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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를 찾아서 - 上 백암성의 고구려 혼

마른 억새가 연주하는 옛 병사의 진혼곡

  • 웹출고시간2008.11.09 21:24:48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편집자 주

본보 임병무 논설위원이 충북도내 문화원장들과 동행, 지난달 29일부터 지난 2일까지 만주지역의 고구려 유적을 취재했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졸본성, 국내성, 환도산성, 고구려 고분군 등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구려 유적의 이모저모를 3회에 걸쳐 연재한다.

백암성 주변에서 풀을 뜯던 양떼가 산성을 내려오고 있다.

만주의 가을은 짧다. 벌판을 수놓은 여러 색깔의 단풍도 다 없어지고 무장해제를 한 앙상한 나무 가지가 삭풍에 몸을 떤다. 가을이 오기가 무섭게 한 계절을 생략하고 이내 겨울로 접어드는 것이 만주의 계절이다. 농부들은 겨울 채비에 일손이 바쁘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에서 마른 옥수수 대를 쟁여 실은 마차가 꼬리를 문다.

도내 문화원장들로 구성된 고구려 유적 답사 반은 첫 코스로 심양에 있는 청 태종의 무덤인 북릉을 찾을 계획이었으나 도중에 일정을 바꾸었다. 일정도 빠듯했지만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일으켜 우리에게 엄청난 고통을 준 청 태종의 북릉을 방문한다는 자체가 왠지 꺼림직 했고 고구려 유적답사와 정서가 맞지 않았다.

우리와 심양의 질긴 악연(惡緣)은 새로운 국제질서의 개편 속에서도 응어리를 다 풀지 못하고 있다. 1627년 정묘호란에 이은 1636년의 병자호란은 조선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뭉개버린 참사였다. 마부태(馬夫太)를 선봉장으로 한 10만 명의 청군(淸軍)은 압록강을 넘어 순식간에 한양 도성으로 들이 닥쳤다.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차단당한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한 겨울을 나며 농성(籠城)하였으나 결국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인조 임금이 청군에 항복을 하는 굴욕을 겪었다. 소현세자, 봉림대군은 물론 척화파인 김상헌, 윤집, 오달제가 심양으로 압송되었고 수많은 백성이 인질로 끌려갔다.

조선의 인질들은 노예시장이나 다름없는 심양의 성 밖에서 속전(贖錢)을 치르고 귀환하였다.

이 때 노인의 몸값이 젊은이 보다 더 나갔다. 부모를 극진히 섬겨온 백성들은 심양으로 끌려간 부모부터 우선 구해냈다. 만주족의 거친 손길은 정절을 목숨보다 더 아끼는 조선의 아녀자를 짓밟았다. 조선여인들은 배가 불러 귀국하기 일쑤였는데 고향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환향녀(還鄕女)라 천대했고 이혼을 허락해달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오늘날, 남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여인을 일컬어 '화냥년'이라 하는데 이는 바로 '환향녀'에서 유래된 말이며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욕하는 '후레자식'은 오랑캐의 자식, 즉 호로자(胡虜子 · 胡奴子)의 변형된 말이다. 만주족의 아이를 가진 수많은 여인들을 어쩔 수 없어 인조는 사면령을 내렸으나 실절을 한 여인들은 따가운 눈총 속에 일생을 마쳤다.

성벽 안팎에 치성을 갖고 있는 백암성 전경.

일행은 북릉대신 고구려 유적을 하나라도 더 보기 위해 고구려의 옛 성인 백암성(白岩城 · 百岩城)을 찾았다. 백암성은 심양에서 남서쪽으로 80km쯤 떨어져 있다. 옛 고구려의 영토인 만주 일대에는 개모성, 안시성, 요동성 등 약 100개의 고구려 성이 있는데 백암성도 그 성중의 하나다.

이 성은 요하(遼河) 일대에서 중원대륙으로 진출하는 교두보였고 수나라, 당나라의 침공을 봉쇄하던 천험의 요새다. 일행을 실은 버스는 덜컹거리며 비포장 길에 흙먼지를 뿌렸다. 만주벌의 고만고만한 야산들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 가슴팍을 파고드는 초겨울 바람이 맵다. 자연의 바람보다 더 매운 역사의 바람이 요령성 일대에 몰아쳤건만 고구려의 바람은 중국의 동북공정 바람에 막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백암성은 요령성 요양시(遼陽市) 등탑현(燈塔縣) 서대요향(西大窯鄕) 관둔촌(官屯村)에 자리잡고 있다. 바깥 성(외성)의 길이가 2천500m에 달하는 결코 작지 않은 성이다. 성벽의 높이는 5~8m쯤 된다. 석회암을 벽돌처럼 다듬어 내외 협축으로 쌓았다. 1천500여년이 흘렀음에도 빗물에 삭지 않고 그 웅자한 모습을 드러낸다. 일부는 파괴되었지만 서쪽, 북쪽 성벽에선 여전히 고구려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성의 아랫도리를 든든하게 다지고 그 위에 이른바 '퇴물림'이라고 하는 들여쌓기를 했다. 1.5m쯤 경사지게 들여쌓기를 하다가 수직으로 성벽을 올렸다. 성벽은 마치 옥수수 알을 박은 듯 촘촘하다.

성안과 성밖을 모두 돌로 쌓고 그 사이도 돌로 꽉 채웠다. 내외 협축 산성의 한 전형을 보는 듯하다. 서쪽 성벽에는 3개의 치성(雉城)이 있다. 치성이란 성벽에서 돌출된 부분으로 기어오르는 적병을 사각(斜角)에서 공격하기 위해 만든 구조물이다. 치성은 우리나라 성벽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형식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특이한 치성이 있다. 성의 밖이 아니라 내벽에 잇대어 쌓은 치성이 여러 기(基)에 달한다. 우리나라 산성에서 좀체로 보기 어려운 공법이다. 고건축을 전공한 장현석 청주문화원장은 "성벽을 견고하게 지지하는 역할을 한 동시에 비상시 계단으로 빨리 뛰어올라 적병을 공격하기 위한 구조물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성의 가장 높은 부분인 북쪽 성벽 안쪽에는 높이 5m에 달하는 망루가 있다. 점장대(點將臺)라고 불리는 이 구조물은 성 안팎을 두루 살피는 기능을 갖고 있다. 장대 주변으로는 둘레 45m에 달하는 작은 성을 쌓았는데 이것이 백암성의 내성이다. 내성은 다른 말로 아성(牙城)이라고도 불린다. 남쪽 성벽은 거대한 암반을 이용하여 성을 쌓았다. 성 밖은 천길 낭떠러지기이며 그 아래로는 태자하(太子河)가 유유히 흐른다.

태자하는 자연적인 해자(垓字)역할을 한다. 해자란 성벽 주변에 적병의 침투를 막기 위해 파놓은 연못인데 인공적인 것도 있고 자연적인 것도 있다. 때로는 인공적인 해자에다 자연적인 해자를 보태는 경우도 있다. 큰 강과 절벽이 있기 때문에 남쪽 성벽으로는 적병이 기어오르지 못한다. 그 절벽 아래 태자하에선 물오리 떼가 역사의 풍랑을 헤치며 한가롭게 헤엄을 친다.

이 산성의 단점은 밖에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점이다. 산성의 경사가 심해 성안의 모습이 일목요연하게 관찰된다.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여인처럼 중요한 부분만 겨우 가리고 겨울의 문턱에서 '알몸 쇼'를 하고 있다. 그래도 백암성은 압록강으로 가는 길목과 중원으로 가는 통로를 차단하고 있으니 비록 벗은 몸이지만 여간해서 적병의 침투를 허락하지 않았다.

삼국사기에는 '547년(양원왕7년) 백암성을 개축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로 보면 백암성은 그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보여 진다. 구당서 고려전에는 "산을 의지하고 강을 내려다보는 험난한 절벽"이라고 기록했다. 만주에서 중원으로 가는 길목의 파수꾼인 백암성은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551년(양원왕7년), 돌궐이 백암성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장군 고흘(高紇)이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싸워 이겼다. 645년에는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입하여 요동성을 함락하였는데 이에 겁을 먹은 백암성 성주 손대음(孫大音 )은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을 했다. 당태종은 기세를 몰아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임종을 맞은 당태종은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라"고 유언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고구려의 백암성은 현지에서 연주성산성(燕州城山城)이라 부른다. 고구려 식의 명칭이 어쩐지 싫은 모양이다. 아마도 고구려를 괴롭혔던 연(燕)나라와 연관하여 그렇게 부른 것 같다. 중국의 시각에서 산성의 이름이 연주성산성으로 바뀌었으나 우리는 여전히 백암성 또는 백암산성이라 부른다. 산성의 석회암은 성의 이름에 맞게 흰색 계통이다.

요령성은 1963년 이 성을 '요령성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도지정문화재에 해당된다. 문화혁명 당시 문화재를 마구 파괴했던 중국은 이를 후회하며 문화재관리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다. 관리만 잘하면 외화를 벌어들이는 달러박스가 되기 때문이다. 백암산성에 땅거미가 찾아든다. 달빛이 성벽에서 부서진다. 성안의 억새풀은 초겨울 바람에 흰 수염을 휘날리며 마른 대궁으로 고구려 병사의 진혼곡을 연주한다. 성 주변에서 풀을 뜯던 양떼가 귀가를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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