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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선

용암중학교 교사

"메일로 보내면 편지다운 느낌도 없을 것 같고, 해서 이렇게 펜을 잡았습니다."

올해 초, 각종 고지서와 광고 전단지 속에 보배처럼 파묻혀 있던 제자의 편지였다. 우편함 속에서 그 애의 야무진 필체로 쓰인 편지 봉투를 발견한 순간, 사연도 보기 전에 그 편지 봉투의 우표를 보는 것만으로도 오랜 친구와 갑자기 조우한 것처럼 반가웠다. 스마트폰 이후로는 이메일도 사라져가는 시대에 봉투 속에 넣어 보낸 편지라니……. 편지 속에는 이제 고3이 되는 부담감, 학교 도서부원으로서 활동했던 이야기, 짝사랑하게 된 옆 반 남학생, 이번 겨울 눈 내리던 날의 여행, 중학교 때의 감회 등이 푸른 색 펜으로 정감 있게 적혀 있었다. 바다와 섬과 책이 펼쳐져 있는 고운 풍경의 편지지 두 장에 꽉 차 있는 정겨운 사연이, 온기가 스며있는 서체 속에 생생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깊은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점차 세상 밖을 내딛는 스무 살 언저리의 싱그러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 애의 편지를 읽다 보니, 친구들과 늘 편지로 아웅다웅하거나 아기자기한 사연을 주고받았던 내 여고 시절이 저절로 떠올랐다. 참으로 오랜만에 돌아가 보는 순정한 시절의 기억이었다.

제자는 편지의 말미에 게으른 선생을 위하여 친절하게도 이메일 주소를 적어 놓았다. '저는 편지지에 쓰지만 선생님은 답장하시려면 간편하게 이메일을 이용하세요.'하는 세심한 배려였다. 하지만 나는 나도 참으로 오랜만에 편지지에 편지를 써보리라 결심했다. 자신의 바쁜 일상에서 따스한 마음 한 자락을 전해 준 그 아이의 마음에 대한 보답도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렇게 한 달이 넘도록 결심만 하다가 결국 얼마 전 컴퓨터 앞에 앉아 다시 편지지를 펴들었다. 이메일 주소를 적기 위해.

학창시절 일반 주택에 살 때 초록색 대문에 가끔 꽂혀 있던 하얀 봉투의 편지들…. 그 이미지는 내 젊은 날의 상징이었다. 친구들과, 이제는 잊혀져 가는 옛 연인과 나누었던 참으로 다양한 사연들이 그 하얀 얼굴에 담겨 있곤 했다. 집으로 접어드는 골목길에서 대문에 꽂혀 있는 편지 봉투들은 하루의 고단함까지 일시에 씻어 내리는 위무와 가슴으로 달려드는 반가움이 있었다.

스마트폰이나 이메일의 개인적 대화와 편지도 편리하고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어쩐지'일회적이고 가볍다'라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지인이 보낸 사연일지라도 오래 된 메일들은 스팸메일과 함께 정리되어 버린다. 단순 삭제만으로는 정리가 안 되기에 컴퓨터의 휴지통에 버리고 그 휴지통마저 비워줘야 한다. 애써 보낸 사연이 그렇게 휴지통에 버려져야 하는 것이 미안하고도 너무 아쉬워 인쇄하여 보관하기도 한다. 하지만 보낸 이의 체온까지 출력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파일에 정리된 그 메일 편지를 가끔 넘겨보아도 빛바랜 펜촉의 편지처럼 감흥이 일거나 정겹지는 않은 것 같다.

아들이 글자를 막 익히기 시작했을 때 한참 편지쓰기에 큰 흥미를 가졌던 때가 있었다. 색종이에 별 것 아닌 내용을 서툰 글씨체에 담아 내 손에 쥐어주고는 문 저편으로 달아나, 자신의 편지에 대한 반응을 엄마의 표정에서 읽어내려, 상기된 얼굴로 숨어 지켜보던 그 정경을 잊을 수 없다. 이제 그 아이는 대학생이 되어 이모티콘까지 동원한 엄마의 구구절절한 내용의 문자에 달랑'ㅇ'이라는 답신만 보내오곤 한다.'응'이라는 한 글자도 길어 음운 하나로 압축한 대답인 것이다. 스마트폰 시대의 세태 반영이겠지만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해짐은 어쩔 수 없다.

문자 언어는 음성 언어보다 한결 정제된 깊이를 가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말을 할 때와 글을 쓸 때의 차이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꼭 종이에 쓰는 편지를 고집하지 않더라도, 다른 이와의 관계에서 글로써 길을 내면 그 만남이 훨씬 두텁고 돈독해진다. 타인과의 생의 교통에 활발히 열려 있는 사람, 그리하여 곧 다가올 따스한 봄날의 강물처럼 부드럽고 막힘없는 사람이 되고 싶거든 편지를 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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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