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라면

2024.04.29 15:09:40

박영희

수필가

초록이 눈부시다. 낭창거리는 이파리 사이로 갸웃거리는 햇살이 오늘따라 더욱 아름답다. 파란 풍경들이 첫사랑처럼 설레고 황홀하다. 이토록 어여쁜 빛깔은 어디서 오는 걸까, 푸르고 푸르른 이 초록의 바다에 영혼의 묵은 때를 씻으며 신비하고 오묘한 자연의 섭리에 옷깃을 여민다.

지난 봄방학 때, 딸이 전근 발령을 받고 매년 하는 건강검진을 받았다. 평소 건강했으니 결과야 대수롭지 않겠지 했는데 뜻밖에 암이 의심된다는 전화가 왔다. 부랴부랴 서둘러 조직검사를 하니 유방암 1기라는 진단이 나왔다. 아뿔싸,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맑은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암이라고 선고하는 의사는 겸연쩍어하며 "수술하면 됩니다. 아주 순한 암입니다. 100살까지 충분히 살 거예요"라고 위로하는데도 암이라니… 전신에 힘이 쏙 빠진다. 딸은 충격에 빠져 한참을 울고불고 사위도 말문이 막히는지 어쩔 줄 모른다.

고난이 유익이라고 하지만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절체절명 순간이다. 신은 왜 우리에게 이런 시련을 주는 걸까, 괜한 원망을 해 본다. 어떤 위로자는 인생은 빛과 어둠이 교차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고난을 통해 인생의 아름다운 무늬가 만들어지고, 오늘의 시련을 통해 값진 보석을 발견하게 될 거라고 했다. 조용히 말씀을 묵상하다가도 우리가 겪게 될 고초가 너무나 가혹한 형벌로 다가왔다.

영혼의 어두운 밤을 만난 걸까, 해맑고 행복했던 우리 집은 먹구름만 가득한 채 피차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아이들 웃음소리도 그치고 무거운 침묵만 흐른다.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나갈 것인가, 고민은 더해가고 의료분쟁 때문에 수술이 제 때에 될지 걱정이다. 불행 중 다행히 대학병원에서 순조롭게 수술을 받게 되었다. 수술을 앞두고 아이는 잠을 못 이루는 눈치다. 얼마나 두렵고 떨릴까, 측은한 마음에 차라리 엄마인 내가 아픈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누구의 죄 때문인가, 내 죄 때문인가, 성경 말씀에는 그 누구의 죄도 아니라고 했는데 야속하다. '고난은 변장 된 축복'이라는 한 가닥 희망을 믿으며 별의별 생각에 빠져만 갔다. 삶과 죽음을 오가게 하는 암이라는 무서운 현실 앞에 마음은 쉼 없이 널뛰기를 한다. 어린 손주들 걱정도 했다가 완치의 순간을 기대하다 다시 조바심에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당사자인 딸은 더 깊은 고뇌에 자꾸만 뒤척였다.

이튿날 자그만 암 덩어리를 떼어낸 의사는 "이제 암 환자는 아닙니다" 하며 웃음을 지어 보인다. 우리도 오랜만에 웃음꽃을 피웠다. 인생은 희로애락 희비애락이라는 말이 공감이 간다. 지금은 네 번의 항 암중 첫 번째 항암 주사를 맞고 왔다. 뚜벅뚜벅, 두렵고 무서웠던 어둠의 터널을 걸어오기까지는 온 가족의 사랑과 우리가 신뢰하는 신앙의 힘이 컸다. 덕분에 누군가의 아픔을 진정으로 위로할 수 있는 안목을 교훈 삼게 되었다. 별다른 항암제 부작용도 없이 오늘은 예쁜 가발을 준비하자고 한다. 모든 이의 사랑의 손길을 감사하며 어미의 기도는 오늘도 끊임없이 흐른다. "주여! 내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시고 딸을 고쳐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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