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길 따라, 꿈길 따라

2025.06.24 15:06:59

장현두

시인·괴산문인협회장

온 세상이 싱그러운 녹음으로 물드는 초여름, 봄비처럼 비가 내린다. 한여름 같은 뙤약볕에 시달린 초목들도, 더러는 일상을 살아내느라 거칠어진 마음들도 비를 맞으면 한 마리 순한 양이 된다.

밤새 촉촉이 내린 비가 풀잎 위에 은방울 금방울을 선물하고 텃밭에 오이, 토마토, 고추들이 아이들처럼 신이 나 폴짝폴짝 뛰는 듯하다. 더없이 상쾌한 아침을 맞는 나도 이들과 하나가 된다. 꿈속에서 내리는 비가 마술을 부리기 때문은 아닐까.

그 마술에 홀려 오늘 아침 일찍 출발하는 문화체험행사를 잊을 뻔했다. 이 행사는 지역 유수 업체가 지역민을 위해 후원하는 행사로 단체 불국사 기행을 가는 것이다. 학창 시절 수학여행 때인지 어느 때인지 가물가물한 꿈속의 기억을 몇십 년 만에 다시 불러낸 셈이다.

내 꿈속에 불국사는 아직도 제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부처님의 화엄세계인 불국토(佛國土)를 현세의 사바세계에 구현하기 위해 세웠다는 불국사는 '불국사(佛國寺)'란 묵직한 현판이 걸려 있는 일주문과 무서운 사천왕이 버티고 있는 천왕문을 지나 몇 개의 다리를 건너면 대웅전이다. 대웅전 경내는 지난주에 가본 송광사의 절반도 안 될 정도로 좁은 편이나 양쪽의 두 탑과 한가운데 석등이 이루는 조화는 완벽 그 자체다. 왼편 탑은 남성적인 석가탑으로 단순 소박미와 중후함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인다 싶고, 오른쪽 다보탑은 볼수록 그 정교함 속에 화려한 여성적인 아름다움으로 빨려들게 한다.

불국사의 백미는 대웅전의 양 처마 끝에 있다는 느낌이다. 나비의 날갯짓을 연상케 하는 처마는 나비가 막 날아오르는 모습이다. 송광사 대웅전의 처마가 날개를 활짝 펴는 모습이라면 불국사의 그것은 완성으로 가는 미완성의 여정이랄까 다소곳이 천천히 나는 모습으로 더 마음에 와닿는다. 종착역에 도착한 기차보다 종착지를 향해 달리는 기차가 더욱더 끌리듯이.

비는 봄비 오듯 내린다. 간간이 내리는 빗길 따라 꿈길 따라 석굴암을 오른다. 굽이굽이 석굴암 가는 길은 싱싱한 숲으로 울창하다. 비에 젖은 나무들이 들어온다. 한 백 년 나이를 먹은 듯한 소나무의 거북등 껍질이 비를 먹어 용의 비늘처럼 보인다. 한 마리 커다란 용이 금빛 은빛 비늘을 번득이며 꿈틀꿈틀 하늘 향해 올라가는 모습이라니, 용이 소나무로 환생한 게 틀림없다. 이 또한 비가 지어내고 부리는 마술이리라.

노년의 부실한 다리들이 이끄는 행렬이 석굴암에 이르렀다. 나는 자연스레 겸허해지는 마음으로 본존불을 뵈었다. 그 웅장하고 엄중하면서 자애로운 모습에 절로 가슴을 여미고 합장하며 조용히 고개 들어 부처님의 눈길을 본다. 약간 아래를 내려보는 눈길이 한없이 부드럽다. 부처님 온몸에서 나오는 따스한 기운이 추운 겨울날 난롯불을 쬐듯 가슴을 녹여준다. 나는 언제 한번 남한테 저런 눈길과 온기를 준 적이 있었던가.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아쉬운 발길을 돌리는 길에 저 안개에 쌓인 숲속에서 뻐꾸기 소리가 들린다. '뻐꾹 뻐꾹 뻐꾹 ~~~' 소리는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어울려 더욱 적적하게 들려온다.

다시 불국사와 석굴암을 뒤돌아보며 "안녕~~"하고 손을 흔들었다. 귀로에 언제 비가 왔었느냐는 듯 하늘이 맑아졌다. 따스한 햇볕이 대지를 말리고 초목들도 다시 햇볕을 영접했다. 나도 문득 비가 선물한 꿈에서 깨어나 버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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