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나무를 찾아서

2025.02.26 13:43:06

임정매

시인·'함께 읽는 시' 동인

강의를 마치기 전 스크린에 그림 한 점을 띄워놓고 강사가 묻는다. "아득한 들판을 달리던 인디언 추장이 왜 갑자기 말을 탄 채로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는 걸까요?" 꽤 인상적이다. 말고삐를 팽팽히 잡아당긴 단단한 손 근육과 오랜 시간 광야를 달려온 것처럼 그을린 얼굴에 깊게 팬 주름, 더하여 그 어느 곳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듯한 먼먼 눈길이 여러 대답을 만들어 낸다. 큰 소리가 들려서, 부하들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를 보려고, 적들이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서, 무언가를 두고 왔기 때문에 다시 방향을 바꾸려고 등등의. 정답이 있는 걸까. 궁금하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삶은 자연 그 자체라 믿어왔기에 뭔가 현학적인 의미가 담겨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잠시 펼친다. 빙긋이 미소를 머금던 강사가 말했다. "내 영혼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보려고."

한때 우리 눈의 기능이 외부로만 향해 있는 것에 관해 강한 의문이 일었던 적이 있다. 고심 끝에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눈에 보이는 대상을 통해 자기 내면을 바로 보라는 의미일 거라고 말이다. 존경하는 선배 작가에게 투정 부리듯 눈이 흐릿해졌다고 했더니 '눈에 단풍이 든 거다'라는 아름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알아야 할 것과 이어가야 할 관계가 참 많다. 현란한 거짓과 첨예한 대립에 울컥 치미는 분노도 있다. 오늘을 살아가며 피로와 불안이 생겨나는 이유다. 짙은 안개처럼 피로와 불안이 눈으로 밀려온 날이면 나는 강으로 향한다. 갈 길이 멀어서일까. 강은 서두르지 않는다. 웬만한 일로는 둑을 넘어서지도 않는다. 가장자리를 아우르느라 잠시 멈칫대더니 반짝이는 여울을 지나 다시 깊은 호흡으로 고요히 마음을 가다듬는 모습이다. 저녁노을이 시나브로 내려온다. 보아야 하는 대상은 멀어지고 보고 싶은 대상이 다가오는 시간. 밤강에 어룽대는 달빛과 선연히 빛나는 별빛까지 품고서 집으로 돌아올 때면 내 영혼의 그림자도 잘 따라오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강둑을 거닐며 만난 사람들은 모두 푸른 강을 품고 있었다. '지프내'라 불리는, 인근의 영동 심천면과 옥천 이원면의 주름진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고 있는 강의 기슭에는 수십 년 전 미루나무가 둑을 이루었다고 한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푸른 나무들과 맑게 반짝이는 강물이 어우러진 그곳을 향해 벌거벗은 아이들은 봄여름 할 것 없이 달려갔을 것이다. 둥근 조약돌 아래로 고운 모래알들이 촘촘히 자리 잡은 강가에 누워 몽글몽글 피어오른 하얀 구름을 쫓아가다 스르르 잠이 들기도 하지 않았을까. 강의 주름만큼 추억을 지닌 사람들의 이마에도 주름이 늘었다. 달려온 날들보다 천천히 걸어가야 할 날들이 이젠 더 적게 남은 듯하다. 눈에서는 사라졌을지라도 마음으로 볼 수 있는 풍경들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비로소 절정이다.

얼마나 빠듯이 달려온 우리던가. 인디언의 말고삐를 당겨 잠시 멈춰보자. 사라진 미루나무가, 그의 푸른 잎사귀들이, 내일의 음표처럼 깃발처럼 나부끼는 모습이 보이는지. 수많은 물줄기와 이야기를 안고 흘러가는 저 강물에 묻는다. 대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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