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숨소리는 경전이다. 비와 눈, 안개와 노을. 저 머나먼 하늘에서 땅으로 다가서는 자연의 움직임들은 마치 몸 안에 깃들어 사는 생명체처럼 때론 고요하게 때론 세차게 함께한다는 걸 느낀다. 계절로 치면 초가을이고 하루로 치면 해 질 무렵이다. 젊은 날에는 보이지 않고 맞닿지 않았던 이러한 흐름이 이제야 마음에 고이나 보다. 새벽이슬처럼 맑고 찬란하진 않더라도 뜨거운 한낮을 지나와 시나브로 무욕한 삶을 향해 가야 한다는 걸 적당히 주름진 강물의 모습에서 읽는다.
수업 시간, 선생님 몰래 하이틴소설 책장을 넘기던 소녀 시절에는 봄을 참 좋아했다. 쉬는 시간마다 화단에 핀 다홍빛 장미를 보러 갔고 정수리 가득 햇살을 담아온 기억이 아직 환하다. 그보다 더 어렸을 적에는 말수가 적어 아무도 속을 몰랐다. 혼자서 안으로 삼킨 낱말을 자음과 모음으로 분리하거나 다시 합치는 놀이를 하며 내내 즐거웠던 것 같다. 겨울은 지독히도 오랫동안 산골 마을에 머물렀다. 고향을 일찍 떠나고 싶었던 건 아마도 이러한 겨울 탓이리라. 딸에서 아내, 엄마, 학생과 직장인, 시민의 역할을 거치면서 울고 웃었고 무기력하거나 도전적이기도 했다.
삶은 결코 촘촘한 희망으로 이끌지만 않는다. 모든 걸 떨구고 의연히 서 있는 겨울나무의 행간을 읽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오래 걸린 시간만큼 이젠 모든 계절이 경이롭기만 하다. 공자가 말년에 심취했던 주역, 쉰 살에 주역을 배우면 큰 허물이 없을 거라는 말은 수백 번 수천 번의 계절을 보내야 온전히 자연을 읽고 글로 베낄 수 있다는 뜻이리라.
'숨'이라는 글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자. '스'는 날숨으로 밖을 향해 흐른다. '움'은 안으로 고이는 들숨이다. 'ㅁ'은 에너지의 곳간으로 'ㅜ'라는 연결 줄기를 통해 들고 나는 듯 보인다. 아, 이 작은 한 글자도 들숨과 날숨이 갈마들며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생명을 지닌 모든 건 이렇듯 비워내거나 채우는 과정을 거치며 목숨을 유지하는 게 아니던가. 커피포트와 같은 무생물에도 생기가 있음을 스승인 손종호 시인은 말씀하셨다. 귀히 여겨야 비로소 귀하게 존재한다는 것도 덧붙이면서.
눈이 내리는 날이면 숲으로 내달린다. 생명의 숨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하얀 눈송이들이 온 세상을 덮고 있어도 언 땅을 헤치고 나온 복수초는 제 키를 훌쩍 넘어 온기를 내뿜는다. 발이 푹푹 빠지는 눈밭에서 군데군데 숨구멍이 보이는 건 이렇듯 작은 생명들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하얀 눈 속 초록의 숨소리, 눈이 녹으면 무수한 작은 생명들이 돋아나거나 솟아나리라. 자연은 이렇듯 '생장사멸'을 반복하며 간명하고도 변하지 않는 규칙으로 존재하고 있다. 높고 낮음의 구분 없이, 넓고 얕음의 가름 없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보듬으면서.
우편함에 대선 공보물이 꽂혀 있다. 변화를 갈망하는 숨소리가 세차게 들리는 지금, 타인의 허물만을 읽을 때는 아니다. 오늘보다 더 생생한 내일을 남겨야 할 책임이 있음을 모두가 알리라. 귀하지 않은 숨소리는 없다. 들숨과 날숨처럼 마치 하나인 듯 다른 존재를 포용하라고 자연은 말하고 있다. 그런 자세야말로 극으로 치닫지 않는 정한 이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