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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공공인 故 이상훈 회장을 말하다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아름다운 덕… '진정한 공공인'

  • 웹출고시간2015.10.20 19:47:55
  • 최종수정2015.10.20 20:36:14
[충북일보] 계단을 오르는 은발의 신사가 책 한권을 가슴에 품고 나타났다. 책장을 넘기자 밑줄 그어진 문장들이 튀어 나올 듯 생생했다. 생각이 일치하는 장(章)은 곱게 접어 표시했다. 무슨 책일까 궁금했다.

'영원한 자유인, 이상훈'

김태창 교수

책을 든 이는 일본 장래세대종합연구소장을 지낸 김태창(82·사진) 교수였다. 충북대 교수를 지내다 홀연히 바람처럼 교수직을 내던지고, 유럽과 미국, 일본으로 떠났다. 오로지 자신이 평생 화두처럼 담고 있었던 '공공(公共)'의 의미를 찾고자 떠난 여정이었다. 한 일본인 학자는 그를 두고 '대학을 뛰쳐나온 공공인문학인'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한 자루의 검을 들고 강호를 종횡하는 무사처럼 '공공철학'을 들고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 무수한 학자와 시민을 대상으로 철학담론의 마당극을 질펀하게 펼쳐놓았다.

그가 꿈꾸는 공공철학은 무엇이었을까. 많은 이들이 추모하고 그리워하는 故 이상훈 회장을 가리켜 그는 말했다.

"이분이야말로, 영원한 공공인(公共人)이다."

이 날, 자리에는 김태창 전 교수와 유성종 전 교육감 그리고 도시개발(주) 김현배 대표가 참석했다. 모두의 가슴에는 앞서 돌아가신 이상훈 회장에 대한 아쉬움과 회한, 그리고 그리움이 깊고 맑은 하늘의 주홍빛 홍시처럼 물들었다.

- 공공철학의 의미가 무엇인가?

△김태창 교수

"공(公)이란 국가와 정부 체제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사(私)는 개인과 가정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5·16 혁명 직후, 송요찬 내각수반의 명으로 무차별적으로 부당하게 해직 당했다. 그때 처음으로 공(公)의 횡포를 몸으로 실감했다. 힘 있는 공(公)의 논리로 개인(私)의 삶이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때부터 진정한 공(公)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됐다. 당시만 해도 사(私)는 부당한 것이고, 공(公)은 무조건 좋은 것으로 인식하던 시절이었다. 공(公)은 한없이 높은 것이고 사(私)는 한없이 낮은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공은 반드시 옳기만 하고 사는 언제나 공을 위해 희생되어야 한다는 인식에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공(公)과는 다른 개념의 '공공(公共)'은 근본적으로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公)과 사(私)의 틈에는 간(間)과 제(際)가 분명 필요하다. 그 사이와 어우러짐이 즉, 공공(公共)이다. '공공'이란 국가와 개인이 동등한 관계이며 서로 도움을 주는 상생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유성종 전 충북교육감

- 故 이상훈 회장을 영원한 공공인(公共人)이라고 정의했다.

△ 김태창 교수

"이상훈 회장의 몇 가지 행동과 말로 그렇게 정의하지는 않는다. 그는 평생 언론인으로 살았지만, '사람과 사람' 그 사이(間)를 어우르게 하는 역할을 따뜻하게 수행해 온 분이다. 그는 공(公)을 탐하지 않았고, 사(私)를 추구하지 않았다. 그것은 공을 뛰어넘은 공공(公共)의 경지였다. 분열과 대립을 상호 매개하는 행동으로 새로운 세상을 개신(改新-새로운 지평을 열어감)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홀로 행복해지는 길이 아니라, 더불어 행복해지는 길을 추구했던 삶이었다."

△ 유성종 전 충북교육감

"이상훈 회장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직필의 언론인답게 직언하고 충언했다. 그것은 공공을 사랑하고 위하는 충정에서만 가능하다. 사람의 일은 관 뚜껑을 닫은 뒤에라야 정해진다는 말은, 사람은 죽은 뒤에야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소석 이상훈을 제대로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는 공공철학(公共哲學)으로 산 올곧은 사람이다."

△ 도시개발㈜ 김현배 대표

도시개발㈜ 김현배 대표

이상훈 회장은 사업가도 아닌데 호주머니 속 지갑을 먼저 털어내시는 분이었다. 원래 부모로부터 7채를 물려받았는데 돌아가셨을 때, 집이 달랑 1채 남으셨다. 그런데 빚이 4천만 원 있었으니 온전히 남긴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 '집 반 채 남기고 떠난 분'이라고."

-故 이상훈 회장과 세 분의 인연은 남달랐다고 들었다.

△ 김태창 교수
"전두환 정권이 출범할 때, 충북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당시 '사화정화운동'이 막 시작될 때인데 도청으로 오라고 해서 갔다. 그곳에서 신군부 대령이 나더러 느닷없이 '사회정화운동위원회 제1차 회의'를 주재하는 의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정식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누구를 정화해야 하는지 모른다.'고 고사했더니, 참석했던 육군소장이 노발대발했다. 철저하게 공(公)의 힘으로 사(私)를 누르는 형국이었다. 반혁명주의자로 몰려 낭패를 당할 뻔 했다. 그때 이상훈 회장이 중간에 나서서 모든 일을 수습했다. 양쪽을 다 살리는 공공(公共)의 실천이었다. 또 한 번은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정권이 시작될 무렵, 대공분실장이 나와 이상훈 회장을 불렀다. 나와 이상훈 회장에게 '유신국회의원' 제안을 했다. 그때 나와 이 회장은 정중하게, 그러나 명확하게 거절하며 '평생 학자와 언론인으로 살겠다.'라고 함께 선언을 했다. 그 약속을 죽는 그 순간까지 지켰다."

△ 유성종 전 충북교육감

"이 회장은 돈이 없었다. 보이스카우트 충북연맹장을 맡았는데 가장 힘이 없는 충북연맹을 최고의 연맹으로 평가받게 만들었다. 조직을 풍성하게 경영했고 각 지도자들의 가슴에는 뜨거운 열정을 불어넣었으며, 대원들은 즐겁게 만들었다. 그 분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모두 만족시키는 상생의 묘리를 깨닫고 실천했다."

△도시개발(주) 김현배 대표

"1988년 서원로타리클럽을 창립할 때, 이 회장님은 회원의 절반을 외지출신 기업인으로 구성했다. 이는 청주도 알리고 진정한 청주사람이 되게 하자는 속 깊은 취지였다. 정치를 하지 않으면서도 지방정치와 중앙정치를 아우르며 융화시킨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돈이 없으면서도 속 지갑을 먼저 털어내시던 분이었다. 그래서 늘 주변에 사람들이 들끓었다. 그야말로 공과 사,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양쪽의 살 길을 도모한 진정한 공공인(公共人)이었다."

공공철학에 대한 논의는 결국 故 이상훈 회장의 삶으로 귀결됐다. 세상에 하늘이 있으면 땅이 있고 가운데 사람이 존재한다. 김태창 교수는 천부경에 등장하는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이라는 말을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하나'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다시 공공인(公共人)을 '두 사람 사이를 서로 잇고 맺으며 살리는 덕(德)을 갖춘 사람'이라고 했다.

김태창 교수와 유성종 전 교육감 그리고 김현배 대표는 하나같이 故 이상훈 회장을 '사람 사이를 어우르게 하는 아름다운 덕(德)의 화신'으로 회고하며 진정한 공공인(公共人)으로 추억했다.

/ 윤기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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