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의 우리 조상님들이 그리 믿었을 절기 중에 대설(大雪)에는 큰 눈이 온다. 대설 보름 전에 소설(小雪)이고 소설 보름 전에 입동(立冬)으로 겨울은 이미 한 달 전에 시작되었건만 눈은 오지 않았고 대설에 와서야 첫눈이 내렸다.
눈은 두어 시간 내렸으나 온 대지를 하얗게 만들었다. 가을이 죽어간 색 바랜 지푸라기 같은 모든 이파리들을 한 편의 추억으로 묶어 말끔히 보내버렸다.
서설(瑞雪), 상서로운 눈이다.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조짐인가. 보기 싫은 모는 것들을 일거에 쓸어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선물하였다. 마치 아무 그림이나 마음 내키는 대로 그리라고 흰색 도화지를 받은 느낌이다.
요즘 우리 사는 땅에 너무 당혹스럽고 마음 아픈 일이 많다. 10·29참사로 158명이나 되는 젊은 꽃 같은 생명들이 숨 한 번 쉬지 못하고 사라져갔다. 그 죽음의 순간은 참으로 참혹하여 상상이 안 된다.생때같은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들의 쓰라림과 평생을 두고 지울 수 없는 불도장을 찍었는데도 우리 사회가 뭔가 따스하고 시원한 대답을 못해 주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답답한 마음에 요즘에 유튜브에서 나오는 노래를 듣는다. 그중에서 듣는 노래마다 가슴 구석구석까지 후벼 파는 가수가 있다. 이년 전 한창 트로트 오디션 프로가 국민적 인기를 끌 때 포항의 한 중학교에 다니던 당시 15살의 소녀가 나타나 주목을 끌었다. 그 앳되고 때 묻지 않은 조금은 촌스럽기도 한 전유진이라는 소녀는 시원시원한 가창력에 여리여리한 꽃 같은 감성으로 기성 가수들의 노래를 새롭게 불러댔다. 그러고 한 이년 지나 이제는 17살 고교 1학년이 된 그녀는 더욱더 성숙하고 깊이 있고 맛깔나게 트로트를 부른다. 나는 이 전유진 양의 노래를 들으면 한두 시간은 훌쩍 가버린다.심금을 건드리는 백합꽃 같은 감성에 모든 복잡한 심사가 저절로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이다.
최근에 선보인 유진 양의 <모르리>라는 곡의 가사를 들여다본다. 가수 남진이 2002년에 불렀던 곡인데 별 인기를 끌지 못했던 곡이다.
그대 곁에 있으면
허물어지는 마음
그대는 모르리 모르리
그대 곁에 있으면
나그네 되는 마음
그대는 모르리 모르리
너를 사랑하고도
너를 보내야하는
찢어지는 가슴을 달래며
나나나나나 나나나나나
웃음으로 통곡하네
그대는 이 마음 모르리
('모르리' 1절)
'너를 사랑하고도 너를 보내야하는 찢어지는 가슴을 달래며'라는 가사가 10·29 참사 유가족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다. 유진 양의 그 하늘 끝을 모르는 시원시원한 고음으로 '찢어지는 가슴'이 뻥 뚫렸으면 좋겠다. 또 그 바다보다 깊은 맑디맑은 감성으로 '웃음으로 통곡하는 마음'이 위로 받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렵고 힘든 일을 당하면 서로 도와 일으켜 세워주고,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사연이 있을 때는 누구라도 따듯한 위로의 말 한마디를 건네며 함께 아파하고 함께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인지상정이요 최소한의 인간의 도리이다. 아무리 세상이 삭막해졌다 해도 우리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 선한 본성을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첫눈 내려 하얗게 쌓인 오솔길을 천천히 걷는다. 차가우나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흐려졌던 정신을 일깨운다. 그 끔찍스러운 참사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죄스러움과 사막 같은 가슴을 안고 살아가는 유족들에게 멀리서나마 죄송한 마음을 전하며 반성의 발자국을 찍으면서 조금이라도 위로받는 첫눈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