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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4.07.21 16:09:37
  • 최종수정2014.07.21 16:09:37
누구나 성(姓)이 있고 족보가 있다. 성이 있는 사람은 본관(本貫)이 있다. 하지만 절반가까이는 성을 가진지가 100년도 안 됐다. 상당수 가문의 족보는 위조이거나 엉터리다. 그러니 본관이니, 족보니, 집안 운운하며 함부로 거들먹거릴 일은 아니다.

*** 이근규 제천시장의 해명 필요

본관(本貫)은 시조(始祖)가 난 곳을 말한다. 즉, 성(姓)씨의 출발점이다. 관향(貫鄕)·본적(本籍)·관적(貫籍)·선향(先鄕)·본(本)이라고도 한다. 성은 부계(父系)의 연결을 보여준다. 그리고 본관은 조상의 거주지를 나타낸다. 성과 본관이 동일해야 같은 혈연으로 보는 까닭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성씨의 본관은 그 바탕이 된 구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신분·지역에 따라 본관이 갖는 의미도 서로 달랐다. 국가세금을 부담하는 양민들은 거주 지역을 본관으로 해서 편호(編戶)됐다. 고려·조선 시대에는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본적'의 의미를 지녔다. 인구동향 파악에 혈연적·지연적인 방법을 이용했던 점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성씨는 현재 286개(2000년 인구주택 총 조사 기준)에 달한다. 중국(8천155개)의 3.5%밖에 안 된다. 하지만 본관이 4천179개나 된다. 우리의 관습은 성씨가 같아도 본관이 다르면 별개의 씨족으로 본다. 사실상 4천개를 넘는 성씨가 존재하는 셈이다. 중국의 절반에 육박한 수치다.

성씨 앞에 본관을 붙이는 관습은 통일신라 후기와 고려 초기에 걸쳐 성립됐다고 한다. 대략 10~11세기 무렵부터 본관 사용이 정착된 셈이다. 이때부터 시작된 본관 사용 관습은 현재까지 바뀌지 않고 있다. 거주지나 본적지가 바뀌더라도 사람의 본관은 바뀌지 않았다.

성씨와 본관은 '한 번 00 0씨면 영원한 00 0씨'다. 아무리 시공(時空)이 바뀌더라도 호적엔 영원히 변치 않는 성씨와 본관이 기재된다. 그게 우리의 성씨와 본관 제도다. 그러다 보니 족보에 가장 많이 신경 쓰는 민족이 됐다. 천년이 넘게 유지되고 있다. 참 독특한 씨족 문화다.

그런데 최근 성씨의 본관과 관련한 야릇한 일이 터졌다. 이근규 제천시장의 본관을 두고 말들이 많다. 성씨의 본관은 '용인 이씨'인데 경력엔 '경주 이씨' 이력이 적혀 있다. 그러다 보니 정치적 꿈을 이루기 위해 '본관을 고의적으로 속인 것 아니냐'는 논란도 일고 있다.

이 시장의 본관이 두 가지 일리는 없다. 이 시장은 분명히 '용인 이씨'다. 이 시장도 그렇게 밝혔다. 따라서 이 시장은 하루 빨리 이런 일이 '왜,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정확하게 밝혀야 한다. 자칫 큰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쉽지 않아 보인다. 이 시장이 경주 이씨 관련 일을 했다면 경주 이씨 종친회를 속인 셈이 된다. 그리고 하지 않았다면 허위 경력을 기재한 꼴이 된다.

선관위는 현재 해당 인터넷 카페 등을 확인하고 있다. 이 시장의 허위경력 기재 여부부터 파악하기 위해서다. 그 뒤 선거법위반 여부를 검토해도 늦지 않다는 입장이다. 선거 당선을 목적으로 허위 경력을 기재한 것으로 판단되면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태세다.

제천 시민들은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통계청 2000년 자료에 따르면 용인 이씨는 전국적으로 3만5천여 명 정도다. 반면 경주 이씨는 142만여 명에 이른다. 제천시 인구분포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 시장이 정치적 목적으로 본관을 속인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오는 까닭도 여기 있다.

*** 괜한 오해는 받지 않는 게 좋다

본관은 고려 중기에 호적이 만들어지면서 함께 생겨났다. 성과 본관은 족보를 만드는 근거가 됐다. 족보는 신분을 가르는 결정적인 기준이 됐다. 그 옛날 사람들이 성씨와 본관에 집착한 까닭은 하나다. 온전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다. 사람 같은 대우를 받기 위함이다.

성과 족보를 가진 사람들은 행세를 하며 살았다. 조선시대에도 양반들만 족보가 있었다. 절반에 가까운 노비들은 족보는커녕 성도 없었다. 그러던 것이 1894년 갑오경장 때 노비법이 없어지고 새 호적법이 생겼다. 신분을 따지지 않고 누구나 성과 본관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성과 본관이 없던 사람들은 이 때다 싶었다. 이왕이면 양반이나 권세 있는 집안 성씨와 본관을 가지려 했다. 너도나도 족보를 만들었다. 없던 족보를 새로 만들기도 했다. 남의 족보에 얹혀 새로운 일가의 구성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옛날이 아니다. 성씨와 본관이 그리 중시되는 세상도 아니다. 아직 씨족문화가 남아 있긴 하다. 그렇다고 생활을 불편하게 할 정도로 강하진 않다. 이 시장이 괜한 오해를 받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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