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리지 이중환 단양은 도내 지자체 중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지니고 있다. 이중환은 얼마나 경치에 반했는지 단양읍내는 언급하지 않고, 대신 주변 명승지를 하나씩 세밀하게 소개했다. 먼저 도담삼봉이다. "물속에서 돌봉우리 세 개가 솟아 있는데 각각 떨어져서 있으면서도 활줄같이 한 줄로 곱게 서있다. (하늘이) 쪼아서 아로새긴 솜씨가 기이하고도 공교로워 마친 인가(人家)에서 쌓은 석가산(石假山)같다. (다만) 우뚝하거나 깎아지른 모습이 없으니 한스럽다." 단양 단성면에는 단양팔경의 하나인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의 삼선암이 위치하고 있다. 삼선암의 아름다운도 마치 수채화를 보듯 표현했다. 글을 읽어내려 가다보면 시원스레 석간수(石間水)가 귓전을 때린다. "삼선암은 군 서남쪽에 두메에 있다. 산속의 큰 시냇물이 돌로 된 골을 따라 흘러내리는데 시내 바닥과 양쪽 언덕이 모두 돌이다. 시냇물이 흘러내리다가 길게 파인 돌에 이르면 돌유구에 물을 담은 것처럼 되며 둥글게 파인 돌에 이르면 돌가마에 물을 담은 것처럼 된다. 돌과 돌이 서로부딪히며, 밤낮으로 시끄러워서, 물가에서는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사인암은 대강면 사인암리에 위치한다. 사인암이라는 이름은 고려
전회에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충주 주변을 자세히 둘러봤다. 이중환이 그 다음으로 향한 곳은 지금의 음성읍 일대가 아닌, 가섭산 북쪽의 생극면 팔성리라는 곳이다. 팔성리에는 지금도 지천서원이 존재하고 있고, 서원 안에는 기묘사화 명현의 한 명인 김세필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이중환이 팔성리 일대를 찾은 것에는 나름의 목적이 있었다. 이중환은 이때의 소회를 이렇게 적었다. '이곳이 바로 기묘사화 때의 명현 십청 김세필이 벼슬에서 물러나 살던 곳이다. 그의 자손들이 지금까지도 대대로 살며, 민가가 수백호인데 모두가 넉넉하게 산다.' 정치 소용돌이의 희생양이 됐던 이중환은 기묘사화때 화를 당한 김세필을 크게 의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처지를 김세필과 동일시한 심리도 다분히 엿보이고 있다. 김세필은 기묘사화 때 조광조에게 사약이 내려지자 그 부당함을 말하다 귀양갔던 인물이다. 그는 얼마안가 해배됐으나 더이상 중앙정계에 머물지 않고 지천서원이 있는 팔성리 일대로 낙향,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렸다. 이중환은 생극면 팔성리 지천서원을 둘러본 후 그 끝 부분을 '이 지방 사람들은 금천, 가흥, 말마리와 강 북쪽에 있는 내창을 충주의 4대촌이라고 한다'라고 적었다. 이중환
한반도는 물론 전세계 선사인이 그린 암각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충북대박물관(관장 양기석 교수)의 제 19기 박물관대학 1학기 과정이 지난주부터 시작됐다. 이번 교과과정은 '미술로 이해하는 우리역사'를 주제로 하고 있어, '피부에 직접 와닿으면서 재미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낳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지난주 1주차 강의에는 장석호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등단, '한국의 암각화'를 주제로 강의를 했다. 그는 먼저 암각화의 제작기법을 쉬우면서 명확한 용어로 설명했다. 그는 "암각화는 기본적으로 쪼기, 갈기, 긋기 등의 방법으로 바위에 그리는 그림"이라며 "그러나 이같은 행위는 기본적으로 채색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미술장르 중 드로잉에 가장 가깝다"고 밝혔다. 나아가 그는 "석회암지대 바위에서는 긋기에 의한 표현이, 반면 상대적으로 굳기가 강한 바위에서는 쪼아서 그린 암각화가 많이 발견된다"며 "이는 기본적으로 바위의 경도와 관련이 있다"고 밝혔다. 또 보존 상태에 대해서도 언급, "동굴그림의 보존상태가 훨씬 양호하다"며 "이는 바위그림은 햇볕, 눈비, 바람에 노출되는 반면 동굴그림은 소재는 비슷하나 닫힌 공간에 위치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장 연구
청주읍성 성돌이 지난 1910년을 전후해 탑동양관(도유형문화재 제 133호) 건물의 주춧돌 등의 용도로 대거 반출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여러 이유 때문에 성돌 회수는 사실상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청주문화원, 충북북도문화유산연구회 등 4개 단체로 구성된 '청주읍성 성돌모으기추진본부'는 지난 7일 기자회견을 갖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와 관련해 본보가 청주지역을 탐문하고 또 관련 학술지를 자세히 살펴본 결과, 청주 탑동양관 6동 건물 중 4개동 건물이 청주읍성 성돌을 주춧돌로 대량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 밀러(F.S. Miller·한국명 민노아) 선교사는 지난 1907~1911년 기간에 제 1~4호 양관, 1930년대는 5~6호 양관을 잇따라 건립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지난 1910년까지 존재했던 조선시대 전통 '청주옥'의 석부재가 탑동양관의 기단석, 계단석, 창문받침대 등의 용도로도 사용된 것으로 밝혔다. 충북대 김경표(건축학과) 교수는 청주문화대전에서 '양관 건물의 주춧돌은 청주형무소의 돌을 청주선교부에서 청주읍의 허가로 옮겨와 시공했다'고 밝혔다. 또 서향순 씨는 '청주 탑동양관의 보존 및 기념관 활용에 관한 연구
이중환이 괴산 다음으로 찾은 곳은 조선시대 대읍의 하나였던 충주였다. 지금도 서향에서 충주 중심지로 진입하려면 반드시 달천을 거쳐야 한다. 이중환은 임진년의 사례를 들며 달천을 매우 호감있게 표현했다. '임진년에 명나라 장수가 달천을 지나다가 물맛을 보고 '중국 여산의 폭포의 물맛과 같다'라고 했다. 고을이 한강 상류에 있어서 물길로 오가기가 편리함으로 서울이 사대부들이 예부터 여기에 많이 살았다. 또 과거에 급제한 자가 많기로도 팔도 여러 고을 가운데 으뜸이니 '이름난 고을'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하다.'이중환이 충주지역을 호평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충주는 내륙항구라고 표현될 만큼 물길이 발달해 있고, 또 주변에는 넓은 들이 분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중환은 이같은 환경을 높이 샀다. 그는 달천과 남한강이 만나는 '금천' 일대를 이렇게 적었다. '두 강이 마을 앞에서 만난 뒤에 마을 북쪽으로 둘러서 흘러가므로 동남쪽으로는 영남의 물자를 받아들이고 서북쪽으로는 한양의 생선과 소금을 받아들여 교역하는 여염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마치 한양의 여러 강마을과 비슷하다. 배의 '고물'과 '이물'들이 잇닿아 커다란 도회지를 이루었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양서류 최초의 멸종위기종 1급인 수원청개구리를 복원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특히 수원청개구리의 주요 서식지가 충북 음성과 세종시 주변지역 등이어서 또 다른 관심을 끌고 있다.환경부 국립생물자원관은 2012년 실시한 수원청개구리의 전국 분포, 번식 및 발생에 관한 연구 결과, 증식과 복원에 필요한 다양한 정보를 확보했다고 6일 밝혔다. 관찰 결과, 수원청개구리는 5월에서 6월 사이에 가장 번식이 활발했으며, 알의 발생 최적 온도는 22℃로 확인돼 저온 스트레스에 민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실험실에서 관찰한 결과로는 포접은 야간에 실시했고, 산란은 최대 6시간까지 지속됐다. 수정란은 최적 온도 조건하에 5일 후 유생이 되고, 2개월 후에 어린개체로 변태를 마치는 것으로 확인됐다. 환경부 국립생물자원관은 이번에 얻어진 1차 연구결과를 기초로 수원청개구리의 증식 및 복원 연구를 본격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우선 과거와 현재의 서식지 현황 비교, 서식지 이용실태, 이동경로 등을 추가로 정밀조사 해 멸종위기에 처하게 된 위협요인을 찾아낼 예정이다. 또한 향후 연구사업 결과를 토대로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본격적인 복원대책을 마련할 방침이다. 수원청개구리
21. 시고쿠 고치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메이지유신! 동아시아 근대화의 시작은 메이지유신이었다. 메이지정부는 서구문화를 수용해서 일본의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체제 전반을 변혁했다. 부국강병국가가 목표였다. 이 목표 달성은 성공했다. 메이지유신은 세계사의 기적이었다. 일본이 승리한 러일전쟁은 비유럽국가가 유럽국가에게 패배하지 않은 유일한 사례였다. 아시아 여러 나라의 선각자들이 일본에 직접 가서 국가혁신을 배웠다. 지금 아시아 국가들은 일본의 근대화 길잡이를 잘 알지만 그것에 감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를 떠올리면 증오감에 치를 떤다. 서구열강의 침략과 수탈을 그대로 모방하면서 잔학한 행위와 대량 학살은 서구 열강을 능가하였다. 메이지유신은 시작 단계부터 침략을 노래했다. 처음 어디에서 이 노래가 나왔는지는 모르나 요시다 쇼인과 후쿠자와 유키치가 널리 전파하였고,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등 이른바 정한론자가 목청을 높였다. 일본에서 지난 1천년 간 활동한 정치인 중 가장 존경을 받는다는 인물이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1835~1867)이다. 그는 사쵸동맹을 주선해서 막부타도에 공을 세운 인물로 비교적 깨끗한 인상을 준다. 메이지정부가 탄생하기
전회에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이 청주와 그 주변을 둘러봤다고 밝혔다. 기술된 내용상 다음번으로 향한 곳은 생거진천의 땅으로 속칭되는 진천이었다. 이중환 역시 진천을 살기 좋은 고장으로 적었다. 이런 내용이 나온다. '청주에 비해 들이 적고 산이 많다. 산골짜기가 겹겹이 감도는 데다 큰 시내도 많다. 그러나 답답한 기상은 없으며 땅도 기름지다.서북쪽으로 대문령을 넘으면 안성·직산 땅이다, 바다와 겨우 100리 떨어져 있음으로 생선과 소금을 편하게 사들일 수 있다'라고 적었다. 인용문 중에 소금을 언급한 대목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조선시대 때 청주지역에는 금강을 거슬러 올라온 배를 통해 서해안 소금이 유입됐다. 부강에서 하역된 소금이 육로를 통해 내륙 청주로 들어왔다. 그러나 진천은 같은 서해안 소금이기는 하나 공급 루트가 달랐다. 바로 서쪽의 대문령을 통해 진천 지역에 소금이 유입됐다. 대문령은 지금의 이티(혹은 배티) 고개를 말하고, 그리고 인근 백곡 석현장에도 규모가 큰 소금시장이 닷새마다 열리곤 했다. 진천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표현이 '생거진천 사후용인'이다. 이와 관련, 경기도 용인과 충청도 진천에 살았다는 두 형제 이야기에서 유래했다는 전설
중국판 목민심서인 '울리자'(鬱離子)를 아십니까. 청주지역에도 간혹 출강하는 강정만(서남대 중국어학과) 교수가 '울리자'를 2백여쪽 분량으로 출판사 주류성을 통해 국내 처음으로 번역·출간했다. 특히 이 책은 원말명초의 한 올곧은 중국 선비가 국가와 백성을 위해 얼마나 고민했는가를 싣고 있어, 신정부 참여 인사와 내년 지방선거 출마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울리자'의 '울(鬱)'은 문채가 있는 모양이고 '리(離)'는 8괘의 하나로 불(火)을 대표한다. 즉 '울리(鬱離)'는 정치교화(政治敎化)가 밝게 빛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나아가 '울리자'는 책의 제목일 뿐만 아니라 7백년 전에 개혁적이며 진보적인 삶은 산 작자 자신인 유기(劉基·1311 ~ 1375)를 칭하고 있기도 하다. 풍자와 교훈의 내용을 담은 울리자는 치국의 도, 삶의 지혜, 올곧은 선비의 인생관, 변화무상한 세상, 어리석은 자의 종말 등 총 5장으로 구성돼 있다. 이중 명쾌한 비유와 함께 쉽게 와닿는 내용을 일부 소개하면, '인재를 얻는 법', '못생긴 사람이 잘생긴 사랍보다 살기 편한 이유', '성공의 조건', '사람의 힘과 호랑이 힘의 차이' 등이 있다. 먼저 '인재를
봄·가을 건조기에 국립공원 산불예방을 위해 탐방객 출입을 통제한 결과, 야생동물들의 활동량이 크게 증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는 야생동물 번식기와 겹치는 때여서, 이 시기만이라도 전국의 주요 등산로를 야생동물에게 양보하는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환경부 산하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산불조심기간 중 야생동물의 활동성을 알아보기 위해 지리산 노고단∼피아골삼거리∼피아골 구간 8.8km에 CCTV 10대를 설치하고 삵, 담비 등 야생동물 등 8종의 배설물과 먹이 흔적 등을 조사했다. 그 결과, 124건의 야생동물 실체를 확인되는 등 산불조심기간의 야생동물 출현 횟수가 다른 기간보다 무려 약 5배나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야생동물들은 2월∼4월 봄 산불통제기간과 11월~12월 가을 산불통제기간에 월 평균 19회 정도 관찰됐다. 이는 다른 기간 평균 4회 보다 훨씬 많은 횟수다. 개체별로는 삵 59건, 담비 27건, 족제비 21건, 멧토끼 10건, 멧돼지 4건, 고라니 2건, 오소리 1건 등으로, 삵이 가장 많이 관찰됐다. 삵은 고양이처럼 생겼으나 고양이보다 몸집이 크고 불분명한 반점이 많다. 또 턱의 근육이 발달하여 먹이나 다른 물
충북의 기미년(1919) 3.1만세운동은 전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최소한 1주일 정도 늦게 시작됐다. 독립기념관이 발간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는 '충청지방 3.1운동의 전파'(제 20권)에서 '충북지방에서는 3월 7일 한봉수가 서문장터의 우시장에서 처음으로 독립선언서를 일반인에게 배포하였다'라고 기술했다. 이와 관련해 '충북도민의 느린 기질탓'도 하나의 이유로 거론돼 왔다. 그러나 충북의 3.1만세운동이 1주일 정도 늦어진 데는 나름의 긴박했던 사정이 있었다. 그 중심에 인종익(印宗益·1870~?)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에게는 기미년 3.1독립선언서를 한양에서 청주로 전달하라는 특무가 주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3.1독립선언서를 충북지역에 배포하기 직전 미행한 일본경찰에게 청주에서 체포됐다. 이에 따라 청주 등 충북에서의 3.1만세운동은 늦게 시작될 수 밖에 없었고, 그 자신 또한 일제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1개월의 옥살이를 해야 했다. 충북대 사학과 박걸순 교수의 도움을 받아 당시 긴박했던 진행됐던 흐름을 정리했다. 그리고 일본경찰서에 의해 2차례 작성된 '신문조서' 원문도 지상에 최초로 공개한다. 기미년 3.1독립선언서의 인쇄와 배포는 천도교 지
전회에 이중환(李重煥·1690~1752)이 지은 택리지를 개괄적으로 알아봤다. 이번부터는 우리고장 이야기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택리지를 보면 이중환이 움직인 동선을 대강 알 수 있다. 택리지에 우리고장 고을 중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곳은 최남단인 영동 추풍령이다. 이중환은 추풍령이 소문에 비해 그리 높지 않음을 크게 강조했다. '(추풍령은) 덕유산에서 나온 산줄기가 정기를 멈춘 곳이다. 이름은 비록 고개라고 하지만 실제는 평지다. 그럼으로 산이 많긴 해도 심하게 거칠거나 웅장하지 않고 아주 낮거나 평평하지도 않다.' 실제 추풍령의 해발 높이는 221m 밖에 안 되기 때문에 승용차로 달리다 보면 '고개를 넘었다'는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영동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면 옥천땅에 당도하게 된다. 이중환은 대략 3백년전 옥천땅에 대해 의외로 목화가 잘 된다고 썼다. '들은 너무 메말라 논의 수확은 적고 주민들이 오직 목화심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 땅이 목화 가꾸기에 가장 알맞다. 그러나 예부터 문학하는 선비가 많이 나왔으니 학사 남수문과 우재 송시열이 모두 이 고장 사람이다.' 여기서 힌트를 얻은 옥천군은 현재 옥천읍 삼청리 국도 4호선 폐도변에 '
국내에 팔각형 비석이 존해할까 안할까. 극히 드물게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 음동마을에 존재하고 있다.충북도가 도유형문화재 제 63호인 이상급(李尙伋·1572~1637) 신도비의 국가보물 승격을 추진하고 있다.신도비는 조선시대 종2품(지금의 장관급) 이상의 관직을 역임한 인물이 세울 수 있는 비석의 일종으로, 주로 무덤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신도(神道)는 신령, 즉 죽은자의 묘로 향하는 길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충북도가 이상급 신도비 승격에 적극성을 보이는 것은 △비가 지닌 형태적 희귀성 △당시 석공의 솜씨 △빼어난 조형성 등의 요소를 두루 고려했기 때문이다.흔하지는 않지만 무덤 둘레석이나 태실 그리고 불교 석조물 등에서는 팔각형 모습을 한 문화재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유교 석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신도비의 비신(몸체)이 팔각형을 하고 있는 것은 주덕읍 이상급 경우가 거의 유일한 사례가 되고 있다. 또 비신과 이수로 불리는 비의 머리 부분이 이른바 통돌로 된 경우도 흔치 않은 사례로 보여지고 있다. 신도비는 보통 받침돌(대석)-몸체-이수(머릿부분)로 구성돼 있다. 보통의 비는 3개의 석부재로 구성되나 이상급 신도비는 통돌을 깎아 몸체와
금년이 계사년 뱀의 해인 가운데, 한국의 먹구렁이와 황구렁이는 표피의 색깔만 다를 뿐 사실상 같은 종인 것으로 밝혀졌다. 또 충북 월악산에 서식하는 구렁이를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꼭 남쪽사면에서만 월동하지 않는 가운데 월평균 이동거리는 대략 5~6백m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강원대 생물학과 이정현 박사가 우리나라 구렁이의 종(種) 다양성, 생태습성, 서식지 등을 알아보기 위해 국내 먹구렁이와 황구렁이 외에 중국과 러시아 것 등 총 88마리의 국내외 구렁이를 수집·비교했다. 국내 수집 장소는 충북 제천 월악산, 충남 태안·굴업도, 강원도 고성·양구·화천, 경북 안동·포항, 경남 진주, 전남 해남 등 16곳이었다. 그 결과, 검은 표피의 먹구렁이와 누런 채색의 황구렁이는 서식지가 중복되고 있고, 또 머리판, 비늘열, 배비늘의 모양과 수 등 외부 형태 특징에 있어 차이가 거의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미토콘드리아 염기서열을 비교한 결과도 두 구렁이의 유전적 변이는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밖에 중국, 러시아 구렁이와의 종분화도 거의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분석 내용은 한국의 구렁이 종 뿐만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동북아의
전회에 택리지 저자 이중환(李重煥·1690∼1752)이 19살 때 우리고장 단양 옥순봉을 시로 읊었다고 밝한 바 있다. '땅위의 높은 모양은 단정한 선비가 서있는 듯하고 / 물결 복판에 움직이는 그림자는 늙은 용이 뒤집는 것 같다 / 정신은 빼어나 강산 경치가 뛰어나고 / 기세는 높아서 우주형상을 버티었다. 이중환은 우리고장 충북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충청도와는 유년시절의 인연을 맺고 있다. 택리지 충청편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금강에 임하여 사송(四松), 금벽(錦碧), 독락(獨樂) 등 네 개의 정자가 있다. 그 중 사송은 우리집의 정자이고, 금벽은 조상서(趙尙書)의 산장이며, 독락은 임씨(林氏)의 조상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건물이다." 인용문 중 '우리집의 정자가 있었다는 사송'은 지금의 공주시 장군면 일대를 말한다. 택리지에는 총 230개의 자연마을 이름(촌락명)이 나온다. 이중 충청도 지명이 30%로 가장 많고, 또 그중에도 공주 인근의 지명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 이는 공주 일대가 이중환이 어릴적 살던 곳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상세히 기술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학책 '성호사설'을 쓴 이익(李瀷·1681∼1763)이 이중환의 택리지 저술에
충북인의 숨결이 어린 기륭 이곳 기륭이 충북 출신 독립운동가의 애환이 깃든 장소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대표적 인물은 청원 출신의 신채호와 충주 출신의 류자명(柳子明)이다. 신채호는 1928년 독립운동 자금 마련의 부푼 기대를 안고 이곳에 도착하여 우편국에서 돈을 찾기 직전 피체되어 그의 조국 독립의 꿈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래서 신채호에게 기륭은 환희와 통한의 땅이다. 한편 광복 직후 곧 귀국하지 못하고 대만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 류자명이 그토록 소원하던 귀국을 위해 1950년 6월 처자를 데리고 부산을 향해 떠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홍콩에 도착하던 날 6·25가 발발하는 바람에 귀환의 꿈을 접어야만 하였다. 따라서 살아서는 조국 땅을 밟지 못한 류자명에게도 기륭은 환희와 통한의 땅이다. 단재가 대만에 온 것은 위조 위체를 찾기 위해서였다. 즉 북경우편국에서 이곳 우편국에 가명으로 보내온 외국환을 현금으로 찾기 위해 온 것이다. 이른바 돈세탁을 하고자 한 것이다. 단재가 외국환을 위조하고자 한 것은 아나키스트 단체의 투쟁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1928년 4월 천진에서 한인 아나키스트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는
우리나라 경찰공무원들은 자신의 직무와 관련, 역할이 모호할 때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자신의 직무가 위험하다고 여기는 인식은 가장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언론매채를 통해 자주 접해왔던 경찰상과는 다소 다른 것이다. 괴산 출신으로 전직 고위 경찰관(총경)을 역임한 나용찬(60·사진) 씨가 전국 경찰공무원 6백명을 대상으로 직무 스트레스와 관련된 조사를 실시했다. 그는 직무 스트레스를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었거나, 주어진 스트레스 자극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로 정의했다. 나씨는 이를 바탕으로 현직 경찰공무원 6백명에게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는 때를 물은 결과, '역할모호'(M=3.88)가 가장 높게 나타났다. 그 다음은 불확실성(3.86), 교대근무(3.82), 긴급성(3.80), 역할갈등(3.72), 위험성(3.71) 등이 그 뒤를 이었다. 통계 분석상 'M'의 수치가 높을수록 스트레스 강도가 높은 것을 의미한다. '역할모호'는 △상관의 애매한 지시나 명령 △소신보다 실적을 중시하는 계급성 △민원인이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경우 등의 사례를 의미하고 있다. 반면 직무 스트레스 두번째에 오른 '불확실성'
전회에 우리고장 충주읍성 사고에 보관 중이던 '고려실록'을 바탕으로 그 유명한 '고려사'를 쓰게 된다고 밝힌 바 있다. 문헌적인 근거도 많이 존재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고려사는 고려시대 쓰여진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삼국사기는 삼국시대가 끝난 후인 고려 때 김부식이 지었다. 마찬가지로 고려사도 고려시대가 종결된 후 기술됐다. 고려사는 조선초 세종대에 집필이 돼 문종 때 발간됐다. 세종실록에 이런 내용이 보인다. "지금 사고는 충주에만 있는데, 여염(일반집)과 섞여 있사오니, 실로 염려스럽습니다. 바라옵건대, 조종의 실록과 전조의 사적 등, 몇 본을 만들어 각도 명산에 나누어…' 바로 고려사 편찬작업이 진행될 때는 전국적으로 충주사고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또 다른 사고(史庫)인 전주와 성주사고 등은 그 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런 충주사고에는 고려사를 만드는데 바탕이 된 고려실록 말고도 고려시대 다른 책은 보관돼 있었다. 실록에 이런 내용이 보인다. "사관 김상직에게 명하여, 충주사고의 서적을 가져다바치게 하였는데 …."- 그중에는 우리들 귀에 익은 책으로 오장육부도, 산해경, 계원필경, 전한서, 후한서, 신당서 등이 보이고 있었다. 충주사고
'도토리는 6천년 전의 비밀을 품고 있다.'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원장 장호수)가 지난 14일 원광대 안승모(고고미술사학과) 교수를 초청, '곡물과 고고학'을 주제로 한 강연회를 가졌다. 안교수로 선사 중 신석기시대 전문가로, 벼와 밭작물 등 한반도 농경의 기원과 관련된 논문을 많이 발표한 바 있다. 안 교수는 이 자리에서 도토리는 한반도 신석기 사람들의 주요 식량자원의 하나였다고 밝혔다. 또 다른 열매인 밤(栗)은 도토리를 대체해 원삼국시대 이후 마한·백제권(호남과 충청)에서 주요 식량자원의 하나로 소비된다고 말했다. 그는 전자에 대해 "신석기시대는 낙엽성 참나무 중심의 숲이 형성된 시기로 수종 분석에서도 참나무속이 다수를 차지한다"며 "많은 유적에서도 도토리 열매가 출토되고 있고, 저장혈도 다수 발견되고 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발견된 도토리 열매 중 가장 오래 된 것은 울산 황성동에서 출토된 유체(遺體)로, 기원전 6천년전 후반의 연대값을 갖고 있다. 충북에서는 옥천 대천리 주거지에서 이보다 2천년 정도 늦은 도토리 유체가 발굴된 바 있다. 신석기시대 참나무류는 건축재로도 훌륭하게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됐다. 그는 "당시 주거지에서 출토된 목탄을 분석한
조선왕조실록은 많이 알려졌으나 고려실록은 다소 생소하다. 그러나 고려실록도 임진왜란 직전까지 분명히 존재했다. 그것도 우리고장 충주에 존재했다. 고려 조정도 조선과 마찬가지로 역대왕의 실록을 만들어 처음에는 수도인 개성에만 보관했다. 그러다가 이자겸난 때, 보관해 오던 실록이 소실되자, 이때부터 개성에 한 벌, 그리고 외사고로 불리는 지방에 한 벌씩 나눠서 보관했다. 당시 고려실록의 지방사고가 처음 들어선 곳은 개성에서 먼 남쪽인 가야산 해인사였다. 이 해인사에는 관리인을 별도로 주둔시키지 않고 스님들로 하여금 실록을 자체 보관토록 했다. 그러나 고려실록을 이후 전국 여러 곳으로 옮겨다니게 된다. 책은 무게가 많이 나가 운반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고려실록은 자주 옮긴 것은 왜구의 잦은 출현 때문이었다. 해인사에 보관돼 있던 고려실록은 이후 전국 여러 곳을 전전하던 끝에 우리고장 충주 개천사로 옮겨지게 된다. 이때가 고려 우왕 7년, 그러니까 서기 1381년이 된다. 고려사에는 이런 표현이 보인다. '7월에 왜적이 김해부에 침입하였다. 경상소 안렴사가 보고하기를 "(…) 왜적이 안동 등지를 침공하려 하니, 보주(경북 예천) 보문사에 장서한 역사서적들을 내지
18. 청일전쟁 발발 시바료타로가 소설 「언덕 위의 구름」 에서 아키야마 사네유키에게 왜구의 전법을 전해주었다고 한 오가사와라 나가나리(小笠原長生)는 필생의 사업이 따로 있었다.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1848~1934)를 미화하는 일이었다. 도고는 군신(軍神) 반열에서 추앙받는 인물이다. 군신이라면 천황보다 계급이 높은 것인지 모른다. 아니라면 천황이 여러 신(神)을 천상에서 지배하는 절대자로 보는지 또 모르겠다. 여하튼 복잡하지만 오가사와라가 도고를 선전하는 책은 여러 권이다. 1904년 『일본제국해상권력사강의』부터 1927년 『도고원수상전(東鄕元帥詳傳)』, 1934년 『만년의 도고원수』 『도고원수』, 1935년 『고 도고원수를 말한다』, 1935년 『도고원수의 위업』, 1936년 『격멸:일본해해전비사』, 1940년 『성장동향전전(聖將東鄕全傳)』, 1941년 『약전도고원수(略傳東鄕元帥)』 등 줄기차게 썼다. 1930년에는 도고의 글을 모아 『도고 헤이하치로전집』 3권, 1932년에는 『애국독본』이란 책도 냈다. 도고 헤이하치로의 생애, 일화, 전투, 평가 등 거의 모든 것이 이런 글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는 도고종교의 신자라는 말
계사년 뱀의 해가 시작됐다. 뱀은 민간신앙의 주대상으로 조선왕조실록에도 그 기록이 간헐적으로 등장한다. 특히 '烏蛇'(오사), 즉 먹구렁이에 대한 기록을 많이 접할 수 있다. '경상도 관찰사 김응기가 치계하기를, "청송에 거주하는 민세정(閔世貞)은 그의 형 세경(世卿)이 병을 얻어 사경에 이르니, 67세의 홀어미가 상심한 끝에 또한 병이 났습니다. 의원이 말하기를 '오사(烏蛇)를 혹은 찌거나 혹은 회를 쳐서 먹으면 나을 것이다." 하니…'- 구렁이와 관련된 표현으로는 능구렁이도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린다. 능구렁이를 한자로는 적동사(赤棟蛇)라고 한다. 등에는 흑갈색과 적갈색이 교대로 배열되어 있고, 배는 은백색이기 때문이다. 어문학자들에 따르면 구렁이는 '굵(굵다)'에 호칭어미 '엉이'가 붙은 말로 굴겅이 → 굴헝이 → 구렁이 순으로 변했다. 따라서 구렁이는 '굵은 뱀'을 뜻함을 알 수 있다. 구렁이는 지금 사람에게는 조금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사람들은 동작이 느리면서 음흉하거나 능글 맞을 때 '구렁이 같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때문에 일을 처리하는 데 남이 눈치채지 못하게 슬그머니 해치울 때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라고 하고, 본심을
조선시대 청주지역의 토성(土姓) 중에서 이른바 '혼맥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한 성씨는 청주곽씨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지금까지 '한명회를 배출한 청주한씨가 혼맥의 구심점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추정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청주 백제유물전시관 강민식 학예사(45·박사)가 최근 '청주의 뿌리를 찾아서'에 16개의 청주 토성 혼맥도를 게재했다. 강 학예사의 글을 이해하려면 토성의 개념을 예습하는 것이 필요하다. 토성은 고려시대 이후 전국 각군현에 토착해 있던 지방 호족들의 성씨를 일컫고 있다. 나머지 백성들은 임진왜란 전까지도 40% 정도가 성이 없는 무성층(無姓層)이었고, 1909년 이른바 민적법이 시행되고 나서야 모두 성(姓)을 가질 수 있었다. 이와 관련, 세종실록지리지가 제작된 조선 전기까지 청주에는 韓, 李, 金, 郭, 孫, 慶, 宋, 高, 俊, 楊, 東方, 鄭, 朴, 申, 葛씨 등 모두 16개의 토성이 존재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토성 청주곽씨의 흔적을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인물은 8세 곽예(郭預·1232~1286)이다. 도기념물 제 20호인 그의 묘는 원래 북이면 내추리에 있던 것을 청주 명암동으로 옮겨왔다.(사진) 그러나 청주곽씨의 청주입향 주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조선시대에는 이른바 '묵은 새배'라는 것이 성행했다. 조선 순조 때 홍석모(洪錫謨·1781~1857)가 지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묵은세배를 하느라고 이날 초저녁부터 밤중까지 초롱불을 든 세배꾼들이 골목길을 누비고 다녔다." 바로 묵은 세배는 설날 하루 전인 섣달그뭄에 올리는 세배로, 달리 구세배(舊歲拜) 또는 그믐세배라고 불렀다. 묵은 세배는 '한해를 무사히 보냈다'는 의미로 집안 어른이나 친지에게 감사의 절을 올리는 의미가 있다. 조선시대 궁궐에서는 아무래도 여염집과는 다른 설날을 보냈다. 일양세시기(冽陽歲時記)라는 고서는 이렇게 썼다. "대신 이하 모두 무릎을 꿇고 대신이 '정조(正朝)에 문안드립니다'라고 구두로 전하면(…) 중사(中使)가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에 나와 '지도(知道)'라고 구두로 전하면 대신 이하 모두 물러간다." 인용문 중 '정조'는 설날아침, '중사'는 왕의 명령을 전하는 내시, '지도'는 '알았다'는 뜻이다. 바로 신하들(종2품 이상 참석)이 워낙 많다보니 임금이 직접 대면하지 않고 내시가 중간에서 오고가며 설날 아침의 인사말을 전했다. 지금의 설날 법정 공휴일은 3일이다.
우리나라에 서양력인 양력이 처음 도입된 해는 1895년(고종 32)이다. 고종은 양력 도입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 연호를 '건양(建陽)'으로 정할 정도였다. 건양은 글자 그대로 '양력을 세웠다'는 뜻이다. 이처럼 고종이 양력 도입에 적극성을 보인 것은 외국과의 조약체결 때문이었다. 주변 나라는 모두 양력을 쓰는데 비해 조선만 유독 음력을 사용하면서 적지 않은 불편을 겪었다. 따라서 당시 조선은 음력 표기를 한 후 그 아래에 '양력 몇년 몇월 몇일'을 병기해야 했다. 오스트리아와 통상조약을 체결한 구한말 인물은 권재형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조약문 맨 끝에 '대조선국 개국 501년 5월 29일'이라고 쓰고, 다시 '양력 1892년 6월 23일'이라고 병기했다. 그러나 양력 도입은 처음부터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지석영(池錫永·1855~1935)은 종두법을 발견하는 등 당시로서는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양력 도입을 강하게 반대했다. 이유는 한 나라 안에 '정월(正月)'이 두 개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종묘, 사직, 전각에 지내는 제사와 경사스러운 명절, 기원절에 대해 음력을 쓰는 것은 음력 정월 초하룻날을 정월로 삼기 때문이며, 행정의 조서
[충북일보] 청주를 대표하는 야간 역사체험 축제인 '청주문화유산야행'이 이틀간 관람객 8만여 명을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국가유산청, 충북도, 청주시가 주최하고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이 주관한 2024 청주문화유산야행 '슬기로운 (충청)병영생활'이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이틀간 열렸다. 이 기간 누적관람객은 8만여 명에 달했다. 이는 지난해보다 1만여 명 늘어난 수치다. 국가유산체제 개편에 따라 '문화재야행'에서 '문화유산야행'으로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된 청주문화유산야행은 9년 연속 공모에 선정돼 선보여온 청주의 대표 문화유산 축제다. 2024 한국방문의 해 'K-컬처이벤트 100선'에도 선정될 만큼 화제성과 흥행력을 모두 인정받고 있다. 올해 축제는 '슬기로운 (충청)병영생활'을 주제로, 의병의 날인 1일부터 2일까지 중앙공원을 비롯한 청주 원도심 곳곳에서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펼치며 시민들에게 추억을 선사했다. 용두사지철당간을 중심으로는 고려시대 병영이, 중앙공원에서는 조선시대의 병영이, 충북도청을 무대로는 근현대의 병영이 꾸려졌다. 시민들은 각 시대의 특징을 반영한 전시, 체험, 미션 콘텐츠들을 즐기며 오랜 역사 속 군사요충지였던 청주의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충북도가 추진에 공을 들이고 있는 민선 8기 핵심 현안 중 일부 사업의 운명이 이번 달 판가름 난다. 오송이 바이오산업의 글로벌 중심지로 발돋움하는 데 이바지할 특화단지 유치 여부가 정해진다. 청주국제공항 기반시설 확충과 공항 연계 광역철도 사업의 추진이 결정되는 연구용역 결과도 나온다. 지역 발전과 후반기 도정 운영에 중요한 현안인 만큼 도는 최대 성과를 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어떤 성적을 거둘지 주목된다. 2일 도에 따르면 '바이오 분야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는 이달 안에 선정 지역이 최종 확정된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지난 2월 바이오 의약품과 오가노이드 재생치료제 등 2개 분야를 공모한 결과 전국 11개 지자체가 신청할 정도로 유치 경쟁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다. 충북을 비롯해 인천, 강원, 대전, 경북, 전북, 전남이 유치전에 나섰고, 경기는 수원과 성남, 시흥, 고양 등 4곳이 도전장을 던졌다. 일찌감치 공모 대응 추진단(TF)을 구성해 운영한 충북도는 국내외 기관·기업 등과 업무협약을 맺으며 특화단지 조성과 운영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후보지인 청주 오송이 지난해 7월 바이오의약품 소재·부품·장비 특화단지,
◇22대 총선 당선인 인터뷰 - 증평·진천·음성 더불어민주당 임호선 "부족한 사람에게 다시 한번 중임을 맡겨주신 군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번 총선 승리는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약속드린 미래 비전을 군민들께서 선택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재선에 성공한 임호선(61) 더불어민주당 당선인(증평·진천·음성)은 겸손한 자세로 소통하며 어려운 민생부터 확실히 챙겨 나가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총선은 윤석열 정부에 대한 강력한 경고"라며 "서민경제를 살피지 못하고 국정운영을 독단적으로 하며 과거로 퇴행하려는 정부에 브레이크를 잡으라는 민심이다. 제1야당으로서 총선에서 드러난 민심을 적극 따르며 민생해결과 지역발전에 책임감을 갖고 임하겠다"고 앞으로의 의정활동에 대해 설명했다. 22대 국회에서는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활동을 원하고 있다. 임 당선인은 "저는 농촌에서 태어나 자라왔고 현재도 농촌에 살고 있다"며 "지역적으로도 증평·진천·음성군이 농촌이기에 누구보다 농업농촌의 현실을 잘 이해하고 농민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농촌의 현실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임 당선인은 "농촌이 어렵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