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에는 느티나무가 많다. 어느 동네를 가든 마을 어귀에 느티나무 한 두 그루씩은 다 있다. 대부분 수령이 수백 년 되어 우람하고 넉넉한 원을 그리는 모습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다. 괴산군의 군목이기도 한 느티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된 것만 120여 그루에 달하고 장연면 오가리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느티나무 두 그루는 나이가 800년이 넘는다. 오랜 세월 마을을 지켜주고 마을 사람들과 호흡을 같이 해온 느티나무, 이런 느티나무를 보노라면 절로 마음이 넓어지고 충만 되는 느낌을 갖는다. 그런데 괴산은 왜 이렇게 곳곳에 느티나무가 많이 있을까.
괴산의 옛 이름은 고구려 때는 잉근내현, 신라 때는 괴양현, 고려시대에는 괴주를 거쳐, 조선 태종이후 현재의 이름인 괴산으로 불리어 오고 있다. 신라 때 부른 '괴양'이란 이름은 '느티나무(또는 회화나무·槐)' 자와 '땅(壤)' 자를 써서 '느티나무의 땅'이란 의미를 갖는다.
괴산은 삼국시대에 삼국의 요충지였다. 삼국사기에 괴산과 관련된 가잠성 전투에 대한 기록이 전해진다. 가잠성은 그 위치가 안성의 죽주산성설과 괴산군설로 나뉘어 있는 등 아직 학계에 정립된 것은 없다.
서기 611년 백제의 무왕은 대군을 일으켜 당시 신라의 땅이었던 이 가잠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신라 진평왕은 당시 용맹하기로 유명한 장수 찬덕(讚德)을 신임하여 바로 한 해 전에 성주로 임명해서 가잠성을 지키게 하고 있었다. 장수 찬덕은 백제의 포위 공격에 맞서 한겨울에 식량과 물이 떨어져 시체를 먹고 오줌을 마시면서 100일간의 처절한 항쟁을 벌였지만 전황을 뒤집기 어려워지자 주위에서 항복하자는 소리가 나왔다. 이에 대해 찬덕은 "왕께서 나를 믿고 보내셨는데 내가 그 기대를 저버렸으니, 죽어서라도 백제로 부터 이 성을 되찾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끝내 항복하지 않고 느티나무에 달려들어 머리를 부딪쳐 자결하였다.
후에 신라 무열왕은 순국한 찬덕 장수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서 가잠성을 괴양(槐壤)이라고 부르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신라시대에는 괴산을 괴양이라고 부른 것을 미루어보면 가잠성이 곧 괴산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 본다. 이후 고려에서 괴주(槐州), 조선에서 괴산(槐山)이라고 불러 괴산은 느티나무와 밀접한 관계, 즉 느티나무가 무성한 '느티나무의 땅'이란 뜻이 충분히 연상된다.
'槐(괴)' 자는 느티나무 또는 회화나무란 뜻만 있는 것이 아니다. 중앙, 중심이란 의미도 있다. 그래서 예전에는 일반인은 이 '槐(괴)'자를 함부로 쓰지 못했다고 한다. 군 단위 이상의 지명에 유일하게 '槐(괴)' 자가 쓰인 곳이 괴산이다. 임금의 궁전을 괴신(槐宸),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삼정승이 집무하는 관아를 괴부(槐府) 또는 괴사(槐司), 그 삼공의 자리를 공괴(公槐)라 부른 것을 보면 '槐(괴)'자의 중심, 중앙이란 의미가 이해가 된다. 괴산은 충청북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고 GPS상으로도 한반도의 정중앙의 지점으로 지명의 뜻이 실제 지역과 맞아떨어지는 우연의 일치라 하겠지만 신기하기도 하다.
6월 호국보은의 달에 괴산의 아름다운 느티나무들을 바라보면서 순국지사를 떠올리게 된다. 괴산 땅에는 가까이는 나라가 경술국치를 당해 주권을 상실함에 의분하여 목숨을 던져 소나무에 충절의 피를 새긴 일완 홍범식 열사가 계시며, 멀리는 가잠성 전투에서 순국의 선혈을 느티나무에 뿌린 찬덕 장수가 있다. 그 고귀한 충절의 정신이 이어내려 일제강점기에 삼일운동 때 충북 최초의 3·19 괴산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이러한 애국충절의 역사가 살아있는 괴산 땅에 소나무와 느티나무가 많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는 느낌이 든다. 수호신 같은 그들이 이 나라 이 땅을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수많은 호국영령의 보살핌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며 감사한 마음과 자부심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