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머물다간 자리마다 곱게 물들어가는 단풍이 아름답다. 창 너머 다 익은 마로니에 잎이 금빛 웃음 날리며 바람 따라 살랑 인다. 그 빛 하도 고와 내 맘의 강물에 띄워 본다.
외손녀가 반짇고리를 꺼내 놓고 나를 부른다. 그새 바늘귀에 실을 꿰고 실 끝을 당겨 매듭을 짓고 있었다. "할미, 여기를 이렇게 하면 어떨까?" 지금껏 의지해온 애착 인형이 실밥이 풀려 솜이 빠져나온다며 옆구리를 꿰매 달라는 것이다. 벌써 몇 번째인가. 여기저기 여러 번 기운 흔적이 남루하다. 그만 버리자고 타일러도 봤으나 정이 깊이 든 탓에 막무가내다. 얼마 전 아이 몰래 인형을 버리려다 들통이 나는 바람에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다. 오래돼 누추해 보이는 것을 옆에 누이고서야 안도하다니 애착 인형이 주는 안정감이 있나 보다. '노엘'이라 부르는 이 인형은 첫 손주를 본다는 기쁨에 준비한 선물이었다. 갓난아기 때부터 동고동락(?)했으니 어느덧 동갑내기 아홉 살인 셈이다. 돌아보면 커다란 여자아이 인형은 엄마가 되었다가, 친구도 되고 동생 역할을 했다. 지금은 헤져서 허름하고 너절해도 온갖 정성을 쏟던 기억이 난다.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가며 한 땀 한 땀 헤진 솔기마다 꿰맸다. 어여쁜 소녀이던 인형은 외손녀보다 작아졌고 이미 형체가 일그러져 얼마 못 갈 것같다. 비록 겉모양은 볼품없어도 인형에 스며든 엄마 냄새, 아기 냄새가 좋다며 코를 대고 흡흡거렸다. 그간 케케묵은 추억이라 치부했는데 아이의 맑은 영혼에서 곱게 물들어가는 단풍잎을 본다.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엄마의 젖 냄새 보드라운 살 냄새가 잊힐세라 다시 꼭 안아 준다.
내가 아홉 살이던 1960년대 초, 보릿고개를 지난 어머니의 부엌은 황토를 바른 흙 부뚜막이었다. 얼마나 열악하고 궁색한 환경이던가, 가물거리는 흐릿한 등잔불 아래 저녁이면 양반전 허생전 별주부전을 읽어 주시던 아버지의 구성진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인형이나 장난감은 이름조차 생소했고 가난한 살림살이엔 사치에 불과했다. 당시 놀잇감도 변변치 못했으나 땅따먹기 놀이 고무줄놀이 공깃돌 놀이를 하는 우리에겐 어쩌면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가을이면 개울가에 나가 치마폭에 작은 조약돌을 줍던 어린 날의 풍경이 한 장의 수채화 그림처럼 떠오른다. 동글동글 동그란 돌멩이들과 길 다란 검정 고무줄은 그 시절 내가 유일한 놀잇감이었다. 사금파리 조각으로 길바닥에 금을 긋고 놀던 땅따먹기 놀이, 구전동요를 부르며 동무들과 고무줄을 넘던 고무줄놀이,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 잊혀진 시절 불렀던 소싯적 가사 한 줄이 가끔 찾아와 마음을 건드리고 간다.
'노엘'이 만을 고집하던 외손녀가 무슨 마음에서인지 애착 인형을 놓아주기로 했단다. 얼마나 애달팠을까, 고이고이 천으로 감싸주다 어루만지며 작별 인사를 했다. 내 마음도 괜스레 허전하다. 문득 옛 시절 우묵한 손등에 올려놓은 조그만 조약돌, 마당 끝 대추나무에 매어놓은 검정 고무줄 그리고 마을 어귀 흩어진 사금파리 조각들이 자꾸만 말을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