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군불

2025.02.17 14:03:38

박영희

수필가

창밖에 머문 햇살이 봄의 문을 두드린다. 남녘 어디선가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렸다는 소식에 어여쁜 봄꽃 하나 마음에 피워본다. 너무 성급했던 걸까. 살포시 오는 봄을 시샘하는 걸까. 겨울 끝자락에 연일 한파경보, 주의보 문자가 쇄도한다. 움츠러들게 하는 늦추위에 고향 집 아랫목을 그리며 쉐타 한 장을 덧입는다.

남편의 본가는 시골이다. 결혼을 앞두고 시댁에 갔던 겨울날의 전원 풍경이 지금도 생생하다. 조붓한 고샅길에 겨울 감나무엔 등불을 켜듯 가지마다 붉은 홍시를 매만 채 길을 밝혔다. 슬레이트 지붕이 아담한 시골집의 마당 가에 오래된 자두나무는 나를 반기듯 비스듬히 담장에 기대어 있었다. 군불을 지핀 방안은 따스한 온기로 가득했다. 이윽고 긴 앞치마에 수건을 두른 시어머님은 꽃 그림 지워진 낡은 알루미늄 쟁반 위에 식혜를 내오셨다. 커다란 국 대접에 담긴 단술을 기다란 밥숟갈로 저어주시며 "어서 먹어봐요" 하시던 순박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때마침 토광 앞 둥지에 알을 낳고, 파닥거리던 암탉의 울음소리는 유난히 높은음으로 들려왔다. 살며시 내 손을 잡으며 축복의 소리라고 너스레를 떨던 남편의 지나간 모습에 웃음이 난다. 뜨락부터 뒤꼍 굴뚝까지 처마 밑을 돌아 빼곡하게 쌓아 올린 장작더미는 아버님의 결연한 의지를 가늠하기에 충분했다. 오대 독자라서 유약하시던 나의 친정아버지에 비해 시아버지는 매사가 강하고 담대한 분이시다. 비록 땔감이라지만 간격과 규격을 맞춘 장작들 풍경은 어느 예술가의 모자이크 작품보다도 출중하여 한눈에 들어왔다. 자로 잰 듯 반듯하고 물기 없이 바싹 마른 장작더미에 멍울진 그리움 한 조각 눈앞에 아른거린다.

예사롭지 않게 쌓아놓은 장작개비에서 이른 나이에 나무장사를 했었다는 아버님의 인생사를 들을 수 있었다. 적은 농사 거리로는 가난을 면할 수 없어, 읍내로 나무를 팔러 다니셨다는 아버님… 칠흑같이 어둡던 암흑의 세월에 사는 게 얼마나 두려웠을까. 또 얼마나 힘겨웠을까. 마음이 숙연하다. 쌀밥 대신 장려 쌀을 놓는 것으로 굶주린 배를 채웠고 그날 벌어온 돈은 아무도 모르게 장판 밑에 숨겼다고 한다. 언젠가 남편의 사업에 부도 위기가 왔을 때 피 같은 돈을 허리춤에 차고 오셔서 위로와 용기를 주시던 아버님, 전대를 풀자 묵은 돈다발에서 온갖 퀴퀴한 냄새가 풍겼다. 그 냄새는 한숨과 땀과 눈물이 서린 아버님의 고매한 향기였다.

부모님의 시골 가옥도 문명의 물결에 에어콘도 놓고 마루는 유리문을 낀 거실로 새 단장을 했다. 하지만 뜨끈한 구들과 아랫목은 생전에 바꿀 수 없다 하시며 여전히 부뚜막에 아궁이 그대로였다. 설 명절을 쇠러 내려올 때면 손녀들을 아궁이 앞에 앉히고 군불을 때신다. 스멀거리던 불길이 활활 타오른다. 휘몰아치듯 아궁이 속 끝으로 빨려 들어가는 세찬 불길이 불끈하다. 따다닥 타닥, 마른 장작들이 죽비 타는 소리를 내며 신음한다. 방고래를 향해 타들어 가는 강렬한 불꽃은 아버님의 젊은 날을 연상하게 했다. 타오르는 장작개비 사이로 얼마나 많은 고뇌와 탄식의 눈물을 삭였을까. 기운차게 타오르던 장작불이 점점 사위어 들면 부지깽이 뒤척이며 석쇠에 김을 굽던 투박한 손길… 오늘처럼 한기가 밀려올 때면 마음 까지 덥혀 주시던 아버지의 군불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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