며 한참을 기다리게 했다. '교환이 가능할까? 세일해서 30만 원도 넘게 주고 산 옷인데 입자마자 깃털이 뭉텅이로 빠져나오는 것은 제품 불량이니 교환해주겠지.'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사장은 옷을 대충 보더니 단호한 어조로 명확하게 말했다. "우리는 병행수입처이고 AS 정책에 대해서 말하겠다. 소비자가 옷을 구매한 후 착용한 것은 어떠한 경우도 소비자의 과실이므로 교환은 불가하다. 무료 수선은 가능하며 수선 결과, 표시가 날 수 있고 그 경우에 이의를 제기하면 안 된다." 소비자의 과실이라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 내 등에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닌데 털이 끝도 없이 빠져나오도록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 더욱 화가 난 것은 다음 말이었다. "고객님이 취할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소비자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다 제품을 보내서 과실 여부를 문의해라. 설사 소비자원에서 하자가 있다고 결론지어 중재를 진행한다 해도 우리 AS 정책상 교환은 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은 지금 무료 수선을 맡기고 가든가 아니면 소비자원과의 지난한 과정을 거친 후 다시 수선을 맡기러 오든지 알아서 결정하라는 것이었다. 사장은 비싸게 산 옷을 입자마자 깃털이 숭숭 빠져나오는 것을 보고 황당해했던 나를 먼저 위로하거나 공감했어야 했다. 사과도 위로도 한마디 없이 선택의 의지도 없는 AS 정책을 늘어놓는 동안 내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교환은 안 되고 수선만 가능하다는 말을 그렇게 길고 단호하게 가르치듯 설명한 것이다. 무료 수선을 거부하고 집으로 옷을 가져왔다. 고객 즉 나의 과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장이 말한 병행수입처를 검색해봤다. 일부 사이트에서 병행수입처는 정식회사에서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루트를 통해서 수입해서 파는 곳이고 정품이 아닐 수도 있으니 되도록 직구를 하거나 공신력 있는 곳에서 구매해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곳은 공신력 있는 곳인가? 내 옷은 진품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