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산나 호산나!" 새끼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를 향해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했고,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해 줄 메시아라, 유대인의 왕이라 믿고 환영을 한다. 하지만 예수가 죄에서의 구원을 위해 오셨다는 말씀에 호산나를 외치던 유대인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외친다. 그에게서 아무 죄를 찾을 수가 없다던 빌라도의 고백에도 그들은 마침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지금은 고난주간,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친히 피 흘려 돌아가신 주의 발 앞에 내 모든 기도는 사랑의 노래가 된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마을엔 야트막한 동산 위로 예배당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해방을 맞으며 미국 선교사가 세운 교회이다. 신앙의 불모지였던 산골이었건만 면면히 믿음을 이어온 교회는 어느덧 설립 80주년이 되었다. 동네에 교회가 세워진 덕분에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크리스챤이 되었고 모태 신앙인인 셈이다. 내 믿음의 산실이던 고향교회의 추억은 신앙의 밑거름이 되었고 석양을 바라보는 나이 임에도 또렷하다. 일자형 한옥 예배당 나직이 솟은 종탑 그리고 나무 십자가와 작은 강대상, 세월을 말하듯 붓글씨로 쓴 두툼한 찬송가 궤도는 켜켜이 손때 묻어 한지가 누렇게 바래져 있었다. 마룻바닥에 정갈하게 놓인 예배 방석들, 낡은 풍금 소리와 아이들 찬송 소리가 아득히 봄바람 타고 꽃향기에 실려 오는 듯하다. 가난했고 비루하던 나의 유년 시절은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복된 소식보다 빵 문제가 더 절실했었는지 모른다. 간혹 주일이나 절기에 받아먹던 사탕과 사과 반쪽 그리고 연필 같은 구호품들이 절반의 복음이었을 게다. 그럼에도 문명의 수혜였을까. 늙으신 전도사님이 들려주시던 성경 속 이야기와 성극 성가 노래 율동은 어린 시절 유일한 신문명(?)의 근간이었으며 즐거움이었다.
지난 금요일에 초등학교 일학년인 외손녀가 우리 집에 왔다. 학교생활에 적응하려 애쓰는 모습이 안쓰러운데 "할미! 근데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게 맞더라" 한다. 사연인즉 영어 수학 피아노학원으로 순례(?)하며 모든 공부를 마치고 엄마를 기다리다 "울 엄마 빨리 오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단다. 하나둘 셋 넷…아흔아홉 백까지 셌는데 엄마가 오지 않더란다. 다시 백까지 세며 이번에는 더 간절하게 기도를 하고 눈을 떠보니 엄마가 바로 앞에 와 있었으니, 하나님이 내 기도 들어 주신 게 맞지? 라며 눈망울이 촉촉한 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씀이 있다. 아이가 들려주는 작은 고백이 고난주간 선물 같아 마음이 기뻤다.
주님을 대하듯 잠잠히 나무 십자가를 바라본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천 년 전,날 위해 돌아가신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 그리고 나를 대속하신 구속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사가 넘친다. 멸시와 천대를 다 받으시며 희생의 제물이 되셔야만 했던 십자가의 주님처럼 나도 십자가를 지고 가라는 무언의 절규가 마음을 두드린다. 언젠가 다시 오실 그분을 위한 나의 노래는 '에서'가 부르던 칼의 노래가 아닌 사랑이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