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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우

시인, 충북대 국문과 교수

고모네 집에 가면 책이 많았다. 사촌들은 쳐다보지도 않는 책이 몇 개나 되는 책장에 가득 꽂혀있었다. 우리 사남매는 책을 보려고 정신없이 달려들었다. 방바닥에 엎드려서 몇 시간이고 책만 봤다. 어떤 책을 먼저 봐야 하나 하는 즐거운 고민을 했다. 날이 어두워지면 벽지대신 신문지를 발라놓은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오즈의 마법사 대신에 신문지에 적힌 기사나 네 컷짜리 만화, 아니면 광고 문구를 읽고 또 읽었다.

초등학교 2학년 담임선생님은 독서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아이들에게 얼마씩 내게 하고 선생님 돈을 보태서 서른 권짜리 명작동화집을 샀다. 선생님 책상 옆에 책꽂이를 세워두고 거기에 우리들의 학급문고를 꽂아놓았다. 한반에 학생이 여든 명이 넘던 시절이었다. 책을 빌리려 줄을 섰는데 운 좋게도 서른 명 안에 들었다. 무슨 책을 빌릴 것인가로 즐거운 고민을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고민 끝에 내가 빌린 책은 암굴왕이었다. 표지가 윤기 나는 종이에 칼라로 그림과 글자가 인쇄된 책은 어떤 보물보다도 아름답고 소중했다. 집에 오자마자 단숨에 읽어버렸다. 다음날 책을 반납하고 다른 책을 빌릴 수 있었다. 매일 집에서 책을 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런데 이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학급문고를 빌려간 아이들이 제때 반납하지 않거나 아예 안 가져오는 일이 자주 있게 되어 결국에는 책꽂이가 텅 비어버렸다. 독서교육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선생님이었지만 텅 비어버린 책꽂이로는 어떤 교육도 할 수 없었다. 선생님은 예상하지 못한 사태를 맞아 씁쓸한 표정을 지으셨고 나는 울음이 나올 정도로 속이 상했다. 책을 가져오지 않는 아이들을 아무리 원망해도 책꽂이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믿었던 친구들로 인해서 인생의 쓴 맛을 본 나는 오래도록 방황했다. 동네 만화 책방에 들러 날이 저물 때까지 만화책을 보고 집에 가는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십 원에 만화책이 열권이었는데 다섯 권 보고 꽂아놓고 다시 다섯 권을 보고 꽂아놓는 방법으로 단돈 십 원으로 몇 시간이고 만화 책방에서 만화를 보는 것으로 소일했다. 하루도 빼지 않고 만화 책방에서 살다시피 한 결과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안 좋은 쪽으로. 두 달이 채 안 됐는데 만화 책방에 있는 만화책을 남김없이 봐 버린 것이다. 나의 울분을 달래주던 만화 책방과도 작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에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를 데리고 동네 도서관에 갔는데 벽에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어릴 적 우리 동네 도서관이다' - 빌 게이츠. 아, 내 어릴 적에도 동네 도서관이 있었더라면 나도 빌 모씨처럼 폼 나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까·

어릴 적 우리 동네에는 도서관이 없었지만 그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지금도 좋은 책을 만나면 가슴이 설레고 읽어야할 분량이 줄어드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책장을 넘기곤 한다. 세상에 좋은 책만큼 소중한 것이 별로 없다고 여기게 된 것도 책에 대한 배고픔에 사무쳤던 유년 덕분인지 모른다.

아이들이 책을 읽지 않는 것은 부모들이 책을 읽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아이들을 키워보지 않았을 때는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책 읽는 걸 좋아하는 부모를 둔 우리 아이들은 불행히도 어릴 적 나와는 달리 책에 별로 관심이 없다.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언제든 사주겠다고 말을 해도 시큰둥하다. 내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나는 어머니 아버지가 책을 읽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 사남매는 노는 것보다 책 읽는 걸 더 좋아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는 것이 부모가 해줘야 하는 중요한 일들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아이들을 키우다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좋은 책을 골라주는 것이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인 것 같다. 그렇다면 책 읽는 것에 관심이 없는 아이에게는· 아마도 억지로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는 것·

국문학과 지원한 학생들에게 지원 동기를 물으면 대개는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해서' 라고 대답한다. 좋아하는 작가나 기억에 남는 책이 있느냐고 하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대학입학시험을 준비하느라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다고 변명한다. 공부는 책을 읽는 것에서 시작해서 책을 읽는 것으로 끝나는데 공부하느라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해괴한 말인가·

나의 유년시절과 청소년기에는 제대로 된 도서관도 없었고 읽을 만한 책도 드물었다. 그렇지만 좋은 책이 널렸는데도 문제집을 푸느라 책을 읽을 여유가 없는 요즘 청소년들과 비교하면 나는 그들보다 훨씬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란 셈이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어릴 적 우리 동네에 없었던 도서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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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