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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부일의 수필로 찾아가는 문화유산 - 부석사

봉황산 기슭서 엿보는 신라고찰의 美

  • 웹출고시간2010.10.03 23:20:46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부석사를 찾아 가는데 왠지 마음이 상쾌해지며 기분이 좋아진다.

소백산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일까? 사과 밭 빨간 능금이 속살을 들어내서 일까? 를 생각하며 영주 부석사 주차장에 왔다.

부석사는 태백산과 소백산의 두 줄기 갈라 진 깊은 계곡 수려한 산세와 맑은 물이 흐르는 봉황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주차장 식당가에서 마음을 닦고 오르라는 세심 교를 지나 매표소 이고 일주문이다. 현판에 "태백산 부석사" 라 쓴 일주문으로 들어갔다.

부석사 일주문

박석 길 양옆으로 은행나무가 줄을 지어 서 있고 그 아래 떨어진 은행잎이 양탄자처럼 깔려 피안의 길 같아 오르는데 일승원음 범종소리가 산사에 울려 펴진다.

이 지극 한 도는 형상 밖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지라 보아도 능히 그 근원을 보지 못하고, 대음은 천지를 진동하는지라 들어도 능히 그 소리를 듣지 못하도다. 이 범종 소리는 진리를 깨우쳐 주는 부처님 소리이다.

◇ 입구에 통일 신라 당간 지주와 대 석단 108계단

당간지주

부석사 입구 안양루를 향하는 길가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범종 소리에서 깨어나 앞을 보니 최근에 세운 부석사 중수비가 세워져 있고 그 위에 통일시대 당간지주가 키를 자랑하고 서있다. 비 앞 1m 사이에 서있는 당간지주의 높이가 4.2m로 아무런 장식 없이 서있다.

위로 갈수록 조금씩 좁아져 단정한 모습으로 반원을 그리며 안으로는 깃대 매는 홈을 파져 있다. 그리고 아래 긴 기둥 받침에는 지름 30cm되는 둥근 기둥을 파서 간을 받치게 하고 그 주변에 깔끔한 연화문을 놓았다. 보물 제255호인 이 당간지주는 부석사 전성기에 깃대를 달았던 것이다.

부석사 천왕문

이를지나 1980년에 마련한 사천왕문으로 오르면 대 석단 구품만다라 계단이 맞이한다.

구품 만다라는 관 무량수경에 나오는 극락세계에 이르는 방법으로 하품하생에서 중품중생, 상품상생에 이르기까지 아홉 가지단계를 행실과 공력을 지극하게 수행하면 극락에 환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석사의 가람 배치는 하나의 만다라이다. 다른 가람에서는 대개 계곡 깊숙이 배치하는데 부석사는 능선을 이용하여 구품 만다라의 세계를 만들어 놓았다.

구품 중 하품인 천왕문 앞의 계단, 범종루 선상 중품중생, 대 석단 안양 루의 상품상생에 이루면 누구도 업을 씻고 극락에 이른다는 구도자에 원리란다.

부석사 삼층석탑(유형문화재 제130호)

사천왕문에서 힘들게 오르면 단아한 3층 석탑 한 쌍이 길 양쪽에 서있다. 9세기쯤에 만든 탑으로 추측 되는데 인근 옛 절터에서 옮겨 왔다. 이 쌍 석탑 서쪽 뒤에 나란히 모셔져 있는 세분의 불상은 동쪽의 옛 절터 북지 1리에서 모셔 온 것이다. 그 왼쪽으로는 요사 채가 있고 우측에는 1996년에 새로 지은 유물 전시 각이 부석사의 흘러간 역사를 알려준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앞에 서며

부석사 안양루


만다라 계단 따라 계속 오르면 왼쪽으로 범종루이고, 누각을 향해 정면으로 괘불 지주가 있다. 그 서쪽으로 조사당 옆에서 옮겨온 취현암 건물이다. 그 밑에서 올라보면 가파른 대 석단이고 이를 오르면 극락의 문, 안양루이다.

여기까지가 사바세계 108번뇌를 하나하나 깨치며 올라온 108계단이다.

안양 루에서 앞 을 바라보면 수려한 영봉들이 장관인데 이는 영봉들을 절 마당으로 끌어오기 위하여 경사진 봉황산 중턱을 깎아 108계단과 돌 축대를 쌓은 것으로 생각된다.

앞산의 능선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각도를 조금씩 틀어가며 쌓은 축대와 계단은 그 시대가 만들은 예술이다. 지형으로 축대를 쌓지 않고 도량 자체를 불법으로 승화하기 위한 구품 만다라에 구현을 위해 쌓은 것이다.

부석사의 오묘한 진리 앞에 안양 루, 석등과 무량수전등을 배치했을까? 생각하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을 만져 본다.

◇부석사의 옛 일들

경상북도 영주의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한국 화엄종의 근본도량이다. 부석사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일몰 모습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때 왕명에 의하여 의상 대사가 창건하고 고려 현종 때 원융국사가 무량수전을 중창하여 오다가 1969년에 부분적으로 공사하여 오늘에 이른다한다.

부석사에 재미난 의상대사의 창건설화가 전하여 진다.

의상은 성이 박 씨로 29살에 당나라에서 화엄수학이 한참이라는 소문을 듣고 원효대사와 함께 유학의 길에 오른다.

그러나 원효는 무덤에서 해골에 담긴 물을 먹고 깨달음을 얻고 돌아갔다.

의상은 당나라 유학을 결심하고 유학길을 떠난다.

바다가 비바람에 배마저 없어 2년을 기다려야 했다. 2년 동안 배를 타기 위해 어느 어부의 집에서 묵어야 했다. 그 집 어부가 융성이 대접을 하면서 자기 딸이 당나라로 잡혀갔는데 당나라에 가면 꼭 구하여 달라며 애원을 하였다.

애절한 어부의 부탁을 받고 비바람을 기다려 2년 만에 당나라 해안 등주에 도착했다.

의상은 한 신도의 집에서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 집에 선묘라는 아름다운 아가씨가 있었다. 선묘는 의상의 용모가 매우 뛰어나 가까이 하려 하였지만 의상의 마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의상의 의지를 알고 도심을 일으켜 대원을 발하였다.

선묘는 "세세생생(世世生生 )에 스님께 귀명 하겠습니다. 대승을 배워 대사를 성취하기를 빌며 자기는 시주가 되어 스님께 필요한 생활품을 바치기로 결심을 하겠습니다." 하고 맹세를 하면서 자기가 신라 여인인데 당나라 잡상인에게 잡혀가다가 폭풍우를 만나 배가 전복되어 지금의 아버지가 구출하여 오늘까지 키워줬다는 이야기를 의상에게 들려 주웠다.

은혜를 입은 어부의 딸을 여기서 만날 줄이야 상상도 못했던 의상은 마음이 선묘에게 다가갔다. 갈등의 세월을 보냈지만 의상은 승려의 길을 찾아 지엄 삼장스님에게 화엄 학을 배우러 선묘를 두고 떠났다

◇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려 귀국

오랜 세월 화엄을 공부 하던 중 당나라 태종이 신라를 쳐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고국에 이를 알리기 위하여 귀국하던 중 선묘가 살고 있는 문등현을 찾았다. 선묘가 출타 하고 없어 만나지 못한 서운한 마음으로 배를 타러 선창가로 갔다.

출타에서 돌아온 선묘는 의상이 선창가로 배를 타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 의상 대사를 위해 준비 하였던 법의와 여러 가지 집기들을 함에 넣고 해안으로 속히 따라갔지만 이미 의상의 배가 떠 난 뒤였다.

그녀는 할 수 없이 축문을 외우며 옷함을 물에 던졌다. 때마침 질풍이 불어 의상이 탄 배에 닿게 하는 것이다.

그녀는 의상을 위하여 "내 몸이 변해서 대 용이 되어 안내할 수 있기를 바라옵니다." 말하고 "저 배가 무사히 신라에 돌아가 당나라에 계략도 전하고 화엄을 포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바라옵니다." 하고 물에 몸을 던지니 용이 되었다. 용이 된 선묘가 배를 끌어 무사히 신라에 도착했다.

귀국하여 당나라가 침범 한다는 사실을 왕에게 알려 나라의 전화를 막아 주고 화엄도량 명당을 찾아 팔도산천을 다니던 중 소백산 줄기 봉황산이 제일임을 알고 이곳에 부석사를 창건하려 하였다.

그러나 500여명의 이교도들이 봉황산 산허리를 차지하고 있어 절을 질수가 없었다. 그때 선묘가 큰 바위로 변해 허공을 떠돌자 이교도들이 혼비백산 도망을 치자 의상이 뜻을 펼쳐 그 자리에 우리나라 화엄 대가람 부석사를 창건하였다 한다.

부석사 부석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할 때 선묘가 부석으로 변해 시정 잡배들을 물리쳤다는 전설이 전한다.

그래서 바위가 떴다하여 뜰부(浮) 돌석(石)을 써 부석사라 부르고 있다.

지금도 그 부석바위가 무량수전 서쪽에 웅장한 모습으로 있다.

그 후 선묘는 석용이 되어 무량수전 마루 밑에 묻혀 있다한다. 이를 상징하듯 부석사 경내에 선묘정 우물이 있다.

◇더 없이 아름다운 무량수전

부석사 무량수전(국보제18호)

무량수전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선묘의 설화를 되새기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여 본다. 무량수전은 국보 제18호로 고려 중기의 건물로 우리나라에서 안동 봉정사 극락전에 이어 두 번째 오래된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 주심포집으로 1916년 해체 수리하였다 한다.

무량수전 건물에 "무량수전" 의 현판을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 때 안동으로 피신하다가 난이 끝나 귀경하면서 부석사에 들인 공민왕이 "무량수전" 현액의 글을 써서 달았다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주불은 극락 부처님 아미타불을 모셨다.

무량수전의 묘미는 여러 가지 요건의 부재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배흘림기둥이다.

배흘림기둥이란 아래쪽 1/3쯤 기둥의 배가 불룩하게 보이며 밑과 위를 깎아 가운데가 불룩하게 나온 것을 말한다. 이 배흘림기둥 머리에 공포를 올리고, 변주 위공포가 높은 기둥머리에서 나온 퇴보를 받치고 있다.

다른 절은 북쪽에서 남쪽을 향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부석사는 특이하게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부처님이 안치되어 있다.

서방 세계의 교주인 아미타불을 모셔서 배치된 것으로 생각된다. 불상은 흙으로 빚은 소조좌상인데 고려 중기의 불상으로 높이가 2.7m, 머리가 0.91m, 광배가 3.8m로 아미타좌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

◇신라의 석등과 석가탑을 본뜬 3층 석탑

무량수전 앞에는 통일 신라의 걸작 석등이 천여 년 역사 속에 서있다. 국보 17호인 이 석등은 신라 중기 이후로 추정되는데 높이가 2.29m로 8각을 하고 있다.

석등 화사석에 다소곳하고 수줍은 미소를 짓는 공양 보살상이 조각되어 더욱 아름답다.

그 앞에는 안양루가 있는데 그 곳에서 바라본 봉석산, 매봉산, 비봉산, 옥녀봉의 비경은 사무치는 마음처럼 그윽하여 보인다.

부석사 삼층석탑(보물 제249호)

이중기단위에 3층 몸돌을 쌓은 전형적인 석탑이다.

무량수전 우측 옆에 선묘가 들었던 부석 바위가 있고 좌측에는 선묘의 영정을 모신 선 묘각이다. 선 묘각에서 언덕을 오르면 육중한 3층 석탑이 서있다.

보물 249호인 이 석탑은 부석사 창건 시에 없었던 것으로 9세기경 중창하면서 세운 것으로 보인다. 높이 5.26m로 2층 기단 위에 3층으로 쌓은 석가탑을 본뜬 전형적인 탑이다.

1960년 해체 수리를 하였는데 사리공이 발견되었지만 사리구는 없고 기단부에서 철제 탑, 불상조각, 구슬 등이 나왔다.

탑은 동쪽에 위치해 있는데, 이는 서쪽에 앉은 아미타불과 마주 앉은 자리가 동쪽 끝으로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이 아닌가 생각되며 무량수전 앞마당 석등이 있어 비좁아 동쪽 끝으로 자리를 한 것이 아인가 사료된다.

◇산자락을 오르니 조사당이

여기에서 산자락을 타고 오솔길 따라 오르면 두 갈래의 길이 나온다. 동쪽으로 가면 국보 19호인 조사당이 나오고 서쪽으로 가면 응진전과 자인 당이 나온다.

부석사 조사당(국보제19호)

조사당은 무량수전에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산 중턱에 있다.

조사당은 고려 정종 때 건립하고 우왕 때 중수한 높이 3.39m의 아담한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기둥 위에 공포가 설치된 주심포집이다. 조사당의 벽화는 국보 46호로 고려 우왕 때 그려진 보살상 2폭과 다문천왕상, 광목천왕상, 지국천왕상 ,증장천왕이 그려져 있는데 지금은 무량수전에 안치되어 있다.

부석사 선비화(의상대사지팡이나무)

또한 조사당 앞에 콩과의 선비화가 있다. 이 선비화는 의상대사가 쓰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인데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도 1300년을 살아온 전설의 나무라 한다. 이 나무 잎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때문에 자식 낳지 못하는 부인들에게 수난을 당해 이를 막기 위하여 이중의 철장을 설치했다.

부석사 자인당 전경

서쪽 자인 당으로 가면 세분의 석불 상이 모셔져 있다.

대좌와 광배가 완전한 양쪽 두 분은 보물 제220호로 비로자나불이다. 가운데 한분은 극락의 주인이신 아미타불로 생각된다.

양쪽 두 석불은 범종각 아래 쌍탑과 함께 동쪽 골짜기 절터에서 모셔 왔고 광배가 없는 가운데 부처님은 부석사 동쪽 강 건너 약사 골에서 옮겨 왔다고 한다. 오랜 세월의 풍화 작용으로 부처님은 많이 변했지만, 광배가 매우 섬세함이 있으며 하대석과 중대석에 사자와 연꽃잎, 향료,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고려 풍의 응진 전에는 석가삼존불과 함께 나한상이 모셔져 있고 조그마한 단 하각 안에는 쥐 한 마리를 무릎에 앉힌 나한상이 있다. 이는 사리를 얻으려한 설화의 알려진 육조시대의 천연 선사를 모신 것이 아인가 생각된다한다.

부석사의 아름다운 풍광은 아래에서 위로 점점 올라오면서 구름과 안개 속에 구품 품계를 배치한 극락의 세계다.

그 진리에 우주의 본질이 상대적 관계로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와 전체의 원리를 꿰뚫어 보아야 한다는 화엄사상의 진리를 부석사에서 새겨본다.

응진 전, 자인 당, 단 하각 앞에서 바람에 흔들이는 나뭇가지 사이로 영봉들을 바라보니 영봉이 동북을 감싸고 서쪽으로 소백산 중턱에 길게 처져 내린 수 없는 봉우리들이 무아지경을 만든다.

부석사의 자연, 신라의 석축, 산사에 흩어진 고승들의 석비들이 어울려 있는 선경의 산사에 합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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