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던 날의 고욤나무

2024.01.29 14:34:43

박영희

수필가

마른나무 사이로 바람이 속삭인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하얀 눈송이가 소리 없이 나무숲 사이를 떠돌다 내려온다. 더러는 유리창에 부딪히다 사라진다. 나에게로 들어오려는 걸까, 베란다 문을 열자 하나둘 눈송이가 날아들다 사르르 사라진다. 눈은 언제 보아도 신비롭고 마음을 설레게 한다. 차분히 내리는 눈은 하늘이 보내는 축복의 선물 인양 영혼의 묵은 때를 씻어주며 마음을 순화하고 너그럽게 한다. 눈발이 제법 굵어지더니 쌓여간다. 창문 너머 빈 놀이터 그네에도 미끄럼틀 위에도 눈 덮인 전경이 아름답다.

오늘처럼 눈이 오는 날엔 고향 집 풍경이 떠오른다. 이엉을 얹은 담장 위로 소복이 눈이 쌓여 있었다. 까치발을 하고 마루 끝에 서서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던 어린 날의 모습이 눈발 사이로 가물거린다. 그날도 밤새 눈이 왔다. 아직 어둠이 깔린 새벽이건만 엷은 문풍지 사이로 눈 치우는 소리가 잠결에 들렸다. 눈은 "누가 밟기 전에 먼저 치워야 한다"시던 아버지는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눈을 쓸었다. 뜨락 밑으로 싸리 빗질 소리, 고밀개 미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버거운 삶의 무게를 쓸어 내고픈 아버지의 벅찬 숨소리 같기도 했고 희망의 찬가 같기도 했다. 어린 나는 잠을 자는 척 이불을 감싸며 못 들은 척했다. 지금도 어디선가 마당 쓰는 소리가 들릴 때면 아버지의 숨소리 같아 내다 보곤 한다.

우리 집 바깥마당엔 고욤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엄동설한에 두엄 탕 옆에서 눈을 맞고 서 있던 쓸쓸한 고욤나무 생각이 난다. 고욤은 열매가 작고 씨가 많아 과육도 적어 홀대받는 과일이다. 그러나 유실수가 없던 우리 집에서는 한겨울 간식거리를 제공하는 유일한 과실나무였다. 궂은 비가 내리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던 가녀린 나무는 늙고 초라한 부모님의 애상처럼 마음이 시렸다. 앙상한 나무 끝에 쪼글쪼글 붙어 있던 고욤은 아버지의 처절했던 자화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역사의 암울했던 시대를 꿋꿋이 살아내며 많은 자식을 건사하느라 얼마나 절박한 가슴이었을까. 오대 독자로 태어나 일찍 어머님을 여의고 외롭고 고단한 여정 속에 홀로서기를 해야만 했던 아버지는 심약한 성품이셨다. 농사일보다 한학을 가르치는 일에 더 열심이었으니 저녁마다 아버지의 글 읽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좀 더 나은 시대를 만났더라면 문학과 예술을 향유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을 텐데… 몇 번에 걸쳐 감나무와 접붙이기를 시도했으나 어떤 연유에선지 번번이 실패하였다. 우리와 함께하던 고욤나무는 마을이 재개발에 들어가면서 작별을 했다. 성급한 마음에 설익은 것을 따 먹다가 떫고 씁쓸한 맛에 씨 채 내뱉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머니는 겨울이 깊어서야 고욤 항아리를 열었다. 장독 틈에서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던 고욤은 어느새 흥건히 물러서 단물이 조청처럼 엉겨 붙어 있다. 부엉새 슬피 우는 밤 호롱불 아래 혀가 아릿하도록 고욤을 먹던 가난한 행복이 그리워진다. 외로워 보이던 고용나무가 내 가슴에 굵은 나이테를 그리며 눈밭에서 안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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