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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3.01.18 17:28:51
  • 최종수정2023.01.18 17:28:51

현재 ‘효자 정재수 기념관’으로 운영하는 옛 상주 사산초등학교. 재수 군이 다니던 이 학교는 1994년 폐교했다.

ⓒ 김기준기자
[충북일보] 소년은 폭설에 파묻혀 신음하는 아버지 곁에서 얼마나 무섭고, 살을 에는 강추위에 얼마나 떨며 죽어갔을까. 49년 전 아무도 없는 캄캄한 산속에서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덮어주고, 온몸으로 감싸 안은 채 얼어붙은 10살 소년의 이야기에 다시금 가슴이 저민다. 고(故) 정재수 군은 1974년 1월 22일 밤 보은군 마로면 갈전리 마루목재에서 아버지와 함께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이 일은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고, 이젠 교과서에서도 사라졌다. 하지만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효(孝)는 어디나 존재하고, 제일의 도덕규범이자 의무다.

1974년 1월 22일 효자 정재수 군이 눈보라 속에서 아버지와 함께 숨진 보은군 마로면 갈전리 마루목재 모습. 세월이 흘러 도로가 난 이곳에 재수 군의 묘지가 있다.

ⓒ 김기준기자
효자 정재수 군의 묘지가 보은군 마로면 갈전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주민은 그리 많지 않다. 갈전리 주민만 알고 있는 정도다. 지난 13일 재수 군의 흔적을 찾아 떠났다.

그가 숨진 날 밤 사고 현장인 마루목재의 기온은 영하 20도를 기록했다. 폭설은 33cm나 쌓였다. 그러나 그의 흔적을 찾으러 가던 날 오후 기온은 0도쯤, 다행히 춥지 않은 날씨였다.

내비게이션에도 나오지 않는 이름 없는 고개 마루목재를 찾기 위해 먼저 마로면행정복지센터로 갔다. 이시영 면장은 갈전리 이장에게 전화를 걸어 '효자 정재수 묘지'를 설명하면서 마루목재 위치를 파악했다. 그리곤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재수 군의 묘지가 면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며 취재에 기꺼이 동행했다. 그런 이 면장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와 함께 마로면에서 옥천군 청산면 쪽으로 차를 몰다 세중리 쪽으로 방향을 틀어 20분쯤 달리자 갈전리가 나타났다. 마을 초입에서 만난 60대 주민에게 '정재수 묘'를 아느냐고 묻자 작은 능선 하나를 가리켰다. 옛 산길은 왕복 2차선 도로로 변했고, 바로 옆에 재수 군의 묘지가 조성돼 있었다. '정재수 묘비'라고 적힌 간판에 '효자'라는 단어를 빼놓아 아쉬웠다.

묘지는 비교적 잘 조성돼 있었지만, 묘지 안내판의 글씨가 오래돼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산준령도 아니고 마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는데 왜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했을까. 생각해 보니 당시 재수 군에겐 초행길이었지 않은가. 밤 중 산속에서 마을까지 내려갈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 같았다.

경북 상주시 '효자 정재수 기념관'에는 재수 군이 아버지와 함께 눈보라 속에서 숨진 1974년 1월 22일 밤 보은군 마루목재의 상황을 그린 그림이 놓여있다.

이 면장과 함께 두 번의 절로 예를 올리고 안개 자욱했던 묘지를 출발해 면사무소로 돌아온 뒤 혼자서 정재수 기념관이 있는 경북 상주시 옛 사산초등학교로 향했다. 30분쯤 지나서 도착한 기념관엔 시청의 시설관리직 1명만 근무했다.

그는 재수 군에 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고, 기념관 운영 상황만 약간 설명했다. 기념관을 둘러보니 재수 군 가족의 빛바랜 사진과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가 눈에 들어왔다. 이 교과서에 재수 군의 효행 이야기가 수록돼 있다.

상영관에서 재수 군을 소재로 만든 영화 '아빠하고 나하고'를 보고 싶었으나 그러질 못했다. 대신 영화를 담은 USB를 받았다. 이 영화가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유튜브에 없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효자 고(故) 정재수 군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려주고 있는 모친 김일순 여사.

ⓒ 김기준기자
2층으로 올라가니 교실 하나가 그대로 있고, 재수 군이 앉아서 공부했던 그 책상엔 조형물 꽃이 놓여있었다. 취재를 마치고 기념관을 나오려는데 시청 직원이 친모가 상주시에서 살고 있다고 귀띔했다. 순간, 아!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친을 꼭 만나보고 싶었다. 모친의 휴대전화 번호를 적고 기념관을 나올 땐 이미 날이 저물어 찾아갈 수 없었고, 다음 날 모친에게 전화했다.

처음에 인터뷰를 사양했으나 계속해서 설득하자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해주셨다. 지난 16일 상주시보건소 앞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냈을 모친을 만났다. 아들을 취재하러 온다는 소식에 모친은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먼저 도착해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자를 기다렸다. 49년 전 죽은 아들을 위한 모정이 어떠한지 느껴졌다.

모친 김일순(83) 여사는 자식뻘 되는 기자를 만나자 조용히 손부터 잡았다. 따스했다. 길을 건너가 한 가게에서 마주한 모친은 매우 인자하고 편안한 느낌이었다. 재수 군이 집을 나설 때의 모습부터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의 기억까지 하나씩 끄집어내며 그날을 회고했다.

반세기가 됐는데도 여전히 모친의 눈가엔 눈물이 맺혔다. 재수 군이 죽고 각지에서 성금이 들어왔지만, 한 푼도 받지 못했다는 충격적인 말도 꺼냈다. 다만 교육청에서 두세 마지기 땅을 사줬고, 나중에 그 땅을 팔아 상주 시내로 나와 작은 가게를 운영하면서 식구들을 먹여 살렸다고 했다. 남편은 죽었지만, 시부모님을 돌아가실 때까지 부양했다. 재수 군의 동생 4남매(1남 3녀)도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다행히 건강하게 잘 자랐다. 자식들의 효심이 깊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경북 상주시의 ‘효자 정재수 기념관’에 걸려 있는 재수 군과 부친 태수 씨의 사진. 현재 재수 군 사진은 첫돌 때 찍은 이 사진이 유일하다.

ⓒ 김기준기자
모친은 재수 군 사망 뒤 1년여 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 막내딸을 뱃속에 두고 있었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주변에서 저러다 미치는 거 아니냐고 우려했다고 한다. 보다 못한 시어머니가 담배라도 피워보라고 했지만 피우지 않았다. 이때쯤 정신이 돌아왔다. 그리곤 남은 자식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허드렛일이든 뭐든 닥치는 대로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지만, 재수 군 사망 뒤 답지한 어린아이 옷들만은 아직도 모두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제수 군 묘지 관리와 추모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것 같다"고 하자 "많은 돈을 들여서 할 여력이 없다"며 다시 눈물을 글썽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살아 있으니 못 먹고 못 입어 본 아이들을 위해 기자님이 글을 많이 써달라"고 당부했다.

현재 ‘효자 정재수 기념관’으로 운영하는 옛 상주 사산초등학교에 있는 재수 군 흉상.

ⓒ 김기준기자
재수 군의 묘지 관리와 기념관 운영에 자치단체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지 않을까. 매년 추모제도 열어 효 사상도 계속해서 널리 알려야 하지 않을까.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인터뷰 장소였던 가게의 주인이 귀동냥하다가 얼른 음료를 가져다줬다. 덕분에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려 가벼운 이야기를 나눴다. 오후 6시쯤 모친은 노인 일자리 사업인 청소를 하기 위해 노인회관으로 가야 했다. 모친은 그곳까지 바래다주는 기자의 손을 다시 꼭 잡았다. 그 따뜻한 손에서 효자 재수 군을 그리워하는 노모의 정이 온몸으로 들어왔다. 보은 /김기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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