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薄明)

2025.03.30 15:07:41

임정매

시인·'함께 읽는 시' 동인

봄이 보인다. 봄의 어원이 궁금해 포털사이트를 열어봐도 '빛, 볕, 해'에서 변화되었다는 것 외에는 논리적으로 와닿는 게 없다. 국립국어원에서도 역사 정보가 남아 있지 않으며, 15세기부터 형태의 변화 없이 현재까지 계속 쓰이고 있다는 답변만 확인할 수 있었다. 주역(周易)을 즐겁게 알려주셨던 오초 황안웅 선생의 말씀에 의하면 봄은 '보다', '보이다'라는 데서 비롯된 단어라 하셨다. 깊이 와닿았다. 겨우내 무채색이었던 자연이 온갖 빛깔들로 피어나 눈에 들기 시작하는 계절이 봄이라는 것이다.

2024년 한국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의 소설들을 최근에야 읽었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비롯한 모든 작품에서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범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각각의 작품에서 인간 삶의 연약감을 드러냈다는 평이 있다. 소설이건 시집이건 작품을 읽고 나면 가슴에 새겨지는 단어가 하나씩 있는데 작가가 무의식중에 혹은 의도적으로 여러 차례 사용한 단어거나, 나름 주제어로 파악한 단어기도 하다.

이번 『작별하지 않는다』에선 '박명(薄明)'이라는 단어가 선명히 다가왔다. 사전에서는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 주위가 얼마 동안 희미하게 밝은 상태'라 정의한다. 지평선 아래 위치한 태양의 각도에 따라 밝기가 달라 3가지 이름으로 분류되어 군사적 용어로도 쓰이고 있다. 흔히 쓰는 '여명'이나 '황혼'이 아니라 '박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의도는 무얼까. 영어로는 'twilight'이다. 뱀파이어와 인간의 사랑을 담은 판타지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어둑새벽이 아니라 해가 진 후에 남아 있는 빛을 더 말하고자 한 걸까. 육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과거와 현재, 고통과 진실의 연결통로로서 가장 적합한 경계의 때가 박명이 아닐지. 어쩌면 작가는 불가사의하고도 비밀스러운 중간 지대에서 진실의 빛을 포기하지 않고 있음을 박명으로 말하고자 한 게 아닐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역사가 있음을 써 내려가기 위해 작가는 박명 속에서 세계를 응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봄은 늘 반갑다. 겨울은 혹독한 고난과 역경을 나타내는 말로 주로 쓰였지만 봄은 그 겨울을 지나 맞게 되는 희망과 환희의 앞날을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으로 써왔다. 지혜로운 우리 조상들은 사람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땐 자연을 관찰해 그 해답을 얻고자 했다. 하지만 사람도 자연도 고통스러운 이즘이었다. 겨울로 되돌아가지 않기 위해, 지치지 않을 목소리를 내기 위해 사람들은 거리에서 봄을 기다리고 있다. 산불피해 규모가 역대 최대라는 뉴스가 보도되었고, 애타게 봄비를 기다리다 때아닌 눈을 맞기도 했다. 겨울의 마지막 복병이다. 움츠린 기간이 길었을지라도 한번 기지개를 켠 생명은 더는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제 빛깔을 지닌 채 피어나더라니. 그래서 더욱 보아야 한다. 늦어진 만큼 헌재의 현명한 선고를 기다린다. 언제나처럼 봄은 그렇게 무지갯빛으로 올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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