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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무의 새충청 문화기행 - 신봉동 백제고분

봉황이 울고 간 자리엔 백제 전사의 무덤 떼가
3~5세기 마한 정복한 백제 지배계급 묻힌 곳
한반도서 백제 떼무덤으로 가장 큰 규모
둥근 손잡이 고리칼, 갑옷, 화살촉 등 무구류 출토
인근 봉명동, 송절동으로 이어지는 청주 역사의 산맥
신봉동 토기, 크기 모양 다채, 신봉동식 토기로 명명
속 깊은 바리형 토기 충북인의 심성 담은 듯
널무덤, 돌방무덤, 독무덤 등 묘제의 백화점

  • 웹출고시간2010.12.05 17:51:10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금속활자의 메카 흥덕사지 뒷산은 양병산(梁兵山)이다. 상당구에서 무심천 건너에 있는 이 산을 바라보면 마치 붓으로 한 일(一)자를 써놓은 모양이다. 좌청룡, 우백호의 형상을 갖춘 것은 아니라도, 이 또한 명당의 반열에 속한다. 도심 속의 그 작은 산맥은 길 건너 명심산(明心山)과 월명산(月鳴山)으로 이어지며 송절동으로 머리를 튼다. 고대로 이어지는 역사의 산맥이다. 이 일대는 마한(馬韓)과 이른 백제의 질그릇 및 초기 철기문화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동네 이름이 신봉동(新鳳洞), 봉명동(鳳鳴洞)이니 아마도 봉황이 날개를 펴거나 울고 간 자리일 게다. 달과 봉황이 여기서 왜 울었을까. 그것은 마한의 멸망에 대한 진혼곡(鎭魂曲)이거나 고구려와 신라 병사와의 싸움에서 목숨을 다하고 묻힌 백제 병사에 대한 초혼가(招魂歌)이었으리라. 애당초 청주는 미호천 가에서 질그릇을 구우며 평화롭게 살아가던 마한의 옛 땅이었다. 부모산의 아양국(我養國·我讓國)은 마한 56개 연맹체의 하나인 부족국가였다.

무기라고 해야 비철 금속인 청동 검 정도였다. 그런데 3~5세기가 되면서 강력한 철기문화를 갖춘 백제가 청주 땅을 점령하고 이곳을 백제에 편입시켰다. 마한에 이어 백제문화가 한창 꽃을 피우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로 5세기 후반의 청주는 삼국의 힘겨루기 장소가 된다. 청주를 에워싸고 충주·괴산에는 고구려가, 보은·문의에는 신라가, 청주·공주·천안에는 백제가 진을 치며 자웅을 겨뤘다. 3~4세기에는 청주를 지배한 철기집단이 이곳에서 살다 천명을 다하여 신봉동에 묻혔지만 5세기 후반에는 싸우다 전사한 병사들이 여기에 유택을 마련한 것이다. 이 고분군은 한반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백제 떼무덤이다. 책임조사원을 여러 번 맡았던 충북대 차용걸 교수도 "신봉동 떼무덤이 어디서 끝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조사된 면적은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청주 신봉동 백제고분 발굴조사 장면. 우리나라 최대 백제고분군이다.

백제 병사의 모습은 오간데 없으나 그 생활문화는 이곳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손잡이 부분에 둥근고리가 달린 긴칼(환두대도), 갑옷, 투겁창, 화살, 말 재갈 등 말 갖춤새(馬具類)와 여러 종류의 토기가 1982년부터 어섯차례나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쏟아져 나왔다. 네 자루의 둥근고리가 달린 긴 칼은 길이 80cm 안팎으로 전투용이라기보다 지휘자의 칼로 해석된다. 이 칼은 손잡이 둥근 고리 부분을 금이나 은으로 입사하여 봉황, 용 등을 그려 넣는 세공기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갑옷은 앞뒤를 이어붙인 개폐식(開閉式)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형태의 갑옷이 나온 곳은 신봉동 백제고분과 음성 망이산성 두 곳 뿐이다.

신봉동 백제고분군에서 출토된 둥근고리가 달린 긴칼과 말재갈 등 마구류

그 둥근 고리칼이나 갑옷 등으로 보아 신봉동 백제고분의 주인공은 지배자, 또는 지배자가 통솔하는 병사 집단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말모양 띠고리(마형대구:버클)도 주목할 만하다. 초기 철기시대, 봉명동에서 출토된 마형대구는 청주~상주~김해를 거쳐 일본 혼슈 오카야마로 향한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만든 새발자국무늬(조족문)토기는 경기도 일부~청주 신봉동~전북 나주~일본열도의 이동루트를 형성한다. 청주를 고리로 하여 소위 X축을 만들며 고대문화가 남행을 한 것이다. 여러 무구류(武具類)와 함께 나온 자그마한 쇠솥도 눈길을 끈다. 이 쇠솥은 쌀 한 되박이 들어갈까 말까 하는 정도인데 그 용도가 궁금하다. 아마도 말 궁둥이에 매달고 출격하며 밥을 지어먹던 휴대용 조리기구가 아니었을까. 봉명동에서 출토된 말방울(小銅鐸)도 자못 흥미롭다. 여기에는 '大吉'이라는 명문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7세기 경의 작품으로 보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다.

질그릇은 송절동이 시대가 앞선다. 여기에서는 입이 딱 벌어지고 밑바닥이 둥그스럼한 항아리가 속이 깊은 화분형 토기와 세트를 이루면서 출토된다. 2~3세기 원삼국 시대, 즉 마한시대의 토기이다. 왜 항아리 밑을 불안정하게 둥근 모습으로 만들었을까. 그것은 아직도 연구과제로 남아 있다. 여기서 월명산을 거쳐 봉명동, 신봉동으로 내려오면 3~6세기, 청주를 지배한 백제의 다양한 토기가 펼쳐진다. 마치 토기 백화점을 보는 듯 그 종류와 숫자가 천태만상이다. 속이 깊은 바리형 토기, 남성의 성기를 연상케 하는 쇠뿔손잡이가 달린 토기, 500cc, 1000cc 맥주 컵 비슷한 둥근 손잡이가 달린 토기, 주둥이 부분 양쪽에 대칭으로 구멍을 뚫은 토기, 간장, 된장을 담을 법한 작은 단지, 뾰족밑 단지, 곧은 입 작은단지, 손잡이 바리, 병모양 토기, 넓은 입단지, 몸통 긴 항아리 등 모양과 기능이 다른 토기가 저마다 맵시를 뽐낸다.

이중에서 둥근 손잡이가 달린 몇몇 토기는 당시의 도량형기 아니었나 추정된다. 실제로 담는 량을 재어보았더니 1200cc, 3600cc, 7200cc 등으로 나타났고 같은 모양을 한 토기가 여러 개에 달했다. 이런 그릇이 도량형기라면 당시에도 물물교환이든 화폐를 사용하든 어떤 형태로든지 상행위가 있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송절동 출토 토기는 거의가 섭씨 800도 이하에서 구워지는 연질토기이고 봉명동, 신봉동 출토 토기는 연질토기보다 섭씨 1200도에서 소성되는 경질토기가 더 많다. 토기의 겉면에 선문(線紋)이나 격자문 등이 나타나는 것은 두드림의 흔적이다. 토기를 빚으면서 나무판, 사내끼 등으로 외벽을 두드려야 흙 속의 공기가 빠져나온다. 두 번째 이유는 토기를 치장하는 미(美)의식에 있다.

신봉동 토기는 한성 백제의 토기와 유사하다. 한성백제 지역에서 나오는 세발달린 삼족(三族)토기 등이 신봉동에서도 나온다. 전체적으로 보아 한성백제와 매우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으나 아주 똑같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강 유역보다 미호천 가의 백제 토기가 더 발달된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신봉동 토기는 한성백제나 천안 청당동 등과 어떤 맥락이 이어지고 있으나 그 속에서도 이 고장만의 특징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화합하되 서로 다른 질그릇 문화를 미호천 가에서 꽃 피운 것이다. 그런 이유로 발굴조사단은 신봉동 출토 토기를 '신봉동 식 토기'로 명명하였다. 여기에서는 가끔 북방식 토기인 유견토기(有肩土器)도 발견된다. 몸통의 최대지름이 그릇의 중심에 있는 게 아니라 어깨부분에 있는 토기다. 삼국의 정립지대이기 때문에 백제토기이긴 하나 신라, 고구려의 요소도 슬쩍 스며든 것이다. 아무튼 신봉동 토기는 배부른 토기라든지, 속이 깊은 바리형 토기가 많다. 웅숭깊은 충북인의 심성을 닮아서 토기가 그렇게 생긴 것인지, 거꾸로 속 깊은 토기의 물성을 닮아 충북인의 속내가 깊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따지는 우문우답이기 때문이다.

청주 신봉동 백제고분 촐토 토기

신봉동 백제 고분은 토기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고대 묘제의 백화점이다. 발굴 조사된 전체 322기 무덤 중 널무덤(토광묘)이 228기로 가장 많으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 구덩식돌방무덤(수혈식석실분)도 찾아졌고 내륙에서 보기 어려운 독무덤(옹관묘)도 나왔다. 남쪽지방의 독무덤처럼 거대한 것은 아니나 작은 항아리를 겹쳐 묻은 것으로 보아 독무덤이 분명하다. 주검을 일정기간 밖에 내놓았다가 후에 뼈만 추려서 묻은 세골장(洗骨葬)인듯 싶다. 무덤은 2중 3중으로 중첩된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의 묘가 긴 세월이 흘러 봉분이 희미해지면 그 위에 다른 사람의 묘가 들어섰던 것이다. 상당수의 무덤은 시신과 더불어 껴묻거리(부장품)로 토기와 구슬 금귀고리 등을 넣었는데 껴묻거리를 묻기위한 별도의 유물곽을 조성하는 예도 흔히 나타난다. 무덤을 조영하는 방향은 오늘날과 정 반대다. 도참의 풍수지리설이 나온 연 후에는 무덤을 산줄기의 내림마루를 따라 세로로 쓰고 있으나 신봉동 백제고분은 거의가 등고선 방향과 일치한다. 그러니까 산 내림마루와 직교하는 모습이다. 이로보아 우리나라의 묘제는 도선국사의 풍수지리설을 기점으로 큰 변화를 겪는다. 당시에는 좌청룡, 우백호 식으로 명당을 따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980년대를 전후하여 신봉동 백제고분과 송절동 원삼국 고분은 도굴꾼의 표적이었다. 발굴조사 이전, 인간 두더쥐들이 상당량의 토기 등 부장품을 도굴해 갔다. 현장에는 토기조각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으며 발굴조사 과정에서도 도굴침을 맞은 구멍 난 토기가 여러 점에 달했다. 조상의 묘를 파헤쳐 돈을 벌자는 아주 불경스런 범법 행위다. 1987년, 신봉동 백제고분은 사적 제319호로 지정되었으나 뜸하긴 하지만 아직도 도굴꾼들이 노려보는 곳이다.

신봉동에 위치한 백제유물전시관 전경

지난 2001년 11월에 문을 연 백제유물전시관은 그동안 발굴 조사된 송절동, 봉명동, 신봉동, 명암동, 가경동과 신봉동과의 연계성이 있는 청원 송대리, 주성리 유적을 포함 초기 철기시대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강민식 학예실장은 "청주의 고대사와 더불어 청주 역사문화의 뿌리를 한곳에서 훑어볼 수 있는 곳"이라며 "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자 터치스크린, 매직비전 등 첨단기법을 도입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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