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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선

용암중학교 교사

영우(가명)는 키가 아주 컸다. 중학교 3학년인데 키가 180이 넘어 제 또래들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큰 편이었다. 거기다 몸은 말라서 걸을 때면 가느다랗고 길쑴한 나무가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영우는 기술 선생님을 따라 리어카에 거름을 싣고 화단을 가꾸거나, 앞개울에서 혼자 낚시를 하곤 했다. 선생님들도 영우가 책상에 앉아 있는 것보다 자연 속에서 일하거나 노는 것을 더 즐거워하므로 굳이 교실 의자에 매어둘 마음이 없었다. 지적 장애를 가진 영우는, 평소 온순하다가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갑자기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곤 했다. 따라서 본인은 물론 친구들이나 선생님들도 영우가 학교 안팎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훨씬 마음 편했다.

시골 작은 학교였으므로 텃밭도 있어 영우는 시키지 않아도 그곳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피곤하다 싶으면 교실에 들어와 앉아 있곤 했다.

어느 봄볕 좋은 날, 국어 시간에 영우는 딱히 할 일이 없었던지 교실에 들어와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그때 알퐁스 도데의 <별>을 함께 공부하고 있었는데, 남녀 합반으로 한창 이성에 관심 많은 열여섯 나이의 아이들은 짐짓 간질이는 남녀 간 사랑 이야기가 부끄러웠는지 공연히 웃고 떠들어 교실은 좀 소란스러웠다. 소설 작품의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나는 퍼뜩 아이들에게 시낭송을 시켜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선 학교도서관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골라 간단한 그림을 곁들인 애송시화를 만들어 제출하도록 했다. 그런 다음 아이들 인원수만큼 '우리반 애송시집'이란 제목으로 묶어 각 한 권씩 나눠 줄 계획이었다.

아이들은 시낭송회에 대한 기대로 신이 나서 좋아하는 시와 그에 어울리는 음악을 고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도서실에서는 다른 때와 달리 시집을 뒤적이는 손길들로 분주했다. 시집을 열어 시들을 훑어보는 그 눈빛만으로도 낭송하는 것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드디어 아이들이 공들여 제출한 시화 종이들을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각 38장씩 복사해 38권을 묶어 거의 한쪽에 다 쌓아 놓았을 때였다.

"선생님, 저도 시……"

영우가 교무실 문을 열더니 종이 한 장을 갖고 와 내밀었다. 아무 그림도 없이 연필로 서투르게 글씨만 쓰여 있는 연습장 종이였다.

"그, 그래…. 영우가 안 냈었지."

당황했지만 마치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영우가 돌아간 후 나는 종전까지 시집을 묶던 스테플러 침이 내 가슴에 박히는 기분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래, 3학년 아이들은 38명이 아니라 영우까지 39명이었지.' 내 의식 한 켠에 영우는 좋아하는 시를 고를 수도, 암송할 수도 없는 아이란 편견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찾았는지 이생진의 '행복한 사람'이란 시가 서투른 연필 글씨로 쓰여 있는 그 종이를 복사해서, 이미 다 만들어진 시집 뒤에 그냥 풀로 붙이며 나는 망연한 자괴감에 빠져 들었다.

시낭송회를 하는 날, 아이들은 시모음집 맨 뒤에 붙어 있는 영우의 시를 보며 놀라워했다. '쟤가 어떻게· 웬일이야· 외우기는 했을까. 음악은 준비했나 몰라.' 앞줄에 앉은 여학생들의 수군거림이 들려 왔다. 아이들이 음악을 배경으로 마이크를 든 채 시를 외워 낭송할 때마다 환호와 박수가 터지고 영우의 차례가 되었다. 교실은 묘한 분위기가 흘렀고 미리부터 웃을 준비를 하는 아이도 있었다. 영우는 다 외우지는 못했는지 조그만 쪽지를 들고 나왔다. "날 때부터/ 손바닥에 사랑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 더듬더듬 외운 것을 잊지 않기 위해 교실 천장을 궁리하듯 응시하며 영우는 천천히 외워 나갔다.

배경음악이라면 숨을 멈춘 것 같은 교실 안의 긴장된 정적이 전부였다. 영우가 가끔 쪽지도 들여다 봐가며 시 낭송을 마쳤을 때, 교실에서는 큰 환호성이 터져 나왔지만 나는 목이 잠겨 칭찬의 말도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

영우의 시 낭송은 아이들에 대한 나의 편견과 타성적 무감각을 일깨워주었다. 그때 외웠던 시처럼 영우가 사랑으로 이 아름다운 계절을 행복하게 보내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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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