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웹출고시간2010.11.23 18:08:51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세칭 '도깨비 할아버지'로 불리던 고 대갈(大葛) 조자용(趙子庸) 박사가 타계한지 10주기를 맞았다. 그를 따르며 그와 함께 공부했던 한국민화학회 회원 1백여 명은 지난 13~14일 선생을 기리며 보은문화원에서 학술세미나를 가진데 이어 속리산 천왕봉 자락 대목리, 양지바른 곳에 묻힌 선생의 유택에서 10주기를 맞아 조자용 박사 추모비를 건립하고 제막식을 가졌다. 고건축을 전공한 장현석 청주문화원장이 설계를 하고 시인 홍강리 씨가 비문을 지었으며 서예가 김동연 씨가 글씨를 썼다.

"대한 강토 큰 인물로 황주 땅에 태어나/ 갈매기 빛 꿈을 이뤄 하버드대 학위 받고/ 조선얼 기리고자 민화세상 섭렵하며/ 자강불식 연마하여 건축사 새로 쓰니/ 용솟는 그 기개가 온 누리에 가득차매/ 선생께서 남긴 업적 후세에 빛이 될 터/ 생전에 못다 이룬 청사진 가슴 품고/ 송덕찬사 뒤로한 채 천왕봉 신선됐네" (추모비문 전문)

추모비문에서 보듯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나 하버드대에서 공학박사(전공, 구조역학) 학위를 받은 고 조자용 박사는 우리나라 근·현대 건축의 선구자였으나 만년에 이르러 전공과 달리 보은 속리산 자락서 민화와 도깨비에 심취하여 에밀레 박물관을 짓고 우리의 얼과 문화를 연구하다 지난 2000년 1월30일,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슬하에 자식이 없는 데에다 타계한 날이 세밑이어서 다소 쓸쓸한 장례식이 됐다. 대구 청구대 교수로 있으면서 계성고교의 다릿발 없는 강당을 짓고 경북대 본관건물을 설계하는 등 건축사에 큰 족적을 남긴 그가 돌연 속리산 자락으로 숨어든 것은 무슨 이유일까.

조 박사는 개인적으로는 속리산과 인연이 없다. 일가붙이가 사는 곳도 아니요, 그리운 사람들이 기다리는 곳도 아니다. 다만 지병 치료차 속리산을 찾았을 때, 웅장한 산 모양과 삼신(三神)이 내려올 듯한 천왕봉의 기세에 반해 여기서 그냥 눌러 살았다. 정이품송이 고고하게 서 있는 속리산 초입에 에밀레 박물관과 초막을 짓고 민화와 도깨비 연구에 몰두하던 그였다. 에밀레 박물관은 민화와 도깨비 기와로 가득 찼다. '까치 호랑이' 등 민화에 있어서는 우리나라에서 에밀레 박물관이 가장 많고 진귀한 작품을 소장했다. 한번은 전라도 어디서 까치 호랑이 병풍이 나왔는데 조 박사는 달라는 대로 다 주고 너무 기뻐 손목에 차고 있던 롤렉스 시계와 타고 간 지프를 덤으로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이야기는 골동품업계의 전설로 남아있다.

그는 학문 연구에만 매진한 것이 아니라 개천절인 10월3일을 택하여 고대의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재현했다. 이를테면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濊)의 무천(舞天)같은 제천의식을 행한 것이다. 마당을 중심으로 초막을 짓고 참석자들이 술 마시며 밤새도록 노는 국중대회를 매년 열어왔다. "춤춰, 춤춰..."하며 놀기를 권유하는데 "난 춤 못춰요"하고 슬쩍 꽁무니를 빼는 사람이 있으면 "이봐 도깨비가 춤 레슨을 받아서 춤을 추느냐"하며 어스름 달빛을 조명 삼아 너울너울 막춤을 추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시월제천(十月祭天)하고, 남녀철야음주가무(男女徹夜飮酒歌舞)를 했다는 옛 기록대로 열린 신명나는 도깨비 한마당 축제에는 인간 문화재 김금화의 작두거리가 펼쳐졌고, 김덕수 사물놀이 패나 심지어 제주도 오돌또기 패까지 초청되었다. 이 전통놀이 마당에는 우리나라사람 뿐만 아니라 외국인도 다수 참석하였다.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에, 조 박사의 외국인 친구에 도깨비 한마당은 국경을 초월한 놀이마당으로 언제나 초만원을 이뤘다.

더러 탐방객이 찾아오면 청자대접에다 막걸리를 따라 벌컥벌컥 마시던 서민적 학자였다. 큰 키에 백발과 흰 수염을 휘날리며 겅중겅중 걷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도깨비 할아버지다. 한 번은 충북대 박물관에 느티나무를 거꾸로 세워 만든 도깨비 장승을 기증했다. 때가 윤달이라 나무를 거꾸로 세워 놓아도 아무 탈이 없다는 것이다. 그 도깨비 장승은 지금도 구 박물관(전자계산소)앞에서 아침저녁으로 학생들과 인사를 나눈다. 민화와 도깨비, 그리고 삼신(三神)사상에 심취했던 그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에밀레박물관을 꽉 채웠던 민화 등도 어디론지 거의 사라지고 도깨비 놀이마당은 폐허로 변했다. 아무래도 보은군에서 거리가 가까우니 고 조 박사의 유지를 이어나갔으면 한다.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