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흔히 자신이 바라는 것, 또는 탐내는 것을 바라본다. 좋은 옷에 욕심이 많은 사람은 어디를 가든 좋은 옷에 시선이 가기 마련이고, 좋은 차에 욕심이 많은 사람은 좋은 차에 관심을 많이 갖는다. 명예나 권력에 대한 욕심이 많은 사람은 또 이런 것들을 바라보며 그것을 얻기 위해 애쓴다. 돈을 많이 갖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신문이나 TV를 보더라도 재테크에 관한 내용에 시선이 가장 많이 쏠린다. 반면에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은 길을 가다가도 가난하거나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들은 무심코 그냥 지나치더라도 이런 사람에게는 결코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내가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를 보면 지금 내가 무엇을 가장 바라고 탐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자신이 자주 바라보는 것을 탐내고 닮아간다. 설령 처음에는 무심코 보던 것이라도 그것을 자주 바라보다 그것을 탐내고 닮아가기 마련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무엇을 보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것을 닮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을 관상하느냐에 따라 어느 틈에 그런 존재로 변해간다. 이를테면 예수를 바라보며 그의 삶을 따르려는 사람은 예수를 닮고, 부처를 바라보며 그를 따르려는 사람은 부처를 닮는다. 훌륭한 사람 밑에서 그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훌륭한 사람의 좋은 점을 배우기 마련이다. 늘 밝고 명랑한 태도로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과 함께 지내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런 면을 따라가게 된다. 또한 늘 어둡고 불만스런 표정으로 불평하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가까이 하게 되면 자신도 비슷하게 불평불만하고 있는 모습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마음은 잘 전이되어 어느새 자신도 그런 사람의 모습이 되어간다. '사람은 함께 사는 사람을 닮는다' 그래서 '웃을 일이 있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다 보면 기뻐진다'고 하지 않던가. 성공한 사업가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안 되는 이유 열 가지보다 되는 이유 한 가지가 성공을 보장합니다. 저는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돌릴 때도 되는 이유 한 가지를 바라보며 그것을 통해 안 되는 이유를 극복해 냈습니다."되는 이유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만 바라보며 나아가면 되기 마련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지금 내가 가장 바라고 욕심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삶이 아무리 바쁘고 고달프더라도 때때로 자신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시선, 그리고 나의 가치 기준이 어디 있는지 한번쯤 살펴보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유럽의 사냥꾼들이 아프리카로 사냥원정을 나갔다. 그들은 맹수 사냥에 경험이 많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몰이꾼으로 고용하여 맹수들을 몰아오도록 했다. 그런데 열심히 맹수를 몰던 몰이꾼들이 갑자기 달리던 발걸음을 멈추더니 주저앉아 쉬는 것이었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 이유를 물었다. "맹수를 몰다 말고 왜 갑자기 쉬는 건가?" "너무 급히 달리다 보니 마음이 아직 따라오지 못했어요. 그래서 내 마음이 올 때까지 쉬면서 기다리는 겁니다." 이 맹수몰이꾼들처럼 우리도 인생을 너무 급히 달려오느라 마음이 미처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세상의 부귀와 명예, 권력을 잡기 위해, 유튜브, 넷플릭스에 빠져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시류에 흘러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인간이란 단지 육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 즉 마음과 영(靈)이 함께 존재해야만 비로소 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만일 이 중 하나라도 존재하지 않거나 결여된다면 참다운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즉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모습, 단순한 감각적인 즐거움에 빠져서 내면적인 나, 영혼이나 마음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거나 이를 발전시키고 아름답게 가꾸는 데에는 소홀하다. 사실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이 자신의 영혼, 자신의 마음을 물신(神)의 메피스토펠레스에게 팔아넘긴 채 육체의 만족과 쾌락, 충동적이고도 찰나적인 삶에 빠져 살고 있다. 그야말로 세상의 부귀영화와 육체의 향락에 눈이 멀어 자신의 영혼이 병들고 자신의 마음이 시궁창처럼 더러워진 것도 모른 채 허망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영혼이 이처럼 병들고 타락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자각하지 못한 채 허망한 삶만 계속 추구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인생이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풍요롭고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치며 군림하더라도 그는 생명력을 상실하고 자기 영혼을 잃어버린, 가련한 존재일 뿐이다. 때문에 우리는 세상살이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늘상 자신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마치 자동차로 장거리 여행을 할 때 수시로 차에서 내려 차에 어떤 이상이 없는지를 살피듯이 인생의 바쁜 여정 속에서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영혼과 마음의 상태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병든 부분, 더러워진 부분, 찌들거나 일그러진 부분이 있다면 속히 이를 고쳐 회복시켜 놓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이를 위해서는 신앙의 힘도 필요하며, 끊임없는 자기성찰이 요구된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이를 외면한 채 돈이라는 윤활유만 있으면 자신의 인생은 매끄럽게 잘 굴러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돈만 있으면 자신의 영혼이 풍요로워진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마저 있다. 과연 그럴까? 맹수를 쫓다가도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마음이 따라오기를 기다리는 아프리카의 그 몰이꾼들처럼, 우리도 잠시 바쁜 일상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지금 내 마음이 어디 있는지, 또 지금 내 영혼의 상태가 어떤지 한번 신중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동의보감(東醫寶鑑)』으로 유명한 조선조의 명의 허준(許浚)은 평시 고관대작의 집에 왕진 가지 않기로 유명했다. 어중이떠중이들이 벼슬이나 한답시고 의원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오라, 가라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관대작들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허준은 이런 왕진 요청이 올 때마다 자신이 각기병으로 걸음이 불편하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핑계를 대곤 했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허준도 임금의 행렬을 따라 의주를 향해 급히 피난을 가게 되었다. 이것을 본 이덕무(李德懋)라는 사람이 허준을 향해 한마디 던졌다. "대감, 각기병에는 그 어떤 약보다도 난리탕이 최고인가 봅니다." 다급해졌을 때의 허준의 행동을 보고 비꼬아 한 말이었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는 다급해지면 분발하게 되는 속성이 있다. 또 따습고 배부른 때에는 하기 싫거나 하지 못했던 일들도 사정이 다급해지면 거뜬히 해내는 수도 많다. 이를테면 평소에는 힘이 약했던 어머니가 위기에 처한 자녀를 구하기 위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수가 종종 있듯이 위기적 상황은 인간을 강하게 만든다. 지금 우리는 전 지구적으로 엄청난 기후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미국은 사상 유래없는 북극 한파로 체감온도 영하 56도 혹한을 보내고 있고 또 한쪽에서는 홍수가 나 도시 전체가 물에 잠기는가 하면 끊임없는 산불의 위협과 빈번한 쓰나미 등 지구 곳곳에 재앙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거대한 문제조차 위기를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로 인류가 합심한다면 기후 위기 또한 너끈히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인간에게는 원래 실낱같은 희망만 가지고 있어도 그 한 줄기 빛을 잡고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빠져나올 수 있는 강한 힘과 초인적인 능력이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 속에 담겨져 있는 이런 힘과 능력을 깨닫지 못하거나 스스로 불신하며 희망과 용기를 갖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자꾸 어려운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것 같더라도 자신에게 이런 숨겨진 힘과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희망과 용기를 갖는다면 그 어떤 구렁텅이에서도 빠져나올 수 있다. 인간에게는 흔히 아프면 약을 찾는 성질이 있는데,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자신의 숨겨진 힘과 능력을 찾고 희망과 용기를 갖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좋은 약이다. 궁즉통, 즉 '궁하면 통한다.'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에서 이국의 땅에서 멋진 포즈를 취하고 있거나 화려한 프로필을 보면서 이 친구는 참 멋진 인생을 살고 있구나 하며 부러워할 때가 있다. 하지만 멋이란 개념은 달리 해석될 수 있다. 흔히들 '멋진 인생'이라고 하는, 여기에 쓰인 '멋'이 과연 '멋'일 수 있을까? '멋'이란 본래 내면에 숨겨진 것이 겉으로 배어날 때 돋보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 전해져서 흔히 겉으로 나타난 상태만을 단적으로 의미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마치 열매가 맺히기 전에 꽃만을 보고 아름답다고 하는 것과 같다. 옛날 중국의 당나라 시절의 이고(李庫)와 운문선사의 대화처럼 그렇게 판단하려 한다. 운문선사라면 당대에 너무나 법도가 높기로 소문이 나 있어 이고(李庫)는 자기 나름대로의 운문선사의 모습을 마음에 그리고 있었다. 하루는 운문선사를 뵈려고 찾았다. 소나무 밑에서 불경을 읽고 있는 이를 보고 실망한 나머지 불경한 말로 소리를 질렀다. 볼품없이 생긴 운문선사는 빙그레 웃으며 하는 말이, "당신은 어째서 귀만 귀(貴)하게 여기고 눈은 천히 하느냐"고 했다는 고사가 있다. 꽃과 열매의 경우도 이 한 마디의 말 가운데 함축시킬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중히 여기고 그 뒤에 숨은 뜻은 가볍게 보지 않는가. 아인슈타인 박사가 훌륭한 바이올린니스트였다는 사실은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그에 대한 일화로 유명한 것이 난민 구호 모금이다. 어느 해인가 비가 몹시 와서 물난리로 이재민이 많이 생겼다. 아인슈타인 박사는 이를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구호금 모집에 나섰다. 바이올린 하나만을 들고 아내와 함께 거리로 나와 빈 트럭에 올랐다. 거리엔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 그는 서슴지 않고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지나던 사람들은 발길을 멈추고 훌륭한 연주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데 한 곡이 끝날 적마다 그의 아내는 적선을 호소했다. 이렇게 해서 모금된 돈으로 그 마을의 이재민을 도운 적이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유명하다. 인생의 멋. 그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도, 과시하기 위한 수단도 될 수 없다. '멋'이라고 하여 결코 남에게 돋보여야 된다는 법도 없고 반드시 남에게 나타나야 한다는 법도 없다. 한낱 꽃과 같이, 피었다 지고 나면 그뿐이라면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생명력이 주어질 때, 모든 것은 영원성을 추구하게 되고, 가치가 부여되는 것과 같이 멋의 의미는 값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생명력이 없는 '멋'은 빨리 시들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 비천해 보일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