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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재 김규흥 선생 학술대회 고향 옥천서 열려

항일 무장투쟁의 선봉
충북대 박걸순·신라대 배경한 교수 등 사학자들 참여해 업적 재조명

  • 웹출고시간2016.10.16 14:37:12
  • 최종수정2016.10.16 17:48:45
[충북일보=옥천] 속보=옥천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범재 김규흥(1872∼1936·사진) 장군의 삶과 항일 무장투쟁을 조명하는 대규모 학술대회가 15일 옥천문화예술회관에서 열렸다.

<8월 16일자 4면, 10월 13일자 3면>

범재 김규흥 장군

옥천군과 옥천문화원, 사단법인 김규흥기념사업회에서 주최한 이번 학술대회는 그의 고향인 옥천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학술대회다.

'한국독립운동에서 김규흥의 위상과 중요성'이라는 주제로 한 충북대 사학과 박걸순 교수의 기조강연을 시작으로 김형목 독립기념관 선임연구위원과 신라대 배경한 교수, 안동대 김희곤 교수, 건국대 손염홍 교수의 논문발표가 이어졌다.

오후 2시부터는 서강대 최희곤 교수의 사회로 김규흥 장군의 업적을 재조명했다.

앞으로 김 장군을 기리는 세미나와 포럼을 정기적으로 열 예정이다.

15일 옥천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옥천출신 독립운동가 범재 김규흥 장군의 학술세미나에서 페널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김규흥 장군은 조선왕조가 망국의 위험에 내몰리던 시기 중국으로 망명, 독립운동의 기초가 되는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조선인으로는 최초이자 거의 유일할 정도로 중국 신해혁명에 가담해 도독부총잠의 겸 육군소장이라는 혁명정부의 요직에 오르기도 했다.

조선 독립운동을 위한 중국 내 지지기반 마련을 위해서 신해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게 학계의 분석이다.

범재 김규흥은 1919년 임시정부의 파견원으로 김규식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했으며, 1921년 박용만과 함께 북경에서 흥화실업은행을 세우며 무장투쟁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 후 1936년 작고할 때까지 의열투쟁, 언론사 설립, 둔전제 실행 등 독립운동의 획을 긋는 주요한 투쟁의 배후 역할을 한 인물이다.

김 장군은 독립운동 유공으로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김 장군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늦게나마 김 선생의 업적이 재조명 되는 학술대회가 고향 옥천에서 열려 다행"이라며 "이번을 계기로 김 선생의 독립운동 활약상이 제대로 알려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옥천 / 손근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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