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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광섭

청주공예비엔날레 총괄부장

저녁나절인데도 한낮의 열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담장과 골목길에도, 기와지붕 양철지붕 슬래브지붕 위에도, 오르막길 내리막길의 돌계단에도, 그리고 습하고 어두운 맨홀 속에도 햇살의 흔적이 역력했다.

나는 가던 길 멈추고 숨을 죽였다.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고갯길 오르느라 숨이 가프지만 마음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낡고 오래된 수암골의 풍경이 내 가슴을 훑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허접한 냉기만이 감돌 것이라는 나만의 경직된 생각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골목길 나무그늘 아래에 평상을 차려놓고 여름을 즐기는 구릿빛 노인은 한가롭고, 담장 넘어 부뚜막에서는 김치 볶는 냄새 구순하며, 아이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땅따먹기 놀이에 하루해가 짧다. 자투리 텃밭에서는 고추 가지 깻잎 옥수수 무럭무럭 자라나고, 상추 뜯는 아낙네는 한 소쿠리 담아 이웃집에 건넨다. 후덕한 인심, 나눔의 미학이 살아있다.

길모퉁이의 구멍가게 앞에서는 청년들이 모여 연탄불 지펴가며 삼겹살을 안주삼아 조잔거린다. 이발소에도 낡은 풍경으로 가득하고, 낯선 사람들의 발자국에 개짓는 소리가 산막의 정적을 깨운다. 어느 집 마당의 바지랑대에 노랑나비 한 마리가 지는 석양을 즐기고 있으며, 마을 꼭대기 작은 암자에서는 풍경소리와 밤꽃향기가 맑고 향기롭다. 마을 중턱의 공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린다.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 를 촬영하기 위해 방송장비와 연예인들의 움직임이 바빠지고 구경나온 사람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 빛난다.

황톳빛 낮은 담장에는 연록의 담쟁이 풀잎 물오르고, 담장 너머 장독대에 내 시선이 멈춘다. 바람과 햇살과 구름과 계곡물이 만나, 여인의 손맛과 마을의 인심과 숨쉬는 옹기가 만나, 삭히고 묵히고 우려내고 통음의 신나는 짝짓기와 발효의 눈부신 놀이에 취하더니 은은하고 깊은 맛, 세월이 빚은 자연의 멋과 숨결이 느껴진다. 희미한 저녁햇살 툇마루에 내려 안고 늙은 여인의 주름진 손길이 부산하다. 어디 이뿐인가. 돌계단 오르는 걸음을 막아서는 낮선 풍경들이 내 마음을 슬며시 잡아당긴다. 담장이며 계단이며 할 것 없이 손길 닿는 곳에는 예쁘고 정겨운 그림들로 가득하다. 옛 이야기를 노래하며 원 없이 뛰어노는 즐거운 악동이고 싶을 뿐이다.

이처럼 수암골 풍경에 마음 빼앗기고 있는 순간에도 민초들의 마음은 마냥 무심한 게 아니다. 이들에게도 지긋지긋한 가난과 어수선한 삶을 청산하겠다는 꿈이 왜 없겠는가. 가혹한 삶을 짊어진 채 비틀거리되 쓰러지지 않고 고난은 있되 좌절하지 않고 희망의 탑을 쌓고 있는 모습이 아름다울 뿐이다.

그러니 수암골 풍경은 오래된 미래를 보는 듯하다. 문명의 도시에서는 감히 느낄 수 없는 사람의 냄새, 과거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풍경화, 생명의 숲, 누추하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세월과 인연이 수레바퀴처럼 하염없이 돌고 도는 마을….

수암골에 예쁜 찻집 하나 있으면 좋겠다. 가슴 따뜻한 사람들이 오순도순 정겨움을 나누는 곳 말이다. 이왕이면 시인의 집과 소설가의 이야기 공간과 화가들의 아지트와 장인들의 창작공간과 난장이라도 만들면 더 좋겠다. 발 닿는 곳마다, 눈길 마주치는 곳마다 아날로그의 서정이 그윽한 곳이면 좋겠다.

그러하다. 온갖 욕망과 번뇌와 찌든 마음을 씻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고 싶으면 이름 모를 숲길을 걷고 돌계단을 오르며, 뒷골목 풍경에 마음을 맡겨보자. 어디 수암골 뿐이겠는가. 우리의 작은 관심, 따뜻한 배려만 있으면 상상의 자유를 맘껏 펼칠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많은가.

어느덧 우암산 숲속에 머물러 있던 어둠이 수암골 고샅길에 촘촘해지고 있다. 알곡은 알곡대로 껍데기는 껍데기대로 서로 뒤엉켜 사는 회색도시 역시 어둠속에 잠기고 있다. 그동안 나는 거센 폭풍우와 맞서보지도 않았으면서 내 욕심만 채우기에 급급했던 것은 아닌지, 쫓기듯 살아오면서 소중하고 아름다웠던 옛 이야기를 헌신짝 버리듯 한 것은 아닌지, 후회와 미련과 아쉬움이 바람처럼 밀려온다. 지나온 길과 지나온 세월과 지나오며 부딪친 수많은 생명에 미안하다. 오늘 하루 수암골로 향한 이 걸음이 영 무익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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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